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옷니엘 - 에훗 - 삼갈 - 드보라" / 강정규 목사 (2021.11.14) - 2부

2021-11-14 · 사사기 3-5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사사기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사사기를 배우면서 적어도 우리가 사사의 이름 정도는 외우면 좋지 않을까요? 사사기 안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하는데, 오늘은 한번 그 이름들을 조금은 친숙하게 익히기 위해 <구약의 파노라마>의 사사 이름 외우기 방법을 동원해서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옷니엘 – 에훗 – 삼갈 – 드보라 – 기드온 – 돌라 – 야일 - 입다 – 입산 – 엘론 – 압돈 – 삼손 지난 시간에는 사사기를 소개하는 시간이었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사사 이야기를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어제까지 묵상하셨다면 사사기 3장 중반부터 6장 중반까지 보셨을 것입니다. 오늘로써 6장까지 묵상을 마치게 되는데요.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그리고 기드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입니다. 기드온은 다음 주에도 계속 묵상을 하기 때문에 오늘은 드보라까지의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님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에게 가장 많이 질문하는 공통된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이 있는지, 내가 그 길을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것인지,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를 알고 계시는지, 그렇다면 내가 결국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정해놓은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 이러한 질문입니다. 특별히 이런 질문은 청년들이 배우자를 찾는 과정에서 저에게 많이 질문하기도 합니다.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만약 A와 B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지, 만약 그 뜻과 다른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하나님은

이미 내가 누구와 어떤 결론을 도출하게 될지 정해놓으셨는지... 이런 것처럼 말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궁금한 질문입니다. 제가 사사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사사기를 유심히 읽어가다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6번의 악순환이 있다고 했습니다. (악행 – 진노 – 부르짖음 – 구원 – 평화) (삿 3:1) 가나안 전쟁을 전혀 겪어 본 일이 없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려고, 주님께서 그 땅에 남겨 두신 민족들이 있다. 3:1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범죄가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절을 보면 이런 고민은 더욱 깊어집니다. (삿 3:4)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시험하셔서, 그들이 과연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조상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이런 민족들을 남겨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사기에서 마주하는

악순환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이 잘못하여 자초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통과의 과정이었는지, 우리는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성도가 ‘신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신학이란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며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죠. (삿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다음세대와 다른세대. 한 글자의 차이지만 이것은 엄청나게 다른 표현입니다. 다음세대는 계승하고 전수하고 따라가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세대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다른 길로 가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초대교회가 믿었던 그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다음 세대’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계승하고 전수하며 따라가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언제든 ‘다른 세대’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다른 세대’는 여러 번 등장했으며, 그러하였기에 종교개혁이나 대부흥 운동 등을 통한 각성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다른 세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기록한 후,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셨다는 이야기로 사사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항상 ‘시험’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이 시험은 사탄이 주는 시험과는 단어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것은 유혹하고 참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유혹하며 여러분을 시험합니다. 가나안에 살아갈 때는 “가나안의 법을 따르라. 하나님 믿어봤자 해결되는 것 없다. 누가 하나님 믿지 말라고 했냐? 그런데 하나님만 믿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있더냐?” 사탄은 에덴에서부터 첫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시험했습니다. 교묘한 말로

우리를 속이고 설득합니다. 사람은 이 시험 앞에도 늘 서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인간 전문가입니다. 그가 창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해왔고, 그의 전문성은 더 강화되었기에, 더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탄에게 틈을 보이고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사탄은 태도를 돌변합니다. 그다음 공격은 어떻게 됩니까? 정죄합니다. 유혹하던 그가 이제는 정죄합니다. “너 이런 죄를 지었잖아. 그런데 뻔뻔하게

