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이미'와 '아직' 사이의 삶 / 강정규 목사

2023-08-18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금요기도회) '이미'와 '아직' 사이의 삶 (하나님의 나라 17강, 2023.08.18) _ 양주 옥정 사귐의교회 오늘이 17번째 설교라는 것은 이미 16번의 설교를 통해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번 2학기에는 성결대학교 신학부 학생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강의하게 됩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이 내용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다뤘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주제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와 어원 / 이해와 오해 / 설계도 / 역동성(관계성) / 예수와 사도들의 복음 /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프토코스) / 백성이 되는 법 / 선택의 중요성 / 현재적 구원(치유, 자각) / 창조 질서와 사명 / 회복된 자로 살아가기 어떤 주제는 한 주로, 어떤 주제는 몇 주에 걸쳐서 다뤘습니다. 우선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힘썼고, 그것이 왜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지

다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특징이 무엇이며, 백성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다뤘습니다. 그를 통하여 구원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이해하고자 했고,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뤘습니다. 오늘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미래적 이야기보다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적 삶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다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 ‘지금’ 하고 계신 일, ‘앞으로’ 하실 일을 배웁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계시 된 그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같은 방향으로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지난 설교를 통해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걸맞은 창조 본연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창조’하신 분의 뜻에서 벗어난 우리를 예수님을 통해 ‘새창조’ 하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뜻 안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이 어떻게 이뤄졌는가? 성경을 보면, 먼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한 사람’을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삶 속에 찾아가셔서, 먼저 그의 삶 안에서 일하시며 그를 회복시키시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드러내는 ‘회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깨어진 세상에서 행하신 구원 사역이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한 거부입니다. 창조 본연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므로, 그 회복이란 다시 하나님의 주되심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주되심, 그 통치의 관계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 ‘통치적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드는 것처럼, 대사관이 장소와 상관없이 통치에 따라 소속이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의 통치를 잃어버렸던 혹은 거부했던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갈 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회복된 사람들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그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도록 하셨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주심으로, 사람과 세상을 ‘구원’해 가십니다. 이렇게 먼저 불러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감당했다면, 새언약의 시대에는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 : 만물의 창조자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예수님 : 만물을 충만케 하는 구원자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 교회 : 예수님께 속한 몸 (충만케 된 존재)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만물을 충만하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지금 충만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을 잃어버린 고갈됨, 깨어짐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렸기에 죽음에 가깝고, 빛을 잃어버렸기에 어둠의 상태였습니다. 그 어둠에서 빛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빛 가운데로 나아 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시 누림으로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일회적 사건으로 보면, 이 회복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원을 천국행 티켓으로 보는 사람은 구원이 과정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심으로부터 구원은 시작된 것이고, 그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회복되고 치유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깨어짐에서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온전해짐’이라고 성경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는 먼저 회복되고, 회복된 존재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합니다.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은 만물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완성에 대한 성경의 표현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모든 성도가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주어진 창조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왕 노릇 한다고 할 때, 그 다스림의 대상은 ‘새롭게 된 만물’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우열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성경의 시작과 끝이 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지 알게

