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새로운 가족 공동체” / 강정규 목사

2024-06-21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금요기도회) "새로운 가족 공동체" _ 우리가 꿈꾸는 교회.1 (2024.06.21) _ 강정규 목사 _ 양주 옥정 사귐의교회 제가 <하나님 나라의 도전> 시리즈로 설교를 해나가는데, ‘교회’에 대한 설교가 필요한 시점이라서 잠깐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연말에 한 번씩 교회론 설교를 하지만, 연 1회로 부족해서 필요하면 금요기도회를 통해서 ‘교회’의 꿈과 비전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관한 설교를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는 가족인가? 교회가 정말 가족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질문을 갖고 오늘 설교에 다가서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오면 ‘가족’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처음 교회에 온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형제, 자매’라고 부르고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너무나 좋은 이 표현이 처음에는 다들 어색했지요. 그러나 그 호칭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사람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교회에서 사람을 사귀고 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이런 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이름을 ‘사귐의교회’라고 지었을 때, 제 주변의 친구 목회자들은 ‘참 너답게 지었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저조차도 최근에 누군가 저에게 ‘목사님은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혼자 산책하는 거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평소에 사람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은 만큼, 사람 만나는 것이 과부하가 올 때도 있거든요. 어쨌든 목사라는 자리가 계속 뭔가 말을 해야 하는 자리니까, 제 몸에서 근육이 제일 많이 생기는 것이 ‘혀’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만큼 교회에서 함께 모여 뭔가 하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도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향 자체가 사람을 만나면 흔히 기가 빨리는 스타일들은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 힘든 부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안에서 그조차 달라지는 것도 보게 됩니다. 지금 목양팀 리더를 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하거든요. ‘저는 이런 교회, 이런 역할과 정말 안 맞아요. 그런데 제가 어쩌다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이야기도 해요. 맞습니다. 교회는 원래 나랑 안 맞아요. 그래서 나랑 맞는 교회를 찾으려고 하면 평생 못 찾을 확률이 높습니다. 내가 고르고 골라서 사랑하겠다는 배우자하고도

또 맞춰가는 것이 평생인데요. 어쩌면 당연하죠. 저도 저랑 맞는 교회를 꿈꾸지 않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받아들이며 목회하고자 힘씁니다. 그중에는 제가 하기 싫은 것도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제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하기에 주인의 꿈을 이제는 제 꿈으로 받아서 해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만약 제가 하는 것들이 성도들이 저에게 시켰다고 여긴다면, 저는 벌써 보이콧 했을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저에게 시켰다면 ‘너무하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럴걸요.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는 섬김을 제가 시켰다고 하면 벌써 저에게 뭐라고 했겠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셨고 부탁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임을 알기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 살아갔어요.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깨닫게 하시며, 다시 그 존재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빛을 주시기 위해서요.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참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새로운 존재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영접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분이 행하신 그 모든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세상적 세계관과 성경적 세계관이 완전히 상반된 부분이 있죠. 세상에서는 교인이 된다는 것이 ‘자유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여기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저는 가끔 이것을 ‘물고기와 물’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물고기는 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죠. 그런데 물 밖을 바라보면서 물속에만 있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고 생각해서 어항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거기에 물고기가 꿈꾸던 자유가 있나요? 더 참담한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어항 밖을 깨어진 세상으로, 물을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삶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우리가 지으신 분의 뜻을 버리고 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더 자유한 것이 아니라, 더 버거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원래 거기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물속으로 들어와서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살기 위해 버겁고, 뭔가를 가득 채워도 공허한 그 삶이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삶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회복된 존재로 살 때,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BEING’과 ‘DOING’으로 표현하죠. BEING은 ‘존재’이고, DOING은 ‘행동’입니다. DOING을 통해서 BEING을 이루려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가 가진 특징이라면, 기독교의 진리는 BEING을 주셨기에, 그 존재의 변화를 받아들이면 그에 걸맞은 DOING을 하며 사는 것이죠. 그래서 ‘풍삶초’를 제가 도구로 채택하면서 반가웠던 것은 ‘풍삶초’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소개’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풍삶초’라는

과정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죠. 풍삶초가 손가락이라면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복음을 볼 수 있어야 해요. 풍삶초 했다고 사람이 변하냐? ‘세 번 시간을 냈더니 사람이 변했다’라고 하면 기적이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잘 정리가 되지 않던 사람이 그 시간을 통해 정리가

되면서 그것이 진리로 수납되면, 그 사람은 신앙의 새로운 차원이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점은 바로 그 과정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과 도구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선명하게 이해하는 만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셨던 일과, 지금도 하고 계신 일과, 앞으로 하실 일을 이미 다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을

