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울며 씨를 뿌리는 자" / 강정규 목사

2024-06-16 · 사도행전 15~1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는 종종 신앙이 성숙해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지표로 ‘당신이 하나님으로 인해 얼마나 뜻을 바꾸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해보라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누군가는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잘 듣는데, 그 안에서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가 내 옆에 혼자 살다가 둘이 살면 내 태도와 삶의 방식이 바뀌죠. 그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고,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다면 우리 안에 크든지 작든지 변화가 생기게 되거든요. 이런 작은 변화들이

생겼을 때, 그것이 모여서 습관이 되고, 그런 새로운 습관들이 나를 새로운 인격과 삶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3C 나눔을 강조하죠. 말씀을 통해 내가 뭔가를 배우고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일 오후에 풍삶첫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1기가 마무리되는데, 최근에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예전에 한국교회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고요. 그런데

잘못된 기도,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기도는 기도할수록 기도자를 더 탐욕스럽게 만들어요. 기도를 하루에 2~3시간씩 하는데, 그 사람은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도 하다고요. 왜냐하면 기도가 오로지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풍삶첫에서 최근에 ‘바른 기도’에 대해서 나눴어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거기서 우선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뜻을 관철하거나

뭔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었거든요. 말씀 읽기도 그래요. 성경은 살아있고 힘이 있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날 칼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가장 날카로운 것을 의미했어요. 지금으로 보자면 수술용 레이저 광선 같은 것이죠. 말씀은 그렇게 우리를 찔러 쪼개요. 그것은 우리를 수술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이 준비한 수술대입니다. 저는 그 옆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돕는 보조자 정도 되겠죠. 제가 좋아하는 풍삶기의 설명이 있어요.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말씀의 기능은 무엇인가? 우선 ‘교훈’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해줘요. 그리고 ‘책망’합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부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합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잡아줘요. 마지막으로 ‘의로 교육’합니다. 계속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길을 보여주고,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을 보여주고,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를 말해주고, 누군가에게는 계속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법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경의 유익은 먼저 하나님을 알아가고 따라가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죠. 제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선배님들에 대해서 존경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사역했던 그들 안에 얼마나 확고한 신앙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이 있었겠어요. 1차 선교여행을 하는 시기에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한 것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아니, 여전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래서 완전하게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꾸 조건을 붙였습니다.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처럼 되어야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이방인들도 회심하는 것을 수없이 지켜본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했죠. 결국 이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행 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 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행 15: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지금 초대교회는 지금껏 고수하던 어떤 입장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방인의 개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큰 이슈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디테일 하시죠. 이미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나아가실 방향을 먼저 보여주셨어요. 그러므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가 그 경험들을 나눕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보게 되었던,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에 대해서 나눕니다. 이들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보고를 들은 후, 이 회의의 대표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거든요. (행 15:26) 바나바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도 사랑스러웠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도 진실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곳에 모인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회의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며 자신들의 오랜 생각을 바꿉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모습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갑니다. 사도행전 1:8의 비전이 또 이렇게 한 걸음 나아가게 된 것이죠. 저는 이것이 초대교회의 위대함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뒤에 2차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결국 팀을 나눠서 따로 떠나게 된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니, 여전히 사람의 연약한 부분들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죠. 이 위대한 회의 뒤에 갈등이 나타났어요. 어쩌면 바울과 바나바 모두 리더적 성향이 강했기에, 두 사람이 각자 팀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회로 선용하셔서 2개의 선교팀을 구성하셔서 바나바는 마가와, 바울은 실라를 파트너로 삼아 이방 선교를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의 팀을

따라갔기에 우리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선교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바울은 굉장히 전략적으로 움직인 사람이거든요. 우선 선교할 지역을 전략적으로 정합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가면 우선순위를 두고 복음을 전합니다. 회당에서부터 시작해서 광장과 시장으로. 이런 식이죠. 그리고 한번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고 방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체크합니다. 바울이 특정한 어떤 사람들만 붙들고