인제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하나님이 네 예배를 받으실 것 같아? 네가 존귀한 자녀라고? 네 삶을 봐봐. 누가 너를 좋아하겠어. 넌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이것이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하는 전형적인 공격입니다. 혹시 이러한 것을 여러분도 느끼고 있다면, 이제부터 잘 들으십시오.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여러분이 죄인일지라도 여러분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안타까워하십니다. 여러분이 죄의 그늘 아래서 정죄당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행복을 잃고 방황하며 아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런 여러분을 위해서 언제나 길을 내시고 방법을 만드시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사탄의 첫 번째 거짓말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두 번째 거짓말 정죄함에 굴복해 있는 것입니다.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무엇이 죄인지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의인으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병을 진단해주는 일은 의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리고 나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줘야 하죠. 성경은 죄를 그렇게 다룹니다.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앞에 가지고 나아가 회개하며 극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의 시험과 달리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의 마음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이 표현 자체가 제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실마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아시지 않나요? 네.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선택해 놓으셨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설계해놓은 그 프로그램된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크신 분이기에 우리의 미래까지도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존재의 차이를 설명할 예시가 있습니다. 과학으로 우주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의 시간 또한 한계가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시다시피 소리는 굉장히 느립니다. 그래서

멀리서 번개가 치고 뒤늦게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럼 보는 것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보는 것을 사실이라 믿죠. 우리는 빛의 속도만큼 볼 수 있죠. 그러므로 태양을 우리가 보고 있지만,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면 사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8분 전 태양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태양은 비교적 우리와 가까이 있는 것이고, 더 멀리 있는 다른 은하는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것들도 실은 오래 전의 모습을 지금에서야 보고 있기에,

그것이 지금 진짜 존재한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실은 이미 사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안드로메다에 있는 생명체가 혹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250만년 전 지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그것이 현재이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존재를 뛰어넘고, 지구가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그분을 우리의 한계 안에서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르고, 우리의 존재 방식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다릅니다.

개미가 나아가는 길 멀리 늪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보지만 개미는 보지 못하죠. 존재적 차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공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적어도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해줍니다. 사사기 3:1에서 사용한 ‘시험하다’라는 단어 ‘나싸’는 ‘테스트하다’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가 성경에 어디에서 사용되었냐면, 창세기 22:1에 나옵니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면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필요가 있을까?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도록 답을 정해놓으시고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시험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보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우리와 ‘참된 사랑’을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나와 교감할 로봇을 만들었는데, 이 로봇에게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내 말에 순종할 능력만 부여했다면, 내가 그 로봇이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을 진심이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만 선택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로봇과 정서적 교감을 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았어요.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고 기다리십니다. 원하시지만 함부로 하지 않으셔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기로 앞에서 여러 번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도 그런 것이죠. 그러므로 이삭을 주신 후, 하나님은 기다리셨다가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을 완전하게 믿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작동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브라함의 상태였다면 하나님이 시험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철저하게 아브라함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택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곳에는 이삭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제물이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션은 이삭을 제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는 순종의 제사를 받으셨고, 진짜 제물이 될 동물은 주님이 예비해두신 것입니다. 그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르죠.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서 좌지우지되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A를 선택해도 그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고, B를 선택해도 하나님은 그 선택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시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뜻이었고, 그것을 기대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그 뜻과 다른 길로 갔을 때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길을 주십니다. 창세기 3:15에서 그리스도가

예표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있죠. 그러나 그것을 따라오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의 삶에 A와 B의 선택의 길이 있을 수 있고, 그중에 하나님이 보다 원하시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로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선택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새로운 길을 내시고 인도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는 회개하고 그곳에서부터 주님의 일하심을 열심히 따라가면 됩니다. 내 실수와 실패도 주님 안에서는 새로운 길을 향한 방법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설교의 절반 이상을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에 사용한 것은, 앞으로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따라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은 그분 앞에서 그분의 궁극적 섭리대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기록 중 상당수는 그러한 관점으로 적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러나 그 삶을 직접 부딪쳐 살아가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것은 우리의 자율적 선택과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우리의 선택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궁극적 인도하심 안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그 사건을

통해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죄악으로 일어나는 여러 사건 사고들이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일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동물들의 영역에 대한 보존이 없었으므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도하신 사건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서 일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길도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사사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서 코로나를 보내셨다’ 이런 식으로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로 와서 봅시다. 다른 세대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바로 그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통해 일하시며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여정이 ‘사사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삿 3: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여호수아 시절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경험한 세대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운 세대들을 하나님은 훈련하고자 하십니다. 여호수아 때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며 하나님을 알아가고 배워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그들을 침략하는 적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이것은 정보적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이며 관계적 지식입니다. 이들은 지금 하나님을 머리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삶으로 고백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1. 옷니엘 첫 번째 사사는 ‘옷니엘’입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사사기의 공식대로 펼쳐집니다. 1) 악행 (삿 3:7) 이스라엘 자손이 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 2) 하나님의 진노 (삿 3:8)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 넘겨 주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리사다임을