됩니다. 무엇이 시작이고, 어떻게 끝날지 그 흐름을 이해하면, 성경이 하나님 나라를 담아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처음과 나중은 완전하게 데칼코마니입니다. 성경의 처음 모습 그대로 마지막에 회복되는 것이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을 온전히 실현하실 때, 우리는 창조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창조의 세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지금도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가로막는 세상의 악은 늘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방해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시며 역사 내내 일해오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이 구원에 참여하는 상태와 시기가 모두 다릅니다. 저는 개척 후 교회에서도 늘 ‘회복’이 먼저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이 사명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우선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므로, 또 원래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으므로, 그 궁극적인 목적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궁극적 변화는 부활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심 이후로부터 변화되어, 나중에 부활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적 변화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혹은 ‘하나님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종종 부활 이후의 세상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구원은 지금의 현재적 삶에서 시작되고 역사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미들턴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이들은 종말까지 창조목적에 합당한 인간으로 살기를 미룰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열방에 축복을 전달하는 잠정적인 사명 외에도 현재 역사의 핵심에서 회복된 인간의 모범적인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있는 상태가 ‘온전함’이고 ‘풍성함’이고 ‘행복’입니다. 창조 본연의 모습을 갖춘 최상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온전함을 방해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는 반(反)창조적 행위들입니다. 모든 형태의 죄와 악과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깨어짐을 회복하는 것,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회복이 바로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움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구원의 현재성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사람과, 구원의 미래성만 아는 사람의 신앙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성을 믿는다는 것이 미래성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로부터 미래까지 구원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십시오.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에 대해서 그리 시급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현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구원을 생각할 때, ‘죽어서 천국 가는 것’ 혹은 ‘죽음 이후의 행복’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런 신학적 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현재적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큰 방해를 받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그 구원을 위한 결단을 해 봤자, 그 결단들이 자신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 뿐, 별다른 유익은 없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 믿는 것이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에라도 있으면, 그런 측면에서의 현재의 삶에 유익이라도 기대할 텐데, 저희 교회처럼 그런 것이 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교회에 있으면,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현재적 성공과 축복도 가져다주지 않는 구원과 복음이라면, 즐길 것 다 즐기다가 나중에 죽기 전에 획득하는 편이 낫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오해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치

그것이 ‘세상적 행복’과 ‘종교적 구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즉, 우리는 2가지 부분에 대한 오해를 반드시 해소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는 복이 ‘이 땅에서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바르게 깨달아야 하고,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죽음 이후의 삶에만 영향을 준다는 생각도 교정해야 합니다. 바꿔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곧 ‘구원’인데, 구원이 우리의 현재적 삶을 구원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현재적 삶을 변화시킵니다. 더 좋은 삶으로 말입니다. 그것을 ‘풍성함으로의 초대’라고 우리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풍성함의 핵심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자체가 가장 본질적인 ‘복’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그분과 동행하기 시작한 이후로 내 삶의 모든 부분을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설교를 꾸준히 들어온 분들에게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이제 선명하게 정리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교회 성도 중에서도 금요설교를 듣지 않는 분들은,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오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풍삶초와 주일설교를 통해 일부분을 수용했지만, 아직 뒤죽박죽인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선명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가 선명해질 때, 그 진리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여전히 얽매이기 쉽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구원이 무엇이고,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진리인지 아직 의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의심하십시오. 저는 이것이 진리임을 믿기 때문에 의심하고 질문하다 보면 답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저도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요새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지표이지만, IQ 테스트를 해보면

상위 2~3% 정도의 수치가 나옵니다. 그만큼 저도 머리로 이해하길 원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합니다. 일단 의심합니다. 저의 삶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나라,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서 수없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치밀하게 따져보며 살았습니다. 저는 신앙 따로 삶 따로 구분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믿음의 문제는 곧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믿음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좌지우지됩니다. 저도

40세의 목사로서는 그래도 삶의 여러 모습을 경험해본 편입니다. 목사지만, 저는 창업도 두 번이나 해봤고, 그 과정에서 빛의 자녀가 아니라 빚의 자녀가 되기도 했고, 돈의 무서움과 위력, 때론 즐거움과 안정감도 경험했습니다. 비교적 일찍 결혼해서, 4인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저의 선택으로 4명의 삶이 좌지우지되는 책임감 속에 산 지도 15년 차입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저의 믿음의 임상실험도 있었고, 이제는 그 과정을 다 지나 제가 경험한

진리를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시절에 고백했던 신앙은 ‘순수해서’ 혹은 ‘세상을 아직 몰라서’라면, 지금 갖고 있는 신앙은 삶의 치열함 속에서 ‘찾고 의심하고 두드리고 경험한 결과’입니다. 이런저런 삶의 고민들을 마주하며, ‘이 길이 정말 맞나, 안 맞나’ 수없이 고민하던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 진리에 내 삶을 거는 것이 가장 좋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하나님께 속한 삶은 최대한 빨리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구원은 현재 나의 삶을 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죽은 다음 어디에 머물지를 결정하는 문제라면, 저조차도 굳이 이 삶을 빨리 선택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현재 나의 삶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나의 미래와 죽음 이후까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나서 있는 삶이 길어질수록(회심 이전의 삶이 길수록), 우리는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어떤 요소를 채우지 못한 질병에