목회할 상황이 아니었죠. 그러니까 자신을 대신할 사람들을 길러놓고, 그들에게 리더십을 주고, 다시 그곳에 방문해서 격려하고, 또 사람을 세우고. 이런 사역을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건물을 짓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교회 세우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 세우기입니다. 1차 선교여행을 했던 곳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지도자를 세웠어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을 신중하게 뽑았다. 그들은 금식하고 더욱 간절히 기도드리고 나서,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을 의탁했던 주님께 새로 뽑은 지도자들을 맡겨 드렸다.’ 이들은 복음으로 회심을 돕고, 회심한 사람들을 목양하여 성장시키며, 결국 사람을 세워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교회 안의 가장 큰 거짓말이 무엇입니까? ‘사람 안 변해.’ 맞아요. 너무 어려워요. 사람, 너무 어렵습니다. 저도 성도가 한 사람 한 사람 늘어날 때마다 종종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씨름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이 사람이 과연 변할까?’ 제 생각으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지배적으로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더라고요. 그리고 생각해보면 참 고집스러운 저도 계속 변해가도록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더라고요. 모든 선교여행은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합니다.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이죠. 제가 지난 설교에서 여기서 가장 가까운 선교지가 어디였다고 했습니까? 더베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위로했던 그 더베. 2차

선교여행에서 바울팀은 먼저 더베로 갑니다. 그리고 어디로 갔을까요? 루스드라로 갑니다. 거기에 1차 선교여행에서 복음을 전하여 회심한 사람이 있죠. 디모데.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에 바울이 다시 방문해보니,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입으로 ‘디모데’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동역자로 세우기로 마음먹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의 또 다른 거짓말이 하나 있죠. ‘교회는 사람보고 오는 것 아니야, 하나님 보고 오는 거야.’ 이거 진짜입니까?

거짓말입니다. 교회에 하나님보고 오고 싶어도 그러면 못 와요.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즉,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계세요. 그래서 좋은 사람은 사람들 안에서 티가 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느껴요. 그래서 신약성경에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기준을 보면 언제나 ‘평판’에 대해 언급합니다. 내가 본으로 삼고 따라가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 함께하고 싶은 사람.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 교회에서 보는 사람 중에 내가 신앙적으로 닮아가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서 아무도 안 떠오르면 내가 사람을 평소에 관찰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거나, 교만해서일 수도 있죠. 저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제가 존경하는 모습을 가진 분들이 있어요.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섬길까? 어떻게 저 사람은 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신실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어요. 삶을 잘 지켜보면

그 안에 힘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어요. 청년 디모데가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런 칭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죠. 저는 영성이 좋은데 성품은 안 좋다는 말을 안 믿어요. 왜냐하면 영성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이고, 그러면 내가 하나님 때문에 하는 일과 하나님 때문에 안 하는 일이 늘어가는 것을 의미해요. 사도행전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영성이 좋다는 것은 성령충만이죠. 성령충만은 어떤 능력을 발휘하거나, 수백 가지 방언을 하거나, 어떤 기적 같은 은사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이고, 그의 삶이 성령과 말씀으로 변화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표현되는 그 모든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안에서 열매 맺고 있는 사람이 저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갈 5: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갈 5: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갈 5: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갈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갈 5: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내가 방탕하고, 원수 맺고, 잘 다투고, 시기하고, 분내고, 파당 짓고, 질투하고, 술 취하고,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다면 성령님과 가장 멀리 있는 모습인 것이죠. 이런 사람도 변해요, 안 변해요? 회심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진짜 모시며 살아가면 변해갑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실실, 온유, 절제함이 그 안에 균형 있게 자라나요. 풍삶기 하신 분들은 강의에서 나오지만,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씩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끔 주일학교에서 그렇게 배우거든요. 그래서 ‘나는 기쁨의 열매는 있는데, 절제는 없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열매는 ‘단수’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가지면 그 안에 저런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내가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주인 삼고 따르면, 그분의 인격이 내 안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성장 목표입니다. 우리 교회가 회심을 엄청나게 강조하죠. 회심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주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주인인데, 자꾸 자기 삶에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거부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인임을 진실하게 인정하는 ‘회심’이 중요해요. 회심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양육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도 합류시킨 후, 1차 선교를 했던 브루기아, 갈라디아 지역을 다시 돌아봅니다. 그 후 바울의 계획은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개입하시죠 (행 16:6)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가서, (행 16:7) 무시아 가까이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원래 바울이 있던 갈라디아에서 ‘아시아’는 왼쪽입니다. 가끔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아시아가 지금의 아시아라고 생각해서, 원래 바울이 아시아로 왔어야 하는데 못 오고 유럽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소아시아

일곱교회가 후에 세워지는 터키입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에는 하나님이 소아시아도 못 가게 하시고, 비두니아라고 더 북쪽으로도 못 가게 하시고,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계획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자신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개입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가끔 우리 교회 J들이 저를 막 쪼아댑니다. 저는 스케쥴 같은 것 정리 안 하는 사람인데, 봄 되면

