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사사기를 소개합니다" / 강정규 목사 (2021.11.07) - 2부

2021-11-07 · 사사기 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사사기를 함께 만나볼 차례입니다. 저는 한 권의 책을 시리즈로 설교할 수 있을 때는 보통 첫 설교 때 이런 이야기를 자주 씁니다. 마치 제 역할은 소개팅의 주선자와 같은 것이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설교란 목사의 생각과 사상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저는 메신저에 불과하고 메시지는 성경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사기 시리즈가 끝난 다음에 제가 머리에 남지 않기를 바라고, 사사기라는 책이 여러분 머릿속에 남기를 저는 바라요. 그래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첫 만남이니 더더욱 제가 아직은 여러분과 친밀하지 못한 사사기를 여러분에게 있는 힘껏 소개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사사기를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사사기가 친밀한 사귐을 누리길 바라는 것입니다. 소개팅 주선자의 마음이 그런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적어도 6주의 기간은 ‘사사기’를 내가 마음 열고 만나보겠다는 마음으로 이 시간 우리 함께 시작해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사사’는 히브리어로 ‘쇼페팀’이라고

부르는데 ‘재판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 재판을 했는가? 재판도 했어요. 그런데 대부분 사사기의 기록은 이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일단 사사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 당시가 약간 부족사회 같았으므로 ‘족장’ 같은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사사가 등장했던 시기를 좀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얼마 전까지 봤던 출애굽한 백성이 결국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을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상당한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열두지파에게 각각의 땅을 분배해 주었지만,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 중에는 아직 점령하지 못한 채 남은 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령이 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남은 땅도 차지하라는 사명을 줍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가나안 정복 전쟁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의 믿음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가 대표적이죠. 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이 비상식적인 일을 시킵니다. 일부러 그러시는 것이죠. 그 싸움을 통해서 확실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언약궤 앞세우고 성 열심히 돌라는 것인데, 그것에 순종하니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정작 그다음 더 쉬워 보이는 전쟁에서는 집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 의지하고 순종하면 이기지 못할 싸움에서 이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보다 쉬운 전쟁에서도 대패하는 것이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이스라엘이 그 후로 하나님 의지하며 나아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호수아가 있을 때까지는 여호수아가 리더로서 백성을 그렇게 이끌어 가니 가능했어요. 문제는 이제 여호수아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죽기 직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맹세를 받습니다.

저는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를 참 좋아하는데요.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한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스라엘 백성은 당당하게 외칩니다. (수 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며 결단합니다. 그렇게 출애굽 2세대의 지도자 여호수아도 죽습니다. 문제는 그를 이을 지도자가 마땅치 않았어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리더십이 잘 넘어왔는데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못 키웠어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제 각 지파가 협력하여 전쟁을 치르거나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한 정복 전쟁의 기간이 7년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으로부터 모세와 여호수아의 죽음까지 기간이 50년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죠. 정확하게 그 이후 바로 사사시대가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빨리 본다면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부터 사사시대 이후에 왕이 세워지는 시기까지 계산해보면

약 400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긴 시간이죠. 사사기는 저자가 익명입니다. 400년의 내용을 한 사람이 기록했을 리도 없지요. 그러니까 몇 세대에 걸쳐 사사들의 활동이 기록되고 전수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전해 내려온 내용을 통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 500년’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마도 책으로 이것이 완성된 시기는 왕정 시대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대표적이죠.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을 거론한다는 것은 왕정 시대를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죠. 다만 이 구절이 외형상 인간 왕을 가리키는 것인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이중적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해석도 가능합니다. 사사기에 안에는 모두 12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원래 12명을 좋아하잖아요. 사사가 꼭 12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사사기를 벗어나서 사무엘상만 가더라도 엘리도 사사이고

사무엘도 사사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일부러 12명을 다루고 있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대사사’와 ‘소사사’가 나눠집니다. ‘대사사’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입니다. 그리고 ‘소사사’는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입니다. 어떤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대사사는 여러분이 좀 알고 있는 이름들이 많고, 소사사는 전혀 모르는 이름들이죠. 대사사, 소사사의 구분은 분량으로 나눕니다. 소사사는 1~3절 사이로 짧게 소개되는 6명입니다.

