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는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통하여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교회가 믿는 주님이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아니라면, 어느 교파이던지, 어떤 교회이든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고, 주님 안에 속하여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2)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장로나 권사보다도 더 좋은 단어입니다. 성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를 거룩하다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본래 거룩하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무지할지도 몰라요. 제멋대로이고 엉망입니다. 머리에 의해 통제받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손발이 따로 놀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거룩하신 주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셨어요. 그 안에서 우리는 머리의 영향을 받으며 함께 그분의 거룩함을 닮는 것입니다. 3)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보편적 교회. 여러분, 원래 이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아시나요? ‘가톨릭(Catholic)’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원래
보편적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거친 이후 개신교는 구교(가톨릭)와 구별하기 위해 보편적 교회를 표현할 때는 ‘유니버설(Univers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이든 유니버설이든 사실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의미는 인종, 지역, 재산, 학력, 신분, 나이를 따지지 않는, 다시 말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구별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 만민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만민을 위하여
오셨고, 또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a)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교회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2천 년 전에는 가히 혁명적인 사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가 있었고, 귀족과 천민이 구별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보편적이란 말을 하기는 쉬웠지만 실천하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모든 교회가 다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는 백인 전용교회와 흑인 전용교회가 따로 있었습니다. 지금의 교회들은 눈에 보이는 차별은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 온 교인이 명실상부하게 한 형제자매로 어우러진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제가 실제로 몇몇 목사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교회는 서울에서 비교적 낙후된 동네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 지역이 전면적으로 재개발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장 잘 사는 동네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재개발 전에 살던 사람들과 재개발 후 교회에 들어온 생활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게 되었답니다. 문제는 이 둘이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실적인 삶의 모습과 고민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간격을 인정하고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하나 되고 모두가
머물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한, 보편적 교회를 위한 끊임없는 애씀이 필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청년 사역자로서 청년부의 범위를 어디까지 끊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서른 살에 청년부 사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 그 교회 공동체에는 47세의 청년 자매가 있었습니다. 20살과 47세가 모두 청년부인 것입니다. 청년 40명 중에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열 명쯤 되었습니다. 47세를 청년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아니,
그것이 맞나요? 저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35세 이상은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다 장년부로 올려보냈습니다. 어떤 교회는 그러다 보니, 1청년(20~26세), 2청년(27~33세), 3청년(34세 이상) 이렇게 나눕니다. 그런 교회 3청년 가봤어요? 결혼 못 한 사람들을 모아놓은 칙칙하고 이상한 모임이 됩니다. 앞으로 비혼주의자도 많을 텐데, 그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 장년 취급을 안 하는 것은 저는 고민이 필요한 문제로 보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정치색으로 사람을
구분합니다. 한때 광화문에는 보수세력이 모이고, 서초동에는 진보세력이 모여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의 사역자 청빙 공고를 보고 저는 마음이 좀 이상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광화문에서는 멀고 서초동에서 가깝습니다”라고 쓰여 있었거든요. 그것이 거리를 의미하겠습니까? 담임목사의 정치적 성향이 그러니, 그것에 맞는 사람만 오라는 의미였습니다. 제가 <성결 신문>에 글을 하나 썼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의
방향성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자 중에서 마태(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 세리는 ‘갑바이’(gabbai)로 불리는 일반세를 수금하는 세리와, 세관에서 일하며 관세를 받는 ‘목케스’(mokhes)라고 불리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 ‘목케스’라고 부르는 세리가 더 악질적으로 과다한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바로 마태는 ‘목케스’에 해당하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열심당(zealot)’에 속한 시몬도 있었습니다. 열심당(셀롯)은 AD 6년, 헤롯 아켈라오의 실각 이후 로마가 유대 땅을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생겨났습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호적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세금을 철저하게 징수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지배체제에 대항하여 바리새파 중 강성파들이 모여 열심당을 만들게 됩니다. 즉, 열심당은 로마를 몰아내고자 무장 독립 투쟁을 하는 애국주의자들입니다. 마태와 시몬. 로마의 세리와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원. 어찌 보면, 당대의 가장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채 살아왔던 두 사람을 주님은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주님 안에서 ‘형제’로서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마땅히 대립하고 분열할 것 같은 사람들도 형제가 될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양극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남녀가 나뉘어 싸우는 성별의 대결, 지역의 대결, 계층의 대결, 세대의
대결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시대를 책임져야 합니다. 제자 공동체와 같이, 우리 또한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과 다른 ‘구별된 모습’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분열과 대립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지금도, 미래 세대에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점점 더 심각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양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형제’가 되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보편적 교회란 무엇인가? 초대교회 시대,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외쳤던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의 고백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사기꾼도 들어올 수 있어야 하고 술주정뱅이, 살인자, 거지, 독재자도 들어와 편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만민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척을 한 이후로 이런 이야기도 몇 번 했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나, 전자발찌를 찬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예배하러 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은 동네에서 소문난 남자를 바꾸어가며 만나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거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는 성경에서 가장 긴