가을 스케쥴을 물어봅니다. 제가 그들 덕분에 성장해요. 저도 배웠어요. ‘공동체를 이끌어갈 때, 계획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항상 기억해야 하냐면, ‘그 계획 다 무너뜨리셔도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안테나가 항상 성령께 향해 서 있어야 해요. 사람을 만나서 말을 하면서도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어떤 생각을 주시면 그것 붙들고 이야기하고. 갑자기 어떤 생각을 주시면, 분별하여 실행하고. (행 16:9)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행 16:10)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환상을 봤어요. 그런데 ‘우리’가 확신했다고 나와요. 아마도 바울이 기도하다가 어떤 장면이 떠올랐든, 자다가 꿈에서 나타났든지, 평소와

다른 어떤 것을 바울이 경험했겠죠. 바울서신을 보면 그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깊었기에, 그 정도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라고 나오냐면, 그것을 선교팀과 나눴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같이 분별하며 뜻을 묻고, 같은 마음을 품고 나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 따라갈 ‘확신’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계획에 없었던 유럽 대륙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와 네압볼리를 거쳐서 ‘빌립보’라는

도시에 들어가게 되죠. 로마의 아주 중요한 거점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도시에 들어가서 도시를 파악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우선 갑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루디아’라는 여인입니다. 이 자매가 빌립보 최초의 회심 교인이 됩니다. 이 도시에서 바울은 귀신 들린 여종을 치유하죠. 그러나 그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 여종을 통해 돈벌이하던 사람들이 보복했기 때문입니다. (행 16:20)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행 16:21)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행 16:22)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행 16:23)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불합리한 과정을 거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은 뭐했을까요? 기도와 찬양을 합니다. 그때 갑자기 지진이 나면서 감옥 문이 열리게 됩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놀라서 죄인을 지키지 못한 죄로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이 도리어 그를 위로하며 복음을 전하죠. (행 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로마 황제의 지배 아래 살던 간수는 황제의 명령 수행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힘과 공포로 통치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깨어진 삶을 살던 간수에게 전해진 복음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는 당시에 로마의 황제에게 붙여지는 별칭이었습니다. 모든 로마 시민의 ‘주인’인 가이사.

그런 그에게 우리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다음날, 조사 결과 바울과 실라를 가둬 놓을 명분이 없던 치안관들은 부하를 보내어 바울 일행을 석방합니다. 이때 바울이 뭘 밝히죠?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인 바울을 재판도 없이 가두고, 폭력을 행하고, 슬그머니 석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자, 치안관들이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달려와 바울에게 사과하며 조용히 떠나주기를 요청합니다. 바울이 문제를 삼으면 일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로 인해서, 더 이상 그들은 불법적으로 빌립보의 성도들을 대하거나, 회심한 간수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선교팀이 이동하여 도착한 다음 도시는 데살로니가입니다. 우리가 1차 선교여행에서도 봤듯이, 바울은 복음을 잘 설명하고 진리를 잘 전하기 위해 힘씁니다. 그러나 깨어진 세상의 반응은 선동이고 폭력입니다. 빌립보에서도 불법적인

폭력을 당하였고, 데살로니가에서도 강경파 유대인들은 사나운 불량배들을 끌어모아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으려고 추격합니다. 복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설득하고 설명하고 토론하고 증명하며 진리를 증언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복음을 잃어버린 세상은 거짓된 선동과 폭력을 앞세운 힘으로 덤벼듭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지 말지는 들은 사람의 선택입니다. 사도행전의 선교 과정도 그렇습니다.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들의 성장을 위해 힘쓰지만, 거절하면 다른 동네로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을 쏟게 됩니다. 선교팀은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피하여 베뢰아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매우 좋아하는데요. (행 17:11)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인가 고민하며 성경을 더 깊이 읽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을 때, 설교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말씀이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며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깁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팀을 잡기 위해 추적과 추격을 시작했던 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이곳에서도 무리를 선동하며 소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바울은 이런 무리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옛날 모습이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원망보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나도 한때는 저들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줄 알고 악을 행했었는데….’ 형제들은 적대자들로부터 바울을 간신히 피신시킵니다. 배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간신히 바울 정도만 급히 피신한 것 같습니다. 배는 아테네행이었고, 실라와 디모데는 육로로 뒤따라오기로 합니다. 아테네는 우리에게도 유명하다시피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정신을 담고 있는 도시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진리가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그 우상이 가득한 도시에 대하여 격분합니다. 그리고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습니다.