오래 노출된 것과 같습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몸이 망가지고, 그 망가짐에 대한 회복의 시간이 더 오래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리의 내면과 영혼은 더 많은 상처와 아픔과 때로는 인격적 손상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회복을 위해서도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거나, 어떤 부분은 끝내 온전히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천만인의 아픔이 담긴 비유라서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는 간혹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탈모’에 비유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 ‘탈모’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탈모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언젠가 반드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삶에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 또한 그 심판이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의 심판을 보면서 우리는 미래의 심판을 예견하며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태양만 못 보고 살아도 식물뿐 아니라 사람도 병에 걸립니다.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삶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실존적인 부분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땅의 갈라짐처럼,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의 내면은 갈라져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더욱 많은 상처와 깨어짐을 경험하며 더 손상됩니다. 때로는 내 내면도 이미 고갈된 우물과 같은데, 내게

기대어 살아가는 더 아픈 영혼들이 많아서, 그들을 위해 나를 퍼주느라 더 닳고 닳은 삶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붙드심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치유이고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이 자신을 ‘영원한 생수’라고 말씀하신 장면이 너무 인상적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주린 것, 목마른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의 고단함과 고갈을 의미하는 표현들입니다. 세상에서 즐길 것 다 즐기는 동안에도 계속 고갈되고, 어쩌면 더욱 빠르게 고갈됩니다. 그러나 그 땅의 메마름이 회복되고, 회복을 넘어 물댄동산 같은 충만함에 이르면, 그 충만함은 자신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사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여러분. 바닥이 쩍쩍 갈라져서 생명조차 거기에 움틀 수 없는 ‘황무지 같은 땅’과 ‘물 댄 동산’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떠난 삶과 하나님을 얻은 삶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날이 빠를수록 우리의 황무지가 동산으로 바뀌는 날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회심과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성령’은 그 땅을 기경하고 새롭게 하는 복구팀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삶은 황무지가 아니라 물 댄 동산,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회복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빨리 회복될수록 자신의 삶을 통해 누군가가 회복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삶이 가진 의미와 가치는 그전에 내가 추구했던 어떤 삶의 행복보다 큰 것입니다. 그전까지 세상의 방식대로 잘 먹고 잘사는 것도

나의 만족과 기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더불어 회복되는 상생이요, 더 나아가 창조의 목적대로 세상을 치유하는 것까지 우리를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내가 세운 나의 삶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운 성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늘 그것을 지키려고 마음 쓰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이 이룬 유토피아의 한계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으로 내 삶을 채울 때, 온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깨우쳐 줍니다. (잠

23:4)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잠 23:5)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삶에 주어진 충만함은 내가 쌓은 나의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안에서 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런 삶에는 이전과 다른 담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고, 바로 그분과 내가 가장 친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갖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께 내 삶의 뿌리를 두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내가 쌓아놓은 것에 대한 잃어버림과 허망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필요하면 주시고, 또한 거두어가시며, 우리의 삶을 창조주의 비전대로 이끌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저는 우리의 삶이 세상의 가치에 붙들려서 그 추구함을 쫓아가는 동안, 결코 ‘영원한 만족’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저의 확신이기에 제가 여러분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바를 여러분에게 믿음으로 전한다면, 저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낡은 포대와 같은 삶을 여러분이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 사는 삶이 시작된 시점부터 여러분의 삶은 새 부대가 되고, 그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을 고백하게 됨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새로운 충만한 삶을 여러분과 함께 오래 살아가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가 회심하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해서 이 땅에서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행복을 깨닫는 삶이 됨을 믿습니다. 이번 심방 가운데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얻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그 행복을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 속에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자족’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다’는 이야기는, 예수를 믿기 전보다 꼭 더 기쁨과 즐거움이 있거나, 편안한 것만 주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봤을 때,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며 주어진 것이 즐겁고 기쁘고 편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있었던 가장 공통된 고백은 ‘자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간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자기가 이룬 것에 대한 만족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삶에 대한 만족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선택이 역시 옳았군’이라고 늘 깨닫게 되는 삶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을 보며 고백하는 말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인정욕구와 권력욕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추구였기에 그것으로 인해 예수님께 혼나기도 하고, 결국 넘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짜로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금과 은이 자신에게 없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자랑이 되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회복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그 후로도 베드로는 종종 여전히 연약한 모습도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아간 새로운 삶의 방향이 계속 그를 변화시켜 나갔기에, 결국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 죽을 위기에서도 의연하였으며, 죽음의 위협이 무서워 배반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주님을 따르며 끝까지 살아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생각하는 높은 가치, 수준 있는 삶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율법적인 삶을 살기도 했고, 가장 열심 있는 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유대교의 적대 세력인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 그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만한 삶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짜 그가 원했던 삶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은 없었습니다.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a)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그의 삶이 진짜 변화되기 이전까지 자신을 만족시켜 주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때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해’가