대사사 6명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사사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보통 설교 시간에 잘 보기 힘든 ‘구조’표를 소개해볼게요. 제가 이것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이렇게 볼 때 사사기의 큰 그림이 보여요. 큰 그림을 이해하면 앞으로 여러분이 사사기를 읽어갈 때 더 쉽고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의 오늘 설교의 최종적 목표는 여러분이 이 설교 이후 더욱 열심히 사사기를 읽어보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말씀과 가까워지는

그것이 최고의 적용이 아니겠습니까? I. 서론(2개) A. 1:1-2:5 B. 2:6-3:5 II. 본론(3:6-16:31): 사사들의 이야기 A 옷니엘 B 에훗 C 드보라 X 기드온 C' 아비멜렉 B' 입다 A' 삼손 III. 결론(2개) A. 17-18장(레위인과 단지파) B. 19-21장(레위인과 베냐민 지파)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사사기의 중간에 기드온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 앞에는 긍정적인

사사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드온 이후로는 전혀 지도자답지 못한 사사들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동족들끼리 싸우기도 합니다. 저희가 마침 수요일에 진행하고 있는 구약의 파노라마에서도 사사기를 짧게 다뤘어요. 그때도 사사기에는 ‘악순환’의 사이클이 등장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의 파노라마에서는 7번의 악순환이라고 표현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순환을 6번으로 봅니다. 횟수는 관점의 차이이고, 중요한 것은 내용이죠. 1) 이스라엘의 타락 (범죄) 2) 하나님의

징계 (진노/압제) 3)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부르짖음) 4) 하나님의 구원 (사사 세움) 5) 재 타락의 나선형 전개 (재범죄) 대사사 6번의 이야기가 모두 이러한 사이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사사들이 등장한 다양한 배경과 다양한 활동 장소가 있지만, 사사시대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동일한 패턴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의 구조에서 보듯이, 이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 좋아지는 것입니다. 점점 더 이스라엘의

상태는 심각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를 이스라엘의 영적 암흑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사사기의 서론입니다. 이번 한 주간의 묵상 내용이 이 부분이었죠. 사사기에는 서론이 두 번 나오는데, 1:1~2:5과 2:6~3:6까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서론은 여호수아 시대 이후의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삿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주민을 쫓아내는 데 실패한 일을 지파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원래 여호수아 시대에 분배받은 땅에 대해서 각 지파가 남은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었어요. 땅만 받은 것이 아니라 미션도 받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는 것. 특별히 우리는 청지기적 신앙 안에서 ‘맡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저는 저희 자녀를 하나님이 저와 저의 아내에게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으며 제게 이들의

육적 아버지로서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저는 사귐의교회의 목회자 역할을 제게 맡기셨다고 생각합니다. 금요일에도 보았듯이 이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더 나아가 저는 저에게 주신 물질도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맡은 자로서의 책임이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분배한 것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 했어요. 그들에게는 정확한 임무도 말씀해주셨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을 모두 몰아내서 그들의 문화와 뒤섞여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기보다는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며 이용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애굽에서 배운 그 피라미드 구조를 가나안 땅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이 실제적 유익이 있는 일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이었어요. 현실 앞에 타협하는 길을 택했기에 가나안 민족과 동화되는 일이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여호수아 마지막에 유언 설교의 내용에 대한 서약은 지켜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배반입니다. 그 결과들은 사사기에서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두 번째 서론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서론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았더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서론은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끝납니다. (삿 2:1b)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삿 2: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그리고 두 번째

서론도 여호수아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서론이 굉장히 슬퍼요. (삿 2: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삿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합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갑니다. 2세대가 바로 2:7의 사람들이죠.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 그 장로들까지는 하나님의 행하신 큰일을 보며 여호와를 섬깁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그 밑에 세대로 전수되지 않았어요. 출애굽 3세대에 해당하는 ‘가나안 세대’입니다. 가나안에서 태어난 이들은 여호와를 몰랐고 그분의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바로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 땅을 허락하시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그 땅을 차지한 백성들은 그 땅에서 배교합니다. (삿 2: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삿 2: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삿 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우리는 이들을 보면서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사기 밖에 있어서 어쩌면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것일지도 몰라요. 한번 사사기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상황에 한 걸음 더 다가서서 생각해 볼까요? 바알은 무엇인가? 바알은 당시에 가나안 지역 사람들이 섬겼던 신입니다. 뜻은 ‘주(LORD)’ 혹은 ‘소유자’입니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알 종교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어요. 농경 생활을

주로 하면서부터 바알이 비를 내려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엄격한 규칙들과는 대조적으로 성적인 무절제를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바알 종교의 감각적인 요소들은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 종교의 의식들을 좇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바알이 나를 더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 같고, 또 여호와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고 거룩하게 살라고 말하는데, 바알은 성적인 쾌락조차도 예배의 요소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전 창기들이 등장하는 것이죠. 바알 신전에 가서 예배하는 것이 성적 행위까지도 포함되는 경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풍요와 즐거움. 그것이 바알 신앙입니다. 아세라도 비슷해요. 이것은 여성 신입니다. 바알의 어머니입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가장 유명한 팔복의 내용만 하더라도 어떤 것입니까?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애통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들까지도 ‘복’이라고 말해요. 이유를 설명하죠.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는 자들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최고의

