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것을 점검하고 세워가는 세 번째 설교입니다. 작년까지 제가 주일에 해왔던 설교 스타일을 ‘강해설교’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해설하고 본문의 내용을 드러내어 메시지를 전하며, 그것이 시리즈로 맞물리며 더 깊이 말씀을 다루는 설교입니다. 올해 제가 주일에 하고 있는 설교 스타일은 ‘주제설교’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교를 구성하여, 신앙에 필요한 요소를 하나씩 세워가도록 돕는 설교입니다. 강해설교의
장점은 말씀을 차례대로 연구하기에 성경의 내용과 흐름을 배워가는데 유익하고, 아무래도 설교가 조금 더 성서신학적으로 깊습니다. 우리가 수요일은 여전히 이 방식으로 말씀을 다루어가고 있습니다. 주제설교의 장점은 필요한 하나의 주제를 다루기에 복잡하지 않고 조금더 실용적이며, 아무래도 설교가 조금 더 쉽고 친근합니다. 그리고 보다 조직신학적인 접근입니다. 신학의 키워드를 하나씩 다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번째로 여러분과 나눌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고
부르는 이야기에 대해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종교적 언어일까요? 일상의 언어일까요? 바꿔말하면 교회에서 사용하다보니 세상에서도 사용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일까요? 구원은 원래 있는 단어입니다. 철저한 일상의 언어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구원’은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교회를 한번도 다녀보지 않은 사람에게 ‘구원’의 의미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위험에서
건져냄”, “위기에서 살려냄”, “얽힌 것에서 풀어냄”, “망가진 상태에서 회복시킴.” 실제로 스포츠 중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것이 ‘야구’일 것입니다. 뭐가 있죠? 구원 투수. 구원 투수는 위기에서 팀을 구출하는 역할을 맡은 선수이죠. 구원은 이렇듯 아주 일반적인 언어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안에서 ‘구원’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요? 제 생각에는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 천국에 가게 된 것”, 이것과 유사한 대답을 가장
많이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의는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간혹 죄에서 구원, 지옥에서 천국, 이 개념 안에 너무 갇혀 있을 때, 오히려 풍성한 신앙의 세계를 누리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구원을 너무 종교적 언어로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무 제한하게 될 우려도 있습니다. 성경은 어떨까요? 성경은 구원을 굉장히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벗어나고 천국가는 이야기”로서의
구원도 이야기하지만, 생각보다 구원을 일상적인 ‘삶’과 관련해서 많이 사용합니다. 오히려 구원은 지금 우리의 삶과 관련한 현장 언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 병든 사람이 살아났다 : 죽어서 천국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억눌린 사람이 풀려났다 : 나중에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던 것에서 자유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났다 : 절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인생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여러분, 한번 렌즈를 벗고 이 말씀들을 다시 보십시오. 여러분이 기존에 ‘구원’이라고 하면 곧바로 ‘천국가게 되었다’로 읽었던 종교적 렌즈를 벗고, 이 말씀을 보면 예전의 이해와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눅 19: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구원이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삭개오야, 너 나중에 이제 천국 갈 수 있어.”로 읽히십니까?
그렇게 보려니까 ‘오늘’이 걸리죠. “오늘부터 너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어.” 저는 이렇게 읽힙니다. 그리고 물론 “나중에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과 함께 할거야”는 그의 새로운 삶에 주어질 또 하나의 열매이죠. 그것 자체가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에 따라오는 팩키지죠. 사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삭개오가 경험한 구원의 핵심이었습니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이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혈루증을 심하게 앓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이 “너 지옥에 안 가고 천국가게 됐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겠죠. 이 장면에서 성경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그녀를 괴롭히던 오랜 질병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사용합니다. 아예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마 9:22)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그녀는 병에서 나은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삶의 근원적 문제를 바꾸는 것에서 우선적으로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되지 않은 채, 미래의 나에게 임할 구원만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구원이 너무 필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종교적인 틀에 빠지면, 정작 구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복음을 못 전합니다. 이상한 이야기죠. 여러분, 이 여인이 지금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진짜 소원이었을까요? 지금 이 여인과 같이, 삭개오와 같이 삶을 사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 예수 믿어야 돼. 그래야 너 나중에 지옥 안 간다.” 이 이야기를 바꿔 말하면 무슨 이야기입니까? “너 이렇게 살면 지옥행이야, 임마.” 나보고 지옥 갈 존재라고 저주하는 종교를 여러분은 믿고 싶으세요? 그게 종교적으로 맞는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을
듣고 마음을 열기 쉽지 않죠. 삭개오는 믿고 싶었을까요? 삭개오는 그것을 필요로 했을까요? 혈루증 여인은요? 혈루증 여인에게 그것이 구원이었을까요? 구원이 우리의 미래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나부터 정말 믿고,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줄 수 없습니다. 모든 삭개오의 친구가 되어 그가 변화되는 과정을 다 옆에서 챙겨줄 수 없을지도 모르고, 모든 혈루증 여인과 같은
질병이 나을 것이라고 함부로 말해줄 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에서 나를 구원하셨고, 어떤 부분에서는 구원하고 계시는, 혹은 또 어떤 부분에서는 그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품고 살아갈 용기를 주시는 그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힘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는 일’만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가 너희의 그 삶을 구원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상담을 합니다. 그중 가장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몇 번씩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이 너무 버겁고 힘겹고 외롭고 두려워서 사는 것이 더 힘든 상태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시면, 너무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목사로서 죄송하기도
