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당신의 기독교는 너무 작다

2026-01-25 · 창세기 1장 26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주일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나누고 있습니다. 가급적 이 설교들을 차례로 들으면,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아갈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난 20년 동안 매주 꾸준하게 설교를 해왔고, 담임목회도 9년 동안 해오면서 저에게도 이제 이런 이야기들을 충분히 소화해서 전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 것 같습니다. 언제나 신앙의 성장은 ‘반복, 심화, 성찰’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무언가를 내가 새롭게 들었다면 신선할 수 있지만, 아직 내 것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들으며 마음에 잘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심화되고, 내면화되며, 내 삶의 기준점들에 영향을 줍니다. 기준이 바뀌기 시작해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 받아들인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잘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부나 연인관계에서 이런 이야기를 잘 나누면 좋겠지만, 오히려 부부나 연인관계가 다른 일로 계속 감정이 개입될 수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외의 관계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신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점검해 주고, 붙들어 줄 수 있는 관계들을 잘 맺으셔야 합니다. 신앙은 그런 관계 안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셔야 잘 성장합니다. 제가 신앙의 기초를 다루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이야기가 ‘회심’입니다. 신앙의 abc, 신앙의 123은 회심을 이해하는 것부터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상태로는 어떤 신앙의 껍데기를 입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축구하려고 모였는데 공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탁구를 치려고 하고 볼링을 치려고 하는데 공이 없어요. 아무리 다른 장비를 다 갖추고, 선수 옷을 입고 나타나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후에 ‘연결’이 필요하다는 주제와 ‘현재적 구원’의 문제까지 다뤘습니다. 한번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버무려서 오늘의 설교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반복, 심화, 성찰의 느낌으로요. 우선 설교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좋은 설교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을 최대한 가감 없이 나누는 것이고, 나쁜 설교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이나, 혹은 성경의 이야기를 양념으로만 사용한 채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입니다.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설교를 더 좋아할까요? 진짜 진리를 찾아서 자기의 삶을 바르게 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듣기 싫은 이야기가 섞여 있어도 성경의 진리를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내가 필요한 것을 얻고 싶은 마음이 앞서 있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말해주는 설교자를 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만약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구원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인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 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목사가 이렇게 얘기해주면 더 신뢰가 생기죠. 만약 한 주간의 내 모습이 너무 엉망이었어요. 형편이 없다고 느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야기,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라는 이야기, 이것이 주는 힘과 위로와 안심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로가 신앙생활이고, 이 위로가 클수록 신앙이 성숙한 것처럼 여긴다면, 저는 신앙이 너무 축소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얻는 위로가 있지만, 신앙이 나의 위로를 채우기 위한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안심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마음은 내가 실제적으로 구원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 누리고 있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가족에게 “너는 내 가족이야”라는 이야기를 확인받기를 힘쓰세요?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남편입니다.”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아빠입니다.” 이거 이상하잖아요. 실제가 있는 사람은 이런 확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그 집에 살고 있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사랑하는 사이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죠.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실제입니다.

그런데 실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신앙이 죽음 이후를 바꾸는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 내 신앙의 초점이 맞춰져 있을 때입니다. 자꾸 확인만 하고 싶은 것이죠. 회심은 중심축이 전환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회심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우리에게 점차 하나님과의 인격적 경험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구원하고 바꾸어가고 회복시키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회심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연결된 삶도 모르는데,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 나의 미래 구원을 약속해 주는 것으로 신앙을 이해하게 된다면, 늘 거기에 집중된 신앙생활을 하고, 또 그것을 열심히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이 너무 작고 좁은 것이 됩니다. 구원은 현실의 회복이 아니라 죽어서의 이야기처럼 멀리 있는 것이고, 신앙은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를 안심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이죠. 특별히

한 주간 내 삶이 스스로 보기에도 미웠던 사람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이런 찬양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 있는 하나님이 날 여전히 기억하시나, 나를 버리지는 않으셨나, 전전긍긍하면서 그 관계를 확인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하나님과 진짜로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약속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예배에서 작은 위로를 얻는 것, 그것이 신앙 자체라고 여기면, 신앙은 그저 지친 나를 한 번씩 달래주는 ‘위로 서비스’가 될 수는 있겠지만,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정체성은 알지 못한 채 계속 그 정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위로가 예배를 통해 누리는 은혜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 주간 그렇게 죄 많은 삶을 살았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내 모습을 사랑하신다니...” 여기에서 큰

감동과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나의 위안이 은혜의 풍성함을 대체합니다. 그런데 이게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주간 더 열심히 죄를 짓고 주일에 오면, 그 주에 더 큰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면 다시 용기를 얻어서 힘차게 세상으로 나아가 나를 용서하여 주실 주님을 믿고 힘차게 죄짓는 것이죠. 주님께 회개할 것을 많아질수록 은혜가 올라갑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오병이어의 떡을 먹은 사람들이 자기의 허기진 필요를 채우고 나니,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태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셔서 그들에게 ‘진짜 신앙’, ‘참된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배고픔에 대하여 단순히 떡을 먹이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그들에게 영적인 떡, 하나님이 진짜 주고 싶은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그들은 그것은