잘 모르면 선물을 받아놓고도 선물을 누리지 못하니까, 그 과정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아는 만큼 누릴 수 있도록. ‘너희는 이제 이런 것을 누리며 살 수 있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정말 풍성하게 만들어 준단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이후로 주어진 축복을 알아야 누릴 수 있기에, 풍삶기 첫 부분에서는 회심한 사람의 3가지 특권에 대해서 아침마다 고백하도록 알려줍니다. 이것은 풍삶기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는

것이죠. 첫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다. (골 1: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골 1:14)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깨어진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던 나이지만, 그런 나를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셔서 이제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나라 안에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이다. (엡 2: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충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가치를 모르고 세상에 속해서 망가진 삶을 살 때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와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고백할 때, 이것을 1:1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회심하고 거듭나면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입양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먼저 믿은 사람들이 나의 형제와 자매로 있겠죠. 나보다 먼저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과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영적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통해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이야기가 이 세 번째 부분이죠. 이것은 선택이라기 보다는 존재의 특성입니다. 성경은 회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존재성이 ‘하나님의 가족’이라고도 말해요.

다른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몸이라면 그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저는 혼자서 그냥 신앙생활 할게요.’ 충분히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사람에게 지쳐있으면 우선 예배로 회복해야죠. 그러나 계속 그 상태에 있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너무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마치 나에게 가족이 있는데, 나는 그 집에서

방문 닫고 혼자 살겠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인지 몰라요. 그래서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정말 이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도록 초청하고 싶습니다. 성도는 평생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성숙해갑니다. 그것을 위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부르십니다.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사실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혼자 있으면 사실 내 약함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약함이 드러나야 훈련도 되고 치유도 되는 것인데,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함이 드러나면 피해를 입는 약육강식의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았기에, 약함이 드러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한번에 그 약함을 끌어 안아 줄 정도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숙해가야 교회도 성숙한 것이고, 성숙한 공동체는 이뤄가는 것입니다. 가족도 그런 것이죠. 부부도 함께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에게는 보고 따라갈 선생님이 있죠. 예수님께서 신약 교회의 모델이 되는 진실한 공동체를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그룹 공동체에는 3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1) 열둘의 비밀 우선 첫 번째는 숫자 열둘의 비밀입니다. 왜 열둘일까요? 물론 구약의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새로운 신약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신학적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실제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로 관계할 수

있는 단위가 대략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맥스가 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니까 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정말로 인격적으로 삶에 관심을 갖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그 정도입니다. 그 이상이 되면 사실 친밀한 관계를 맺기는 어렵습니다. 내 가족을 빼고 나면 10명 내외가 내가 깊은 사귐을 갖고 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사람을 내가 하나 마음에 품으면 기존 사람 하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관계에 욕심을 내지만,

사실 그만큼 누군가를 놓치기 쉽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목사도 사람입니다. 저도 제가 관심 있게 돌볼 수 있는 사람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양을 제가 다 하겠다고 하면 되지도 않고, 저도 지치고, 누군가는 계속 서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개척교회가 아니라면, 담임목사는 목양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서포트하고, 각 목양자들이 10명 내외의 사람을 품고 목양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교회가 영적 가족으로

존재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저는 열두제자를 뽑으신 것에는 이런 모범이 있다고 봐요. 3년 동안 예수님이 그들 데리고 원형 가정교회 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이번에 원형 가정교회를 하는데, 3개월 단위로 순환하는 것은 제가 3개월 동안 다른 사람 목양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못 할 것입니다. 저도 원형 가정교회 멤버들에게 집중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씩은 제가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희도

많이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도 이번에 팸이 편성되면, 그 팸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하고 있는 이유도 이 ‘열둘의 비밀’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팸이라고 해놓고 정작 내 속마음은 다른 사람과 털어놓으며 팸 외의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더욱 집중하면, 그것이 그 팸의 힘을 약화시키는 가장 안 좋은 행동이 될 것입니다. 또한 리더가 내 팸원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자꾸 다른 팸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부모가 내 아이 안 돌보고

다른 집 가서 신경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팸에도 도움이 안 되고, 리더가 맡은 팸에는 엄청난 소외감을 주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가족보다도 영적 가족들에게 의도적으로 더 마음이 있음을 밝히셨어요. 극단적인 방법으로요.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리더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사랑해야 하고, 팸에 속한 분들도 리더들을 인정하고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2) 가족 구성의 비밀 예수님이 묶으신 영적가족의 구성에도 특징이 있어요. 거기에는 원래 육신의 형제 관계도 있었어요.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입니다. 그러나 또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아니 심지어 누가 봐도 맞춰가기 힘든 조합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눅 6: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세리는 친로마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열심당원은 독립단원입니다.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을 예수님은 함께 제자로 부르셨어요. 예수님의 제자 선택이 참 특이한 점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팸을 구성하는데, 나랑 가장 안 맞는 사람을 묶어 주신 것입니다. 태생부터 안 맞아요. 그러니까 제자들끼리 가족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았겠죠. 그런데 그것이 가족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족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부부는 여러분이 서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겠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선택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그