하고요. 너무 해준 것도 없고, 앞으로도 저의 한계를 아니까 그렇지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이 무엇일까요? 그래도 삶을 살아갈 만한 용기, 이유, 힘을 발견하게 돕는 일이 아닐까요? 반대로 언젠가 구원은 우리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대면하게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넘어선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며, 그 삶을 소중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끔 어떤 목회자들은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도 “기도하면 살 수 있어.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해.”라고 말합니다. 알죠 그 마음이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투쟁하듯 기도하며 그 기도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떨까하는 불안한 마음 속에서 삶을 마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태도가 진짜 믿음이 좋은 것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당사자나 유가족에게 굉장한 신앙의 오류와 상처를 안길 수도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 가족의 죽음이 내가 믿음이 없어서인가? 내가
더 기도하지 않아서인가?” 저는 죽음이 임박한 시간 앞에 섰을 때, 우리에 남겨진 이 땅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주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보내며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자체가, 그 소중한 시간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죽음 너머의 이야기이기 전에 지금 이 삶을 더 아름답게 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낸 사람이 죽음 이후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나중에 천국 가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 중심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절박하게 저는 지금의 삶에 구원이 일어나도록 돕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의 삶이 세상의 거짓된 것들에 몰두하여 헛되이 소비되고, 서로를 상처내고, 망가진 것을 방치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의 인생이 너무 소중한데,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 다들 힘겹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을 때, 주님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소중한 삶을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바꾸어 주고 싶으셨습니다. 우리의 미래적 삶은 현재적 구원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지만, 정작 그 삶은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름이 없다면, 어쩌면 ‘구원’에 대한 이해가 잘못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나중에 천국에 가는 이야기로 여기고, 삶은 죽기 전까지도 삶은 계속된 현실로 나누어
본다면, 신앙은 반쪽이 됩니다. 신앙이 미래는 보장해주지만, 현재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 머리로는 아무리 신앙에 삶의 답이 있다고 믿으려 해도,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종교가 미래는 보장해 줄 수 있지만,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혹은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 구원은 받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현실의 삶을 잘 사는 것뿐이다” 이렇게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종종 질문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인생에 질문합니다. 이렇게 질문합니다. - 왜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자주 길을 잃는가? - 왜 좋은 의도를 가지고도 관계는 계속 어긋나는가? - 왜 신앙이 있는데도 삶은 조율되지 않는가? - 왜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점점 더 묶이는가? 이 모든 질문이 우리를 삶의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의 표현을 빗대면 구원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언커넥트’,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겨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조율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벗어나 살아갑니다. 그러면 열심히 살지만 구원을 누리는 삶이 아닌,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 반복됩니다. 오늘 다루는 이 구원의 초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요나서의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이야기죠. 이렇게 시작합니다. (욘 1:1)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욘 1: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라는 도시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 사람이 ‘요나’입니다. 이미 교회를 다닌 경력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시다시피 요나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요리조리 도망가죠. 배를 타고 니느웨의 정반대편으로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당황하는데, 요나는 “내 이럴줄 알았어”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의 자기소개부터 들어보죠. (욘 1:9)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오.” (욘 1:10) 요나가 그들에게, 자기가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서 그에게 소리쳤다. “어쩌자고 당신은 이런 일을 하였소?” (욘 1:11) 바다에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일어나니, 사람들이
또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우리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욘 1:12)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여러분. 요나가 자기를 뭐라고 소개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원어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경외해서 자기 뜻대로 도망치다가 걸렸는데도 자기의
인식은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나가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말이 다 맞습니다. 해결책도 요나가 스스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잘 알아요. ‘하잘알’입니다. 결국 물고기밥 되었죠. 거기에서도 아주 멋진 기도를 드립니다. (욘 2:9)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욘 2:10) 주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뭍에다가 뱉어 냈다. 요나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구원은 주님께만 있다”는 고백을 하며 살아납니다. 그리고 이제 진짜 니느웨로 갑니다. 어쨌든 순종을 하는 것이죠. 니느웨는 정말 구원이 필요한 도시였습니다. 폭력과 악이 가득한 도시였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니느웨를 구원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부르신 것이죠. 요나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물론 아직도 자기 의가 가득했던
요나는 걸어서 사흘길이 걸리는 니느웨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데, 몇일 전합니까? 하루 전합니다. (욘 3:3)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욘 3:4)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순종을 안 했다고 하기도 어렵고, 했다고 하기도 어려운 줄타기를 잘 하는 선지자입니다. 신앙을 처음 가진 분들보다
알만큼 아는 분들이 종종 이런 줄타기를 잘 합니다. 제가 봤을 때, 그렇다고 요나가 하루 동안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습니다. (욘 3:5)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요나가 하나님에 대해서 전하긴 했던 것이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 너희가
