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을 다뤘습니다. 구약시대는 기본적으로 실패한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민수기에서도 보다시피 이스라엘은 유월절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는 삶에 궁극적으로 실패합니다. 후에 왕국시대에도 마찬가지이죠. 그것이 구약이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고 버리시기보다는,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를 청산하시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 성전도 무너지고 땅도 잃어버리지만, 다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고 성전을 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시며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깨어진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꿈꾸기보다, 깨어진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렸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오만함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다운 특징을 더욱 소망하기보다는, 자신들도 세상의 주도권을 잡는 나라가 되고 싶었고, 메시아가 온다면 그러한 힘을 가져다줄 존재, 즉 자신들이 꿈꾸는 것을 이뤄줄 존재로서 오기를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위기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에 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달라져서 들어오느냐?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 옛사람의 나쁜 습관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끝까지 가려면 둘 중에 하나가
바뀌어야 합니다. 들어온 사람이 성화되거나, 교회가 세속화되거나. 교회 안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는 사람도 있지만, 도리어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나, 세상적 기준에 걸맞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화되는 교회도 있고,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교회가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깨어진 세상에서 진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철저하게 죽이지 않고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이런 표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나의 옛사람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새로워졌는가, 회심했는가? 결국 사람이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 이것은 성령님 안에서 정말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서 깨어진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 삶의 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가난한 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깨어진 세상의 추구를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성경은 ‘가난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표현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나눴던 오해 중의 하나는 이 가난을 ‘물질적’인 것과 무관한, 심령의 가난으로만 보려는 태도가 그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이 가난에는 심령의 가난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가난에는 물질의 가난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워낙 물질적 추구를 향해 질주하기 때문에 그것에 역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적 부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난을 말할 때, 내가 따르고 싶은 어떤 것만을 선택하거나 버리는 태도나, 혹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 하거나, 혹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 가난을 작위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내 관점대로 성경을 읽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가난에 대해서 이 시간에 다루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가난한 자’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 61:1a)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a)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이것이 구약에서 메시아의 사역을 말한 내용과, 신약에서 예수님이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이
복음의 대상은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 감히 제가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백성이 되는 관문과 같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통용되는 세상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바꿔 말해보자면,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나라에 충실한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성경을 원리적으로 적용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본인이 걸려 넘어지거나, 다른 사람을 걸고넘어집니다. 만약
‘가난함’을 위해서 직장을 포기하고 백수가 되거나, ‘가난함’을 위해서 게으르게 일하지 않거나, ‘가난함’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말씀에 근거해서, 본인보다 좋은 형편을 가진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라고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한
사장으로 혹시 계신다면, ‘우리는 다 가난하게 살아야 돼’라는 이유로 직원들의 처우를 잘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성경대로 살고 있다고 말하거나, 열정 페이를 강요한다면 그 또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자기 기준에 맞게 적용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교회에는 물질적 기준으로 봤을 때도 분명 가난한 자와 그보다는 조금 형편이 나은 자, 혹은 부유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물리적으로 모두 통일시키자는 것은 공산주의에 불과하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경적 공동체의 모습도
아닙니다. 또한 반드시 가난한 자가 신앙이 좋고, 부유한 자는 신앙이 좋지 않아서 부유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축복주의라는 잘못된 관점에 빠져서, 세상을 이해한다면 부유한 자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교회에는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가난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편의에 맞게 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내가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고 하여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메시지도 아니고, 내가 남들보다 월급이 많다고 하여 정죄감을 갖고 들을 메시지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은 내가 느끼는 경제적 어려움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부족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다면 그것이 복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은 물질의 채워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된 것이 진짜 복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가 가르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궁핍함이 복입니다. 울음이 복입니다. 고난이 복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궁핍과 고난 자체가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죠. 사람은 많은 경우 그런 환경들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것이 우리가 받은 ‘진정한 복’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진짜 우리에게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나는 어떤 것이 내 삶에 정말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내 삶에 정말 필요한 것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물질과 성공 등으로 여기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주셔야만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태도는 건강하지 못한 신앙생활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반드시 전제해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오해로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물질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무소유의 오류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무소유도 하나님 안에서 본인이 결단했다면 뭐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같이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물질’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가입니다. 물질, 쉽게 말해 돈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세상을 운영하시고 교회도 재정을 통해 운영됩니다. 성경에는 돈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 많습니다. 잘 이해하고 사용하면 이것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도 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럼 돈이 선한 것인가? 그것도 옳은 질문은 아닙니다. 돈은 선과 악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음식은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이 없어서 죽고, 누군가는 너무 많이 먹어서 건강이 나빠집니다.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돈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다만 재물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재물에 지배를 받지 않고,
