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10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바로 부자 관리와 삭개오를 비교하여 설교했습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의 목록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 사람은 진짜야” 했던 부자 관리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했고, 우리가 보기에 “쟤는 돈밖에 몰라”라고 했던 삭개오는 하나님을 택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큰 핵심은 삭개오의
삶도 사실 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 깨어짐을 다른 것으로 채우며 살기 위해 그가 붙들었던 것이 ‘돈’이었을지도 몰라요. 그거라도 있으면 행복할까 봐. 그런데 삭개오는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음을 경험했던 것이죠. 니고데모도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종교의 경건함과 사회적 인정을 받으면 채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공허합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깨어짐과 공허함을 이성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관계중독이죠.
남자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아도 계속된 악순환의 고리 속에 살아갑니다. 각기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의 공허함을 뭔가로 채워야 더 나은 삶이 될 것 같은데.... 세상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행복해’라고 우리를 세뇌하죠. 그러니 그냥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해결책이 있을 줄 알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없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채워짐을 받도록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체한다고 한들, 거기에 영원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이죠. 참된 만족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깨어짐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행복, 그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먼저 손을 뻗으신 분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중심성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참된 소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큰 구덩이에 빠졌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를 써봐도 할 수 없었는데, 거기로 밧줄이 던져진 것입니다. 그 복음의 초청에 응답하는 자들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니 나라에 속한다는 것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이 깨어진 세상의 삶이 전부인 줄 알았던 우리에게, 이미 이 세상에 임해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를 깨닫게 하고, 그 나라에 우리가 초청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보석 발견한 사람은 기뻐 뛰며 집에 돌아가 집
팔고 땅 팔고 냉장고 팔아 기어이 그 밭을 사고 말 거야” 어린이 찬양의 이 직설적인 가사처럼,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 그것이 진짜 가치 있는 보석임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난 설교에서 읽었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고,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바로 그 ‘선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선포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부자에게 복음이 선포되나요? 당연합니다. 부자들이 복음 선포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가난한 자, 남자, 여자, 노인, 아이, 피부색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복음은 모두에게 선포되며, 모두를 초청합니다. 다만 그 선택을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이 ‘전부’라는 것이죠. 거기에서 소위 부자들의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은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 법은 모든 것을 다 파는 것이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어쩌면 하나님 나라 신학에 있어서 가장 권위자 중 한 분인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 선포에서 부자들이 배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드릴 각오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떠나갔다. 그럼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다 가난한
자들인가? 그렇다. 모든 제자가 가난한 자이어야 한다. 복음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부자로 산다면 그는 제자가 아니다. 한 달에 얼마를 벌던지, 집이 무엇이고, 차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의 특징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자이다.” (눅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한 자란 거듭 말씀드리지만, 무소유가 아닙니다. 경제적 빈곤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소유권을 이전하고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맞추어 사는 완전한 종을 의미합니다. 프토코스. 전적인 하나님에 대한 의존. 그 태도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는 것은 바꿔말하면, 매일 주님을 의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인간의 연약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누리고 부족하지 않으면, 쉽게 주를 잊습니다. 통장이 두둑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위기의 순간이 없으면, 내가 주인이 되어 살면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선한 삶을 사는 듯해 보이지만, 실상 주님께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도 속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고, 세상에서 더 우리를 행복하고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말하는 물질을 택한 부자 청년의 선택이 더 옳다고 여긴다면, 적어도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은 아님을 기억하고, 더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리고 매일
같이, 물질이 행복하고 가난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말씀 앞에서 내 연약한 본성을 일깨우고, 내 방향을 바로잡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가치를 더 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얻고, 그의 ‘나라’를 얻습니다. 물질이 내게 제공해주는 것과 하나님이 내게 제공해주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안전하고 행복을 주는가? 이것을 우리는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우리는 내게 있는 그 자유의지라는 권리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택하던, 세상을 택하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절대 어느 누구의 삶도 대신 택해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세상은 이미 너무 많은 경로로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반대쪽에 서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가지 소리 가운데 선택은
언제나 각 사람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초청은 은혜로 주어졌고, 우리는 각자의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성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가족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소중합니다. 돈보다 더 소중합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도 가족 때문에 헌신하며 희생하며 고달파도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그것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아니, 자기 목숨까지도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죠. 말 그대로 유대인의 이해로 보자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종의 목숨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생사여탈권. 그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나누어 주십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십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같은 마음일 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비유를 가르칩니다. 1)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건축자 (눅 14:28)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 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눅 14:30)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것을 우발적으로, 감정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감정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신앙은 내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변해버립니다. 다시 돌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지혜’를 주셨겠어요. 생각하는 힘을 왜 주셨겠습니까? 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겠어요. 우리는 진리를 대하고, 고민하고, 지혜를 다하여, 옳은 길을 잘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이런 것이죠. 건축할 때는 내가 가진 것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철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감정으로