관심이 없다면서 떠나갑니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사람들은 자기 필요로 예수를 찾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시작해요. 예수님은 그런 무리들에게 떡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돼서도 여전히 떡을 바라보고 있으면 혼을 내셨죠. 우리 삶에 필요한 위로가 있죠. 그러나 그것은 떡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위로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도 어디서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이 진짜 우리에게 주고 싶은 것은 나를 달래주는 그런 작은 위로가 아닙니다. 그런 작은 위로가 기독교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내 필요대로 주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떠납니다. 진짜 누려야 할 것,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고민해보는 ‘작은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가 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님을

찾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가장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투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필요에 맞는 모습으로 고정시켜 둡니다. 대표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면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왜 이렇게 안 해주셔.”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면 우리는 만족할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짜 사랑만 하시면 우리는 또 불평할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도 사랑해서 그가 뭘 하든 용서하시고 이런 하나님을 원하세요? 나는 뭘 해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길 원하지만, 다른 사람, 특별히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의 그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다뤄주시길 원한다고요. 우리는 이중적입니다. 우리는 나에게는 ‘사랑의 하나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는 ‘정의의 하나님’이 되기를 우리는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상은 내가 중요해요. ‘나’를 위한

하나님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내 안에 가둔다고요. 아주 작은 하나님으로요. 우리 안에는 누구나 이런 이중적 기대가 자연스럽게 자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위해서 ‘회개하라’, ‘중심축을 바꾸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의 철저한 자기중심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회개해야 비로소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신앙의 세계를 진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기독교를 작게 만드는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곁에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신앙을 용인하고 더 나아가 옳다고 선동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필요를 너무 잘 아는 목사가 있다면, 감성적인 예배 분위기와 달콤한 위로의 말, 구원에 대한 확신 가득한 언어로 예배를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위로받았다”, “설교가 너무 좋다”, “목사님이 사랑이 많으시다”, “교회가 따뜻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 시대가 원하는 종교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 그런 목회는 실제로

제법 잘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만족을 얻는 것이 기독교인가? 어쩌면 그래서 숫자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은 엄청난 위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했습니다. (딤후 4:3)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딤후 4:4)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자기의 유언과 같은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바로 이 앞절입니다. (딤후 4:2)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혹시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저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제가 뭔가를 지나치게 경계하고 있다고 느껴지거든 제가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며 날을 세우고 있는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저에게 목회의 책무가 있는 동안 끝까지 여러분을

권면하며 나아가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저는 신앙과 종교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종교인이 되는 것은 쉽습니다. 종교 생활을 하면 종교인입니다. 종교인이 되는 것에서부터 신앙은 시작합니다. 교회를 다녀봐야죠. 성경도 읽어봐야죠. 그래야 뭔가를 배우고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참된 신앙은 종교적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고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모두 신앙인이라고 말해준다면 그것은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입니다. 마치 어딘가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안내하는 간호사가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했다고 그것만 듣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 같은 목사가 그 안내하는 간호사 역할이죠. 제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참된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고 회복되게 도와주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안 만나고 저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돌아가면 어떻게 되나요? 병원도 가고, 늘 좋은 말도 듣는데,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신앙을 교회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 말씀을 듣는 것 정도로 생각해 왔다면,

아직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핵심을 모르고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상태로 수십 년이 갈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종교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내가 죽고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새롭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누군가의 신앙은 깨어진 세상이 주는 허무함, 공허함을 달래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깨어진 삶에 대한 위로에 불과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은 허무를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허무를 충만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 정체성과 내 신분이

바뀌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는 제의 시간이 있죠. 종교인에게 예배는 종교적 의무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배’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원한 것인데, 의무로 예배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 지긋지긋한 의무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예배가 의무와 같이 느껴지는 삶은 너무 힘든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진짜로 알고 누리는 사람에게는 예배가 의무가 아닙니다. 예배가 ‘특권’입니다.

참된 예배는 나에게 시작된 그 놀라운 일을 고백하고, 같은 고백을 가진 사람들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탄하고 그분 안에서 변화되어 가는 서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위로가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입니다. 세상의 여러 종교, 여러 좋은 말과 글이 있습니다. 깨어지고 허무한 이 세상 속에 지친 우리를 달래주고, 위로하고, 채워주는 경험을 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복음은 고작 그런 위안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일에 여러분의 마음을 편하고 산뜻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작은 위로를 주고 죄를 닦아주는 세차장이나 사우나가 교회가 아닙니다. 저도 단지 그 정도 일을 하려고 제 삶을 이 일에 드린 것은 아닙니다. 종교서비스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다른 서비스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더 보람 있고 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며,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삯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이죠. 제가 화요일에 목사 안수 대상자 교육에 강의하러 가요. 직업으로 목사 할 거면 얼른 떠나라고 얘기해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목사를 하기에는 너무 헛된 인생 낭비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기독교는 무엇일까요? 나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진리에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강력하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신앙을 작게 보는 태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우리와 하고 싶은 삶이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보다도 앞선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자로 인식하는 것도, 우리의 필요가 투영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원래 구원자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하고자 하셨던 일이 ‘구원’이었을까요? 아니요. 구원은 죄로 인해 망가졌기 때문에 필요한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온 땅에 충만케 하는 사명을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만드실 때, 사람은 특별하게 만드시죠.