철저하게 도구로서 이것을 대하며, 무엇보다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돈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거나, 돈이 하나님보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더 우상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선순위의 확인을 종종 하십니다. (마 4: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제자 중에서 일부는 어부로서 살고 있었는데 주님이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결단을 합니다. 어부에게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었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의 삶의 핵심은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입니다. (마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이 청년은 자신이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살고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물질 다 나누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 앞에서 바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물질이 더 중요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부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는 없다는 ‘우선순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가난하면 다 들어가나요? 가난해도 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해도 내 삶에 하나님의 몫이 있음을 기억하고 행해야 한다고 믿어요. 부유하다면 때로는 그 자체가 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결단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명 물질은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필요에 따라 돈을 주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우선순위가 명확하다면 저는 소득의 많고 적음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득이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하실 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는 도구가 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물질을 주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물질을 사용하게 하여 세상에 흘러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게 내가 될지 아닐지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다음 주에 하나복 동역자 수양회에서 사례 발표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 과제를 제출했어요. 그런 나눔에 있어서 제가 늘 적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데, 자꾸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응답할까에 대한 고민을 고백하곤 합니다. 저는 사귐의교회에 자꾸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 제가 뭘 대단히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또 대단히 뛰어나서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뭐 그리 힘과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하나님이 급하시다’라고 느낍니다. 오죽하면 우리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잘 품고 회복하고 살아가 보라고
이렇게 우리에게 영혼들을 맡기고 계실까... 이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즉, 제가 보기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쓰실만한 도구가 너무 없으니, 저와 우리 공동체도 사용하시는데, 이것을 나의 어떠함으로 여기고 교만을 떤다면, 이 부흥은 우리를 도리어 망가뜨려 버릴 것입니다. 물질과 성공의 문제도 똑같습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가 그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물질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에는 나와 우리 가정이 쓸 몫도 포함되어 있어요. 저는 이것을 ‘일용할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선을 정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고 정직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서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욕심을 부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다루는 것은 늘 하나님의 주인 됨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내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즉, 종 된 마음으로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누군가가 저에게 요즘 가장 좋은 차를 선물로 줬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 저에게 깊은 은혜와 감명을 받은 사람이 저에게 테슬라를 선물했다고 해봅시다. 여러분은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바로 거기에서 제 신앙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번 누가 저에게 주신다면 제가 최선을 다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저는 만약 그런 상황이 진짜 벌어진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저에게 물질을 주시고 저를 보시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로또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로또 사서 당첨이 되어봤자,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오히려 엄청난 시험대 앞에 서는 것이 될 것이고, 거기서 내가 쓸 수 있는 몫은 제가 봤을 때, 하나님이 얼마 허락해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굳이 제가 왜 그 위험한 시험의 길을 스스로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부유한 것, 잘되고 있는 것, 물려받은 것이 많은 것, 혹은 타고난 재능이 많은 것은 모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인데, 이 기회 앞에 내가 어떻게 결단하고 반응하며 순종하는가, 그것에 따라 이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기회이기도 하고, 신앙의 위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돈을 좇는 삶을 살고 있거나, 돈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삶을 살고 있고, 가치관이
거기 있다면... 반드시 삶에서 하나님은 한번은 테스트하시고 물으실 것입니다. “나야, 돈이야.” 이것은 돈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우선순위를 두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야, 사람이야?” 특히 한국 사람은 자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자녀가 나의 노후라고 생각을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닙니다. 자녀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에 있어서 두가지 반대적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재미난 실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한 목사님께 지나가는 말로 “나는 프라이드가 없어서 프라이드를 타.”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반박을 했다고 해요. “목사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큰 차를 타서 자기가 프라이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작은 차를 타서 프라이드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똑같은 오류입니다. 차는 그냥 차입니다.” 이 예화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위가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행위가 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주신 마음이 있어서 절제하여 삶을 제한하고 검소하게 살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프라이드로 삼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오류가 바로 그것이었죠. 그러므로 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나는 이렇게 사는데 쟤는 왜 저렇게 살아?” 이 태도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오류는 나의 ‘게으름’과 ‘불성실함’에 대해서 신앙으로 포장하는 오류입니다. 가난이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겠다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이지,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핑계한다면, 그 또한 오류입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신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수업 시간에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기대하는 가난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가난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여서 돈을 벌지만, 그 모든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는 결단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가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돕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즉,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가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냐? 네. 우리는 남 주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버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추구와는 완전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위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기독교인도 열심히 일하고 그 결과로 승진하거나 영향력 있는 위치에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 상황에서 자신이 누리게 되는 것이 많아짐을 기뻐하겠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자리에서 더욱 무거운 책임감과 그 자리가 주는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하나님 중심된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부유함’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자기중심성의 가장 대표적인 언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중심성을 내어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 즉 가난한 자입니까? 이것은 늘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결단이고 싸움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우리를 보면서, 세상에 임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그 역행하는 모습
속에서 진짜 무엇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돈인가 하나님인가, 성공인가 하나님인가. 우리의 힘으로는 오늘도 내 마음은 이 자발적 가난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진리를 향해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님은 진리 안에서 주시고, 성령은 우리가 그 진리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붙드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삽시다. 세상 따라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