망대를 세우면 처음 생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중도에 포기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말씀해주셨잖아요. 내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합니다. 권리포기이고, 하나님께 소유권 이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얻고자 막상 내 것을 팔려고 보니,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는 관문을 지나게 됩니다. 그 방지턱을 넘어야 진짜
자유 해집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계산(가치 판단)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즉, 여기서는 지혜로운 판단에 있어서 ‘신중함’을 강조합니다. 고민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2) 전쟁에 나가는 임금 (눅 14: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바로 이어지는 이 비유는 선택을 함에 있어서 다른 측면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결단은 지혜롭고 신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신속’해야 합니다. 신중함을 기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는 전쟁 상황이죠. 전쟁 상황에서의 신중함은 평상시와 다릅니다. 신중함을 갖춰야 하지만, 과감한 결정도 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다 검토하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적군에게 내가 신중한 결정을 해야 하니, 1년만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매우 긴급한 판단의 문제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인생이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결정할 권한이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죠.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 지나친 고민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의 행복을 늦출 뿐입니다. 즉, 두 비유는 연달아 등장하며, 일종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기 & 신속히 결정하기. 둘 중에 한 가지를 하기는 쉽지만, 둘 다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는, 신중하고 또한 신속하게 내 삶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대한 많은 비유들에서 실패한 자와 같이 우리도 실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열 처녀 비유 등). 3) 다른 것을 선택한 사람들 (눅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눅 14: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눅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눅 14: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눅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비유에 나오는 잔치는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메시아의 잔치가 벌어지는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 초청 앞에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에 몸은 들어왔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는 결단은 유보하고 있는 것이 내 마음은 아닙니까? 그러나 선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의 복음은 멍청하게 눈
가리고 따라오라는 속임수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여, 최고의 판단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은혜도 주십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여기에 교회 공동체의 힘이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유격훈련을 하면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봅니다. 그리고 선임들부터 그것을 실행합니다. 그들 또한 전에는 이등병이었으나, 이제는 고참이 된 것이죠.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해나갈 용기를 얻고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공동체에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그 좁은 문 좁은 길을 먼저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확 와닿지 않을 때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삶을 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도전이요, 힘이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먼저 걸어가는 자들이 자신의 간증과 경험과 고백을 나눌 뿐입니다. 선택은 스스로 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결코 여러분의 구원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위협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이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각심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눅 13: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눅 13: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눅 13: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눅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말씀은 분명히 구원받는 자가 적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 중에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자, 주님의 가르침을 듣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늘 예수님 주변에서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들에서 무엇을 깨달으시나요. 성경은 복음을 우리에게 후려쳐서 팔 생각이 없습니다.
단순히 믿는 사람들 숫자 늘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복음의 요구를 낮추고 조금 쉽게 해주면 좋을텐데, 성경은 복음의 진리를 두고 흥정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것이 때로는 단호하고 어려워도 그것을 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저를 살게 했음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이 단순히 심한 요구일 뿐이고, 부담일 뿐이라면 저는 그런 복음의 행렬에 굳이 여러분을 초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결단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가 사탄의 정죄함 가운데 흔들리려고 하면 구원의 확신으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반면 구원에 아직 이르지 못한 자가,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면 호되게 다그칩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이런 구원에 대한 경고 구절을 보면,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제가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나누는
이유는, 여러분의 구원을 흔들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함께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또 함께 주님의 가르침을 나누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여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생기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도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해서 끊임없이 초청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한 걸음 더 나아올 수 있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이 교회 안에 이미 그 길을 결단하고 선택하신 분들이라면,
흔들림 없이 걸어가 주십시오. 여러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세상 앞에, 그리고 이곳에 있는 아직 선택을 유보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도 그 길에 주님이 함께하시니 평안함을 노래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설교 가운데 있는, 아직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지 못하고, 세상 등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기 어려운 분들이 계신다면, 저는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 고민이 깊은 것은 진실하고 진지하기 때문임을
이해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부탁드리는 한 가지는 고민을 멈추지 마십시오. 아직 들어오지 못한 그 자리에 주저앉지도 마십시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마치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예배 안에서 계속 길을 찾아주십시오. 떠밀려 갈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물러서지 않으면, 주님이 한 걸음 더 다가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결단을 요구하시면 용기를 내십시오. 오늘도 이 기도의 시간에 주님의 그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