그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특이점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부르심이 달랐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저는 창세기를 해석하는 모든 해석의 가능성은 존중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창세기의 신앙적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만 주어진 매우 큰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고정관념이 작동하죠.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에 따라서 ‘형상’과 ‘모양’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1) 형상 형상은 ‘깎아 만든 것’, ‘그림자’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자신의 통치 지역에 ‘동상’을 세웁니다. 왕이 직접 갈 수 없는 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 “여기는 내가 다스리는 곳이다”라는 권위를 나타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이라는 우리 차원의 세계를 만드시며, 이 세계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존재로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인 것이죠.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서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하는 우리의 정체성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 다른 피조물을 만들다가 “이것도 만들어볼까?” 이렇게 만든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지 아세요? 오히려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은 우리가 정말 스스로를 낮게 보게 만들거든요. 내 삶의 존재 가치를

모를 정도로 세상은 깨어짐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진단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은 “나는 뭐가 없네. 나는 뭐가 부족하네. 나는 불량품인가? 나는 별로 필요하지 않아.” 이런 마음에 자꾸 빠지게 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어설프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위로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가치 있습니다. 세상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평가를 바라보며 가치 없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우리 중에 가치 없이 창조된 사람은 없습니다. 부르심을 잃어버릴 때, 자꾸 흔들리고, 기준을 세상에 빼앗겨 버리는 것뿐입니다. 그 기준에 얽매여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2) 모양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입니까? 이 말의 의미는 ‘유사성’, ‘닮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닮은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이 기준을 갖고 이 말씀을 보세요.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가요, 아니면 원래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으로 다시 부르시는 말씀인가요. 부르심의 회복이죠. 원래 우리가 불량품이면 우리가 거룩하고 온전하라는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원래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거룩하고 온전하게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인해 망가지고 깨어졌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새 창조’되었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나면 거룩하고 온전하며 주님의 형상으로, 주님의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불순물 묻은 내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어, 그래도 괜찮아, 다 그런 거지.” 이게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모양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인 것처럼, 우리도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로서 영적인 소통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이 가능합니다. 사무엘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가능합니다. 제가 알려드렸잖아요. 해보셨어요?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 내 얘기 다 하고 끝나면 휙 가버려요. 이제부터 기도 때 ‘머무는

연습’을 해보세요. 이게 멍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 연인이 서로의 얼굴을 그냥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내 앞에 있는 대상을 묵상하고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이 머무는 기도입니다. 앞에 사람이 있는데 멍때리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죠.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며, 그분을 상상하며, 그분을 갈망하며 그 앞에 머무십시오. 그러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일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선명한 주님의 가르침, 주님의 뜻이 담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좋아하는 이유는 누구나 이 성경을 통해서, 이 성경 속에 게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고 나아가면, 성경의 사람들이 경험한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고,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꾸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나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내 안의 자기중심성,

또 우리 주변의 소음과 같은 그런 혼잡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벗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기독교가 아니라, 너무나 크신 하나님을 풍성히 누리는 그런 기독교. 나의 작은 삶을 위로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삶에 내가 거듭나서 참여하는 그런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그것이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지만, 죄로 망가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고, 누군가가 고백하는 실제이며,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진정한 신앙의 이야기입니다. 이 하나님을 진짜로 경험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소리에 굴복하고, 그 평가에 얽매여 살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적어도 예배에 와서는 혹시 그렇게 무너져 있던

나의 모습들이 다시 회복되고, 말씀이 나를 끌고 가도록 다시 나를 제물로 드려야죠. 세상의 평가에 휩쓸려서 살아가는 동안, 내팽개쳐버린 하나님의 마음과 기준, 나를 향한 부르심을 깨닫는다면,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죠. 저의 아픔은 종종 누군가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런 것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좁은 이해와 결론으로 답을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그냥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여러분의 기독교는 혹시 너무 작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신앙은 너무 작지는 않습니까? 제가 아는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작은 위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뒤바뀌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생명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크신 하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크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이 설교를 마무리하며 크신 주님 앞에 머무는 기도를 실천해 봅시다. 우리 주님과 영적인 눈을 맞추십시오. 그분을 갈망하십시오.

그분을 상상하십시오. 오늘 말씀에서 마음에 남은 부분을 붙들고 ‘주님, 오늘 제 삶에 무엇을 원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조용히 물으면서 잠시 머물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