가족에서 태어났든 아니면 입양으로 들어왔던지 거기에 형제가 있을 수 있잖아요. 혹은 먼저 태어난 첫째는 둘째가 태어나서 동생이 되겠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보세요. 거기에 뽑힌 열두 명이 각자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모아서 공동체를 이루시며, 형제로 묶으십니다. 그렇게 지내는 것 자체가 훈련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서열 싸움이나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열두 명 중에서 제일 높은가? 누가 가장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가? 누가 완장을 찰 것인가? 차라리 집에 있는 형제는 태어난 순서라도 있는데, 이들은 지금 비슷한 시기에 제자가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다툽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도 오래된 분하고 초신자하고 다투지 않아요. 비슷한 사람들끼리 다툽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제자들이 성숙해졌다는 것은 후에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그들이 베드로의 리더십을 인정하며 또한

서로 연합하여 사역해나갔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성령의 주인 됨 안에서 가능합니다. 저는 성령은 모든 관계를 해결할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아무리 팸을 잘 짠다고 해서 그 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진짜 영적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3) 상호 헌신의 비밀 여러분은 함께 세워져 간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모두가 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팀 사역’을 선호합니다. 왜냐면 저는 팀 사역의 파워풀함을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팀 사역의 전제는 모두의 ‘헌신’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가 사역자 수련회도 그렇고 예배팀 워크샵도 그렇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1박 2일 동안 어떤 역할을 할지를 제비 뽑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약속 가운데 가능한 것이냐면, 거기서 어떤 역할이 나오든지 그것에 순종하여 최선으로 참여하겠다는 약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서 행하면,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함께 책임을 나눠지며 팀을 이루는 것입니다. 영적 가족이 된다는 것은 ‘원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아무런 결단 없이 되지 않습니다. 상호 간의 헌신으로 세워져 갑니다. 제가 이번에 팸을 구성하면서 ‘결단, 서약, 약속’ 이런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가족이 어떻게 탄생합니까? 결혼이라는 약속을 전제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가족이라고 말하는데 교회는 가족이 아닌 것 같아.’ 아마도 서로 상호간의 헌신을 약속한 모임을

만들지 않으면, 늘 교회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가족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도 기억해보세요. 그들이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으로만 가족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그 공동체를 위해 각자의 ‘삶을 헌신’하였고, 그렇게 서로가 함께하는 공동체가 시작된 것입니다.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해요. 예수님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주 강력한 공동체의 훈련을 위해 풀타임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 제자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기존에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들도 주님에 대해,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헌신했고, 그들이 헌신했기에 주님이 양육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이 되기는 원하고, 누군가 나를 가족으로 대해주기를 원하지만, 나는 그 관계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하는 대부분의 사역들은

‘상호 간의 노력’이 수반되는 것들입니다. 우리교회의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풍삶초’를 결단해야 합니다. 풍삶초라는 과정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결단하는 것이죠. 등록을 원하는 사람이 그런 결단을 하면, 사실 우리 교회에서도 그 사람을 위해 결단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어 섬기는 것이죠. 이 상호 간의 헌신을 정착시키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을 썼습니다. 제가 하는 목회의 모든 방향은 사실 교회의 규모를 크게 키우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누군가 제게 큰 목회를 하세요’라고 말하면, 저는 ‘제 목표는 건강한 목회입니다’라고 답을 드립니다. 이번에도 페이스북에 저희 교회 소식을 올렸더니 한 분이 ‘앞으로 한국교회를 견인할 수 있는 젊은 교회네요’라고 축복을 해주셨어요. 제가 거기에 답글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동네의 소소한 교회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의 크기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보내주는 영혼을 잘 맡아서 복음으로 먹이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죠. 그러나

교회를 키우기 위한 무언가를 하는 것에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교인 한 명을 늘리는 것이 우리교회의 목표라면, 등록 과정을 단순화하면 됩니다. 그럼,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교회에 쉽게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해봤잖아요. 단순화 할수록 교회가 편한 구조가 될수록 규모는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조에서는 가족이 아니라, 그저 관리하는 조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조직이 되면, 그 교회에서는 결코 가족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말만 가족이라고 할 뿐이죠.