예수님과 사람 간의 대화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일주일 남았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쓰실 것 같으세요? 예수님은 죽음을 일주일 앞두고 여리고에서 삭개오의 집에 가서 교제하며 주무십니다. 그냥 지나쳐도 될 사람이 아닐까요? 굳이 죽음을 앞두고 소중한 하루를 그 집에서 써야 할까요? 그런데 그 삭개오가 당시의 사람들은 가장 교제하고 싶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주님 곁에는 어부, 세리, 장교, 학자, 정치인, 군인, 부자, 거지, 병자, 창녀, 강도, 남자,
여자, 노인, 아이 등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섞여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그와 같이 보편적인 구원을 내려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듯 성도요, 교회로 부름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도 주님처럼 포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4)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합니다. 사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말씀 위에 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본문은 교회 된 우리를 향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해준 성경 말씀에 서지 않고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교회의 주인이시오, 머리시오, 모퉁잇돌이 되시는 주님과 연결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말씀이 아니고서는 이렇듯 다양한 우리가 함께 묶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 위에서 우리는 함께 이 길을 걷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즘에 양육을 하면서 비슷한 주제가 있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아마 우리는 매일 직통 계시를 받고, 또 서로 다른
계시 중에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의 신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전하여준 신앙적 가르침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입니다. 가톨릭은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씀을 지도자 계층에서만 소유하고, 성도들은 말씀을 모른 채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갔습니다. 그곳에 엄청난 타락이 일어납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 후에 말씀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이 부작용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높아진
것은 옳고, 그 말씀이 모두에게 읽히는 것은 좋은데, 때로는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너무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씀의 주인이 아닌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듣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포착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성경이 보급되었고, 누구나 말씀을 보게 되었으나, 때로는 여전히 말씀을 지니고서도 보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따라갑니다. 여러분, 좋은 목사는 말씀에 자신을 세우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모든 목사가 그렇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목사의 권위는 철저하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을 때 주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은 저를 의심하셔야 합니다. 제 말이 성경의 말씀에 맞나, 혹은 벗어나는 것은 아닌지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말씀을 벗어나서 말씀에 어긋난 것을 가르치면 와서 묻고 확인하셔야 합니다. 제가 누군가의 말씀을 마치 제가 준비한 말씀인 것처럼 속이며 전하거나,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말씀의 권위를
벗어난다면 바로 잡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러나 만약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제가 추구하고 가르치는 바가,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고, 때로는 다수의 의견에 맞지 않는 방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시면 그때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우리의 기준은 철저히 그것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다수결의 원칙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열두 정탐꾼 사건이 대표적인 것이 아닙니까? 다수결은 좋아 보이지만 때론 위험합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여러분, 만약에 안디옥 교회에서 다수결로 결정해야 했다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던 두 사람을 안디옥교회는 파송합니다. 그 교회의 리더들이 성령의 뜻을 분별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에 잘 맞는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반응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방법은 주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DTS라는 훈련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에서 DTS가 유명해졌던 이유는 ‘그곳에 가면 하나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다’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대와 의심을 품고 그 훈련에 동참했습니다. 나도 하나님 음성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또 이곳이 가르치는 것이 이단성이 있는지 철저하게 의심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그곳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다만 그 가르침을 이상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DTS에서 가르치는 하나님 음성 듣는 삶이란, 결국 내 마음에 주시는 생각을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내게 주신 생각이 만약 말씀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즉, 결국은 말씀을 잘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지금의 시대에 맞게 올바르게 해석하여 적용하는 역할만 하더라도, 이 시대에 그런 교회들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목회를 5년가량 하면서 느끼는 것은 저는 한 사람도 변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모두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저의 역량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역량이
아니라, 주님이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의 교회에 대한 2번째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1)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2)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3)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4)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보편적 교회와 사도적 교회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턱을 낮춥시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다가서기 힘들었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몰라서 삶을 엉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함을 가지십시오. 우리의 발걸음에 고민이 생길 때면,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하신 것이라면 나도 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또한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가르침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목회자부터 모든 성도가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때로는 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말씀이 가라는
곳까지 힘써 나아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멈출 수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힘쓰십시오. 우리 사귐의교회 모든 가족들이 이러한 하나됨,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기억하며 함께 교회를 일구어 나간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주님의 공동체, 주님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