여덟 해 동안 섬겼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진노하심을 기록하고, 이 모든 일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의 왕에서 이스라엘을 넘겨주신 사건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왕의 또 다른 폭력과 야망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세력에 굴복하게 된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3)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삿 3:9a)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으니, 이스라엘은 염치없지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염치없더라도 찾으십시오. 사탄은 여러분에게 양심도 없다고 정죄할 테지만, 그럼에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 앞에서 자존심은 없는 것이죠. 하나님도 우리에게 늘 그러하십니다. 4)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삿 3:9)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으니, 주님께서 그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한 구원자를 세우셨는데, 그가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다. (삿 3:10)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니,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전쟁터에 싸우러 나갔다. 주님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옷니엘의 손에 넘겨 주셨으므로, 옷니엘은 구산리사다임을 쳐서 이길 수 있었다. 사사기를 읽어가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하나의 핵심 포인트는 ‘연약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원래 갈렙은 그니스(혹은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입니다. 이 표현은 그가 원래 유다 지파 소속이 아니고, 개종한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개종한 이방인을 사용하셨습니다. 첫 번째 사사의 출신이 그렇습니다. 또한, 원어에는 9절에 ‘막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유다 지파 갈렙의 막내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입니다. 막내란 당시에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만 하더라도 그렇죠.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사람의 능력과 우리의 어떠한 기준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5) 평화 (삿 3:11)

그 땅은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을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평온했다는 것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궁극적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보다는 소극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평온했다는 이 말도 사사기 후반부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아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였고, 아직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훈련, 이들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그 사귐의 여정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2. 에훗 (삿 3:12)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모압 왕 에글론을 강적이 되게 하여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셨다. 개역개정에서는 ‘또 악을 행했다’라고 표현하고, 새번역에서는 ‘다시’라고 반복된 그들의 죄악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역시나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고, 그 결과 주변 나라의 침공을 당하게 됩니다. 제가 지난 시간 사사들의 이야기는 ‘연대순’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보다 사사기의 기록은

‘지리적 이동’에 따라 기록됩니다. 남부의 유다 지파로부터 북부의 단 지파의 이야기를 하나씩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활동 시기는 겹칠 수도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의 타락과 징계 (삿 3:13) 에글론은 암몬 자손과 아말렉 자손을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종려나무 성읍인 여리고를 점령하였다. 이번에 적군인 모압 왕 에글론이 빼앗은 지명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 성은 굉장히 상징성이 있죠. 여호수아 시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상징과 같은 곳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구원 (삿 3:15)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한 구원자를 세우셨는데, 그가 곧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인 왼손잡이 에훗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에훗을 시켜, 모압 왕 에글론에게 조공을 보냈다. 이번에는 베냐민 지파 에훗을 사용하십니다. 에훗을 ‘왼손잡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이 표현은 ‘이테르’, 즉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베냐민’이라는 뜻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파에 속한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한 사람. 에훗. 역시나 하나님의 선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가 모압 왕을 죽이게 되는데, 아마도 왕이나 경비병들도 왼손밖에 쓸 수 없는 그가 조공을 바치러 왔을 때 경계를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에훗은 적장을 물리치고, 모압을 무찌르게 됩니다. 3) 구원과 평화 (삿

3:30) 그 날 모압은 굴복하여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그 뒤로 그 땅에는 팔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3. 삼갈 (삿 3:31) 에훗 다음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가 되었다. 그는 소를 모는 막대기만으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쳐죽여 이스라엘을 구하였다. 사사기에는 6명의 소(小) 사사가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이 한 줄이므로 우리도 그저 하나님께서 삼갈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음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식 이름이 아니므로, 학자들은 삼갈 또한 이방 출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4. 드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참으로 독특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드보라’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1) 이스라엘의 타락과 징계, 그리고 간구 (삿 4:1) 에훗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 (삿 4:2)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솔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내주셨다. 그의

군지휘관은 이방인의 땅 하로셋에 사는 시스라였다. (삿 4:3) 야빈은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억압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 울부짖었다. 이번에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억압을 받습니다. 징계의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 때는 40년 동안 징계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드보라는 유일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사사라는 이름이