문화센터처럼, 오는 분에게 교회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기 바쁜 그런 모습이 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참된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주면 나를 위해 교회가 서비스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큰 교회일수록 그렇게 사람을 모으고 서비스를 제공해주곤 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러하기에 거기에는 한 명 한 명이 정말 회심했는가, 복음을 아는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회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공적 예배인 주일예배나 금요기도회는 가족이건 아니건 모든 예배자들을 위해 문이 열려 있는 시간이고 담이 없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꼭 우리교회 성도가 아니더라도 함께 온전하게 예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헌신하는 법도 훈련해야 합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상호 간의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족으로 등록하는 것, 이곳에서 양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 소그룹에 들어가 가족 공동체를 누리는 것, 교회의 어떤

사역을 감당하는 것. 이 모든 일이 상호 간의 헌신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이렇게 운영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도, 누군가 이 교회의 그 뜻과 비전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 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내가 결단하는 것이고,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저에게 반면교사가 된 교회의 어떤 모습이 있었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돈이 제법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에서

밥은 먹고 싶은데, 밥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돈으로 샀습니다. 아주머니가 주중에 교회 청소도 혼자 다 하고, 목회자들 식사도 차려주고, 주말에 전체 식사 준비까지 혼자서 다 감당합니다. 다만 설거지까지는 혼자 어려우니 교인들이 나눠서 하다가, 결국 그것도 귀찮아서 설거지 아주머니도 주일만 알바로 두 명을 고용했습니다. 결국 성도들은 그 교회 안에서 소위 귀찮은 일은 아무것도 안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분들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으로 고용하고 나니, 모든 성도가 고용주와 같이 굴었고, 곧 그런 풍토는 사례비를 받는 전도사들에 대한 태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온갖 서비스를 받는 것에 익숙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뒤 교회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고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고, 그렇게 전도사들도 몇 해고됐습니다. 몇 년간 섬김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 성도님들은 섬김의 자리를 감당하는 것으로는 쉽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모든

일은 그나마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목회자도 그저 고용된 사람이었을 뿐이었죠. 이것이 교회인가, 아니면 직장인가, 사람에게 서비스하는 매장인가. 제가 고민하며 봤던 모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발적 헌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은 공동체적으로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안 하면서 요구만 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사로 헌신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교회는 교육부서 활동을 한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예배팀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없다면 예배팀을 세울 단계가 아니며, 목양자, 식사봉사자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 공동체 안의 사람들로부터 헌신이 기반이 되어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저희교회는 그렇게 사역이 하나하나 세워져 왔습니다. 누군가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먼저 사랑으로 헌신하고 있기에 이 공동체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헌신으로 예배팀이 준비되어 예배를 섬기고, 교육부가 운영되어

다음세대를 섬기고, 소그룹 공동체 사역이 이뤄집니다. 저는 내가 지금 어떤 부분에서 섬기지 못하더라도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해야하는 헌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팀이 아니더라도 모든 예배자가 예배를 위해 함께 최선을 다하고, 다음세대 사역에 내 아이들을 그저 맡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 함께 협력할 부분을 힘써야 합니다. 제가 ‘예배에 늦지 말자, 아이들도 늦지 않게 예배로 인도하여 교육부 예배를 세우자, 팸 모임에 참석하자’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이

함께 공동체를 세워가는 상호 간의 헌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눅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만약 내가 하는 것보다, 누군가 나를 위해 먼저 헌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감사해야할 부분입니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남에데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먼저 그렇게 섬기라고 말씀하셨고, 이렇게 서로를 위해 사랑과 헌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누리는

교회를 이루고 싶습니다. 특별히 오늘 나눈 것처럼 우리 교회 안에 좋은 소그룹 공동체가 세워져서, 나에게 정말 함께하는 가족이 있음을 고백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이 먼저 보여주신 것처럼 그 소그룹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열둘의 비밀, 가족 구성의 비밀, 상호 헌신의 비밀.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는 공동체의 원리들입니다. 교회가 정말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100명이 모두 친밀한 가족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가풍을 이해하며, 함께 서로를 격려하는 대가족은 될 수 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지만, 정말 많은 친지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생각나면 함께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그런 대가족이 있죠. 어쩌면 우리 전체교회는 그런 대가족의 모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꿈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안에서, 내가 원하고, 나도 그 모임에 헌신하기로 결정한다면, 더 친밀한

교제를 맛보는 참된 하나님의 가족을 경험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매일 삶을 나누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가족의 관계처럼,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자랑할 것이 생겨도 가장 먼저 떠오르고, 외롭지 않게 서로를 채워줄 수 있는 그런 공동체. 그런 진실한 공동체가 생겨나고 서로 연결되어 함께 자라가는 그런 교회. 그것이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성경적 교회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우리가 함께 소망하며, 찬양하며, 기도로 나아갑시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엡 2: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엡 2:21)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엡 2:22)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