행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보다, 나는 풍요가 더 좋아요. 인생의 즐거움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 그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뭐, 광야에서 만나나 내릴 줄 알지. 이제는 만나 필요 없잖아.” 그보다는 풍요로운 소출, 우리로 말하면 돈 잘 벌게 해준다는, 성공하게 해준다는 바알 믿는 것이 이제는 우리에게 더 맞는 것 아닌가? 여러분, 이스라엘 정탐꾼 사건 기억납니까? 가나안은 풍요로운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땅을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차지했지만, 그 풍요를 계속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도 버리지는 않지만, 바알도 믿습니다. 혼합 종교. “누가 하나님 안 믿는데. 그런데 하나님만 믿는다고 되나? 지금이 가나안 시대인데.” 구약의 바알 신앙이, 신약의 맘몬 사상으로,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는 ‘물질 만능주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그래도 돈을 실제로는 더 믿지.” 하나님은 마음으로 믿고, 실제적 삶에서는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가 이 시대의 바알 숭배자입니다. 제 말이 좀 심하죠. 그런데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말도 안 되게 바알 숭배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사사기 앞부분을 보면 모든 지파들이 대부분 맡겨진 땅에 대해 정복을 합니다. 그러나 타협합니다. 굳이 쫓아낼 필요 있나? 우리가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던 것처럼, 이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고 우리가 좀 더 이 사람들을 이용해서 편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삿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삿 1: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삿 1: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 1: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삿 1: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삿 1: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삿 1: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삿 1: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삿 1: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삿 1: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여기서도 등장하는 딱 한 인물. 갈렙. (삿

1:20)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출애굽 1세대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던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그들이 2세대의 신앙을 지키는 리더들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도 갈렙은 순종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에요. 우리가 지난주에 ‘여호수아의 집념’을 나눴습니다. 모세를 바라보면서 여호수아는 자신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그러한 갈망함을

갖고 나아갔고, 끝내 그는 모세의 뒤를 이어 모세와 같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을 따르는 세대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무엇과 함께? 가나안을 차지함과 함께. 이것이 신앙과 삶의 아이러니 아닙니까? 고난을 겪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평안을 찾으면 하나님보다 세상에 안주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 나서 이들은 하나님과 멀어져갑니다. 그것이 사사기 시대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의 황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시죠?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보면서, 그들을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삿 2: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원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암’입니다. 그런데 20절에서

나오는 ‘백성’의 히브리어는 ‘고이’입니다. 이것은 이방민족을 지칭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21절과 23절에 나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이스라엘에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방민족들 : 고임 - 복수형) (삿 2: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삿 2: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이 있었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이루셨습니까, 이루지 않으셨습니까? 이뤘습니다. 내가 네 후손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주겠다. 주셨습니까, 주시지 않았습니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다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확인시켜주셨어요. 시내산에서도 확인하고, 모세를 통해서도 거듭 확인하고,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습을

따르며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처럼 취급하시며 그들을 ‘암’이 아니라 ‘고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그의 언약을 지킬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적어도 우리교회의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한번 구원의 티켓을 받은 것처럼 여길 수 없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나는 교회 와서 교인이 되었으니, 나는 이제 구원을 다 이루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의 바알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견주어 높이며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그것이 네 삶을 구원할 것 같으면 그것을 믿어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의 우선순위가

확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 세상은 점점 더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가나안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끼리 세상과 떨어져서 살아간다면 유혹이 덜하겠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 안에서 여러분을 제사장 삼아서 하나님을 드러내어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사사기를 공부하는 내내, 말씀은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과연

당신은 이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범죄와 고난, 부르짖음과 구원. 어쩌면 이것이 반복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디 우리의 삶의 여정은 그 와중에도 점점 더 하향하는 믿음의 곡선이 아니라, 이 안에서 깨닫고 배워서 하나님께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 일을 위해서 서로를 잘 붙잡아주고 함께 갑시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가장 큰 힘은 이 여정을 함께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우리의 여정을 돌보고 지키시는 주님이 계시고 함께 이 여정을 가는 동역자들이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입니다. 함께 힘을 냅시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해서 내 삶을 점검하고, 내 삶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분별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살아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