가진 역할에 걸맞게 ‘재판’을 하는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4:5에 나타납니다. 지금이야 여성의 리더십을 존중하는 분위기라서 유능한 여성 리더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요즘 교회 안에는 남성이 40% 되도 선방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 교회도 교육부 부장 3명 가운데 2명이 여성이고, 예배인도자 6명 가운데 절반이 여자 인도자입니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들을 우리 자매님들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회는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지요. 당시의

사회는 우선적으로 지도자가 될 ‘남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를 택하여 사용하십니다. 2) 구원 드보라는 가나안 군대와 전쟁을 위해서 ‘바락’이라는 장군을 부릅니다. 그를 통해 가나안 군대를 무찌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합니다. (삿 4:6) 하루는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납달리의 게데스에서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에서 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으로 가거라. (삿 4:7) 야빈의 군지휘관 시스라와 그의 철 병거와 그의 많은 군대를 기손 강 가로 끌어들여 너의 손에 넘겨 주겠다.’” 바락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바락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승리의 확신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락은 머뭇거립니다. 물론 바락이 상대해야 하는 가나안 왕 야빈은 철 병거 900대를 거느린 강력한 상대였습니다. 그

강력함을 무기로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학대해 왔습니다. 혹시 여러분, 바락과 같으실 때가 있습니까? 세상이 주는 위협과 실제적인 힘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도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못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을 위협하는 ‘야빈의 철 병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대장 되심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전쟁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락은 순종에 실패했고, 결국

이 이야기에서 바락은 드보라를 의지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맙니다. 전쟁이 시작됩니다. 적의 지휘관은 ‘시스라’라는 인물입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명령하여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삿 4:14) 드보라가 바락에게 말하였다. "자, 가십시오. 오늘이 바로 주님께서 시스라를 장군님의 손에 넘겨 주신 날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대 앞에 서서 싸우러 나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락은 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볼 산에서 쳐내려갔다. 넘겨주셨다는 표현은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켜서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는 드보라의 믿음이 강조됩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스라는 크게 패하고 병거에서 내려 도망칩니다. 그는 겐 사람 헤벨의 가문이 있는 지역으로 도망칩니다. 동맹관계가 있었다고 나와있습니다. 헤벨의 장막으로 도망친 시스라에 대하여 헤벨의 아내 ‘야엘’의 환대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시스라는 그곳에서 지쳐 쓰러져서 깊은 잠에 빠집니다. 하지만 시스라는 잘못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여인 야엘은 다소

충격적인 방법으로 시스라를 죽입니다. 시스라는 결국 바락이 아닌 여인의 손에 죽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은 시스라의 패배뿐 아니라, 바락의 모습도 야엘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보라와 야엘. 어쩌면 누군가의 아내라고 표현되는 그녀들.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 헤벨의 아내 야엘. 두 아줌마의 이야기. 성경조차도 그들을 누구의 아내라고 표현하는 당대의 상황에서 기대받지 못하던 여성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승리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사용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사탄이 여러분에게 주는 거짓된 속삭임이 아닐까요? (삿 5:31) 주님, 주님의 원수들은 이처럼 모두 망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뒤로 그 땅에는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20년의 속박이

끝나고 찾아온 40년의 평화. 어쩌면 다시 그렇게 이들은 하나님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 내게 고난이 없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쩌면 그 물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맺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우리도 가나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 보면 유혹과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공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누군가는 잠시간의 평탄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평탄함은 더 큰 유혹이 됩니다. 고난이 있으면 차라리 그 고난 때문이라도 매달리는데, 혹시 평탄함 가운데 더 큰 유혹과 시험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우리가 예배 때 부른 찬양처럼, 밤이나 낮이나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밤은 밤이라서, 낮은 낮이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확인한 것처럼, 사사는 뛰어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방인, 때로는 결함이 있는 사람, 때로는 여성. 모두 당대의 사람들에게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사사로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힘을 발휘한 이유. 오직 성경이 그들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것이 있다면 이 말씀이죠. (삿 3:10a)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니,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전쟁터에

싸우러 나갔다. 사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그들은 비범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사는 그 역할이 끝나면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사들의 무기는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도구로 맡겨드린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주께서 원하시는 것도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 때, 흔들림이 있고,

때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단번에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주님은 늘 길을 만드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주님의 일을 해나가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