됨을 깨달았고, ‘배설물’과 같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진짜 만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 주는 ‘행복’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행복을 ‘즐거움’으로 정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보다 따른 후 더 즐겁냐? 글쎄요, 정의하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편안함’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보다 따른 후 더 편안하냐? 이건 거의 100%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라면 그건 동의하지만요.

몸이 편안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더 ‘성공한 인생’이냐? 세상적 성공의 기준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더 ‘부한 인생’이냐? 이것도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전에 내가 추구한 즐거움으로도, 편안함으로도, 성공으로도, 부유함으로도 끝내 얻지 못했던 ‘참된 만족’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삶을 아름답게 살기 위한 오랜 방황을 끝내고, 주님으로부터 주시는 회복을 누리며 그 삶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내게 남은 삶이 가장 많은 순간은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내 지금 이후의 삶이 어떤 것으로 채워지느냐는 매우 소중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추구를 따르는 방향으로 하루하루 더 갈수록, 더 많은 길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 삶을 위한 진지한 고민과 질문에 답을 찾으십시오. 혹시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한 후에도, 세상이 주는 수많은 장애물과 고난 속에서 ‘이 길이 맞나?’ 고민이

들 때면, 말씀을 통해 확인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나아갈 지도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지도를 보면,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길이 맞다고 느끼면, 우리는 지금 내 삶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이제, 3주 정도에 걸쳐 다룬 창조질서와 사명, 그리고 회복된 자로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해서 마무리를 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처드 미들턴의 이야기를 한 번 더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축복을 경험하는 곳은 바로 현재의 역사와 우리의 구체적인 현세 상황 속이다.” 우리의 현재적 삶이 가진 의미를 진짜로 깨닫는 사람이, 현재 나의 삶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미래를 진정으로 사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꿈꾸게 하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새 창조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늘로 가는’ 것을 우리의

최종 운명으로 보는 비성경적 개념을 없애야 하는 것처럼, 종말에 끊임없이 계속 예배하는 것을 우리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는 종교적 개념도 버릴 필요가 있다. 구속받은 자들이 구름 위에 앉아 수금을 연주하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현재적 구원이 창조질서에 맞는 인간 됨을 회복하는 것인데, 우리의 미래적 구원이 흰옷 입고 24시간 예배만 드리거나, 마치 타잔과 같은 비문명 사회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이상한 생각들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바르게 깨달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비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창조목적은 창조주와의 온전한 관계 안에서 이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이 땅에서 그 안에 속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서 점점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고, 또한 주님이 주시는 사랑 안에 점점

더 내 안에 사랑이 충만해집니다. 그리하여 만물을 충만케 회복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그 생명의 강이 우리에게 흐르고, 그것이 나의 모든 메마름과 과거의 상처, 현재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물댄동산,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여러분을 만족게 하는 복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동산 됨이, 여러분의 그

충만한 샘 됨이 여러분이 마주하는 모든 고갈되고 아픈 것을 회복시키며 충만케 되고,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