심판을 받는 것은 이런이런 부분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이렇게 회개할 수 있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추할 수 있는 것은 3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거두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실지 누가 알겠느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교리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보장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 안에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이렇게 계속 살면 우리는 망한다”라는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상황이 있고, 거기에 요나의 메시지가 더해졌고, 그것이 집단적 회개라는 파급력 있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욘 3: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욘 3:10)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니느웨는 회개로 말미암아 멸망의 상황 앞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쁜 길과 힘을 앞세운 폭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 억압 속에 있던 사람에게는 현실적인 구원의 요소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요나서는 니느웨가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요나서의 진짜 핵심은 니느웨의 구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3장이면 족합니다. 요나서는 4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나서가 니느웨가 아닌 요나를 구원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 구원이 필요했던 사람은 선지자였던 ‘요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시자, 이번에는 요나가 화내면서 말합니다. “내가 분명히 이럴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래서 애초에 이
일을 안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스스로 뭐라고 생각해요. ‘하잘알.’ 요나는 니느웨가 심판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시기로 하니까 화가 납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마음대로 할 것이면, 왜 나를 귀찮게 불러서 이 일을 시켰느냐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니느웨 때문에 요나를 불렀을까요? 그것도 맞죠.
그런데 제가 봐도 하나님이 다른 사람 불러서 했어도 니느웨는 회개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나는요? 지금 이 모든 일들을 다 겪고도 우리 ‘하잘알’ 요나는 이 일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전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요?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요나서가 보여주는 것은, 요나는 끝까지 니느웨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모르는 선지자였다는
아이러니로 끝납니다. (욘 4:8)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박넝쿨 하나에도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가, 박넝쿨 하나 사라지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사람.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요나. 그는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이 구원하길 원하시는 분임을 압니다. 자신도 바다에 빠져도 구원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리 죽여달라고 해도, 하나님이 절대 죽이시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이상한 신앙의 논리로 하나님에게도 대들고 협박하며 땡깡 피우는 사람. 그가 요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대한 거부입니다. 요나서는 니느웨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맞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하나님이 구원하고 싶은 한 사람, 요나를 보여줍니다. 니느웨는 적어도 자신이 잘못 가고 있음을 알기에 회개의 부름 앞에 나서야 함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이킴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교회 안에 가득한 수많은 요나들은 정작 자신에게 얼마나 구원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가열차게 자신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신의 논리로 말하며,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경쟁하고, 하나님께 잡히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을 믿고 말하지만 실제로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삶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오늘의 설교를 정리해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니느웨도 아픔이지만,
어쩌면 요나가 더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앙에 너무 확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잘알.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만약 우리가 하나님도 알고, 구원도 알고, 믿음도 알고, 죽어서 가는 천국도 알고, 어지간히 어떤 일에 순종도 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도 하는데... 정작 내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나아가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성으로 똘똘 뭉쳐있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래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 늘 내 옆에 있음에도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슬픈 현실이겠습니까? 요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구원하고자 하셨던 첫 번째 대상은 저 밖에 있는 니느웨와 같은 불신자가 아니라, 바로 ‘하잘알’이라고 스스로 여겼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혹시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다 안다고 자부하는 ‘하잘알’의 성(城) 안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알고, 교회를 잘 알고, 신앙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박넝쿨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 여러 방면으로 침투하십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어긋나 있는 요나를 구원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어쩌면 그런 '우리'를 구원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니느웨와 같이 저 밖에 있는 사람에게나 구원 필요하다고 여기며, 정작 자신의 삶은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는. 요나,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런
요나에게 끝까지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욘 4: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욘 4: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내가 아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은 더 크시고, 내가 정한 구원보다 하나님의 구원은 더 깊습니다. 주님은
니느웨도 아끼시지만, 요나도 너무나 아끼셔서 권면하고 끝까지 부르십니다. 우리 안의 요나와 같은 마음과 태도를 외면하지 말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나아갑시다. “주님, 오늘 저의 완고함을 구원해 주시고 당신의 마음에 저를 조율해 주십시오.” 오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