저는 사람들 안에 ‘종교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다른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붙들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리도 종교가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최선을 다해 전합니다. 복음은 힘이 있으나, 복음 전파에는 너무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지는 곳에는 늘 두 가지 반응이 엇갈립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듣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설교를 잘했겠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그 설교를 듣고도 비웃고 조롱합니다. 원래 복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모두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도 누군가는 조롱했고, 누군가는 믿고 확신을 얻습니다. 바울이 홀로 행한 아테네 사역을 마치고, 그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우리에게 유명한 ‘고린도’입니다. 2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며 사역했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서 동역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바울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엄청 강해

보이나요? 고린도에 도착했을 당시 바울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2:3)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의 심경이 이랬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선교여행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지만, 어느 한 곳 복음 전파가 쉬운 곳이 없습니다. 적대자들은 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조롱과 무시와 폭력의 위협이 늘 바울 앞에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복음은

전파되며 회심한 사람들은 늘어나지만, 이제 막 회심한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오히려 돌봐야 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책임감은 늘어가고, 해야 할 일은 많고, 그 안에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 성도답게 산다는 것. 다 너무나 멋있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뿌리박고 진짜 그런 삶을 살아보면 우리는 수없이 지치고, 절망하기도 하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두렵기도 합니다. 저도

그래요. 목사의 자리가 제일 두렵습니다. 제일 무력감을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 내게 뭔가를 바라는 듯한 마음의 부담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젊은 시절에 사도행전을 읽으며 느꼈던 바울은 파워풀하고 능력 있는 사도였다면, 지금 다시 사도행전 설교를 준비하며 떠올려보는 바울은, 만약 제가 지금 그의 곁에 있다면 위로해주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소위 이중직 목회를 합니다. 주중에는

천막을 지으며 일을 했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으로 가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을 때, 데살로니가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가 육로로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수개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두렵고 떨리지만 부딪혀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올 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선교사역에 필요한

후원금을 함께 보내주었기에, 이제 바울은 천막 짓는 일을 멈추고 온전히 복음 전파에 힘을 쏟게 됩니다. 바울 삶의 특징은 주어진 상황에 맞게 필요하면 일도 하고, 또 사역에 몰입해야 할 때는 거기에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행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는,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유대 사람들에게 밝혀 증언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여 사역하지만, 언제나 사역은 쉽지 않았습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습니다. 바울도 그런 감정도 여러번 드러냅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편의 내용처럼 성도의 삶이란 ‘울면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울더라도 씨를 뿌리기 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왜 이 길을 택했고, 왜 이렇게 살아갈까? 스스로에게 여러번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간혹

내 삶을 통해 주님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말 자체에서 부담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삶이 멋져야 할 것 같고, 내 삶에 자랑할 것이 조금 있어야 할 것 같고, 내 삶이 누군가 보기에 기쁘고 행복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모습은 무명하고, 죽은 자 같고, 근심하는 것 같고, 가난해 보이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아 보일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보여지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짜 소금은 소금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 담겨 있어도 소금입니다. 내 삶이 어떻게 보이는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이것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의 기준에 얽매이기 쉽습니다. 그냥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아플 땐 아파하시고, 울기도 하고, 근심도 하고, 힘이 들 땐 힘들어도 하고...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그런 모습들을 잘 받아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내 힘으로 안 되잖아요. 세상에서 내 힘으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안 돼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필요한 것이고, 주님이 없는 우리의 삶이 연약함을 알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힘주시는 것이죠.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 그가 힘을 내어 성도로서, 사도로서, 사명을 받은 자로써 살아가게 하는 힘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처럼 살아가고 힘쓰는 동료들이었어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실라와 디모데.

그들을 보면서, ‘나 혼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가 복음입니다. 저에게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고자 힘쓰는 성도님들의 존재 자체가 저에게 주는 위로이고, 복음이 행한 놀라운 열매입니다. ‘그래, 나 혼자 하는 것 아니지. 다들 이렇게 애쓰고 있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입니다. (행 18:9) 그런데 어느 날 밤에, 환상 가운데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행 18:11)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렀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한마디 말로 바울은 끝까지 견딜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 년 반을 더 머물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게

가르쳤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며 권면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자 힘쓴다면 부딪힘이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숨기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겪는 고난을 덮을 만큼, 우리에게 더 많은 기쁨과 위로, 충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 그래서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함께 살아가는 영적 가족들, 교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시대에 복음으로의 회심은 유대 회당과 이방 신전과 로마 황제 숭배로부터의 배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름과 동시에 거센 차별과 고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세상으로부터 여러 비난과 고난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은 복음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제 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축복하고 싶습니다. <충만>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 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