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고난을 이겨내는 소망" / 강정규 목사 (2021.12.19) - 2부

2021-12-19 · 요엘 1-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요엘서를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요엘서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요엘은 소선지서입니다. 3장밖에 안 돼요. 분량이 길지 않으므로, 우리가 그만큼 관심도 덜 갖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요엘서는 여러분이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모르는 책, 미지의 책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구약의 파노라마를 통해서 우리는 선지서의 특징을 아주 짧게 요약했었습니다. 선지서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설교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엘서도 미래의 어떤 기대를 가르치는 선지자의 설교였음을

알 수 있죠. 소선지서는 배치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요엘서는 히브리 성경이나 기독교의 구약성경에서 모두 소예언서에 속하며, 두 번째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호세아-요엘-아모스 순서로 배치가 됩니다. 송태근 목사님은 이 배치에도 메시지가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순서로 배치가 되어 있는데,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지만,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자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사이에 요엘서가 들어가 있어요. 호세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자비)과 아모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심판)의 연결고리와 같다는 것이죠. 실제로 요엘서의 핵심 단어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이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어요. 누군가에는 심판의 날입니다. 절망의 날입니다. 끝이죠.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는 기쁨의 날이며, 소망의 날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마치 호세아와 아모스의 중간에서 그것을 연결하듯, 여호와의 날에도 이러한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도 그렇지 않나요? 많은 사람들이 구약은 무섭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면 그래 보여요.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이유를 살펴보면,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 대해서 화나지 않습니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화가 나죠. 구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주죠.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끝까지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죠. 요엘서의

구조도 아주 심플합니다. 2부분으로 명확하게 나눠집니다. 1) 하나님의 심판 (1:1-2:17), 2) 하나님의 구원 (2:18-3:21) 구약 예언자들의 역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제가 선지서는 ‘설교’라고 했습니다. 참된 설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외교적으로 두 나라가 정상회담을 합니다. 그때 통역이 함께하죠. 통역이 메신저입니다. 대통령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하는

것이 이 메신저의 역할이죠. 여기에 자기의 생각을 넣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나 설교자나 저는 그것을 가장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가졌다면, 오늘날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잘 연구하고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성도들에게 전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저의 도구가 아니라, 제가 하나님 말씀의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약 예언자들은 이런저런

상황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때로는 책망과 심판의 말씀을, 때로는 회복과 격려의 말씀을 전했어요. 그들은 그것을 위해 자신을 보내셨다고 확신했습니다. 요엘도 그렇습니다. 요엘서의 전반부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대개 백성들이 이러저러하게 여호와를 떠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 백성에게 임한 것이라고 선포되기 마련인데, 요엘서에는 죄에 대한 구체적인 고발이 드러나지 않아요. 그저 현재 임해있는 재앙으로

인해 하나님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부분인 1:1-2:17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에 임한 유례없는 재앙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그로 인해 시온에 모여 금식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한 재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메뚜기 재앙’입니다. 아마 메뚜기 재앙이 그리 와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요. 여러분, 요엘서의 이 시대가 우리나라 역사로 보면 언제쯤인지 아세요? 고조선 시대입니다.

고조선이 B.C 108년에 끝나요. 예수님이 오신 때가 삼국시대 신라, 백제, 고구려가 막 생겨난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고조선 시대에 ‘메뚜기 떼’는 실제적인 재앙이죠. 그 시기에는 농경시대가 아닙니까? 그래서 구약에서 메뚜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지요. 아시다시피 출애굽 당시의 10가지 재앙 가운데 ‘메뚜기 떼’가 있지요. 신명기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떠나면 받는 저주의 재앙 가운데 메뚜기 재앙이 있어요. (신 28: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신 28: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여러분, 그렇다면 이 재앙의 여파는 매우 실제적인 것 아닙니까? 농경사회에서 소출을 잘 거두는 것도 중요하죠. 거기에는 땅도 좋아야 하고, 기후도 좋아야 하고, 일하는 자의 성실함도 있어야겠지만, 소출을 맺을 때, 그것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의 사회에서도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어떤 이유로 소진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하지요. 돈 버는 것은 힘든데, 어떤 일로 돈이 날아가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메뚜기 떼의 재앙은 말 그대로 농경사회에 임한 가장 큰 ‘자연재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본다면, 갑자기 다가온 어떤 재앙이나, 불의한 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과 같을지도 몰라요. 혹시 여러분의 삶에 그러한 고난이 찾아왔다면, 요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요엘서는 이 상황에 대해서 2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요. 첫 번째,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을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풀이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재앙에 대하여 성급하게 ‘심판이다’,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다’ 이렇게 지적하지 않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메시지 성경>을 자주 보는데, 메시지 성경 각 책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서문’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지 성경의 부제가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이거든요. 그러니까 현대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해석서와 같아요. 우리의 일상의 언어로 풀어쓴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지 성경만 읽으면 그것은 부족해요. 왜냐하면, 이것은 많이 해석이 들어간 성경이거든요. 그래서 ‘성경 옆의 성경’이라고 저자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것 같아요. 대신 현대인의 언어로,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메뚜기 재앙’은 별로 와닿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농약’이 있고 ‘살충제’가 있잖아요.

메뚜기가 우리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보면, 우리는 성경의 메시지에 다가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라떼~’ 이야기 가운데 예화로 많이 드는 것이 있잖아요. 할머니 세대가 겪었던 배고픔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집에 쌀도 없었다고 말하면, 요즘 시대 사람들은 뭐라고 말해요? “그럼, 라면 끓여 먹지~”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 시대가 ‘고조선’ 시대였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은 농경사회에서

감당하기 힘든 재앙이죠. 내가 힘써 일해도 때로는 그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소출을 빼앗아가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재앙이 지금 나에게는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며 묵상해야 해요.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 요엘 머리말은 이렇습니다. - 재난이 닥치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흔들린다. 돌연한 발명이나 죽음, 국가적 재앙, 사회적 대혼란, 개인적 상실, 전염병, 홍수나 가뭄에 의한 참사를 만나면, 평소 하나님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사람도 단번에

신학자가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풍문이 떠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무능하시다”. “그동안 많이 참으신 하나님이 이제 폭발하셨다.” 예언자의 직무는 바로 이런 재앙의 순간에 일어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사람들에게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좋은 예언자, 다시 말해 진정한 예언자는 그 재난을,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는 방편으로

삼는다. 그런 의미에서 요엘은 훌륭한 예언자이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닥친 한 사건을 가지고, 그들이 지금껏 단 하루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온 날이 없었음을 각인시키는 전거로 활용했다. 우리의 삶은 늘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 유진 피터슨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가 메시지 성경 구약을 완성한 것이 2002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시대에 대해 누군가 최근에 쓴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이 글을 읽고 나서

메뚜기 재앙이 우리 시대가 겪는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나 각 개인이 겪는 어떤 어려움과 연결이 되기 시작하셨을 거예요. 사람들은 재앙을 마주하면 다들 신학자가 됩니다. 2년 전 한국에 처음 코로나가 팬데믹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무수한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도 2년 동안 ‘코로나’에 대한 많은 글을 썼더라고요. 2020.02.27. 인과응보, 하나님의 심판? (코로나 19 관련) 2020.03.01. 코로나 현상 읽기 “선행적 질문” 2020.08.20.

코로나, 전광훈, 한기총, 우리들의 잘못 2020.08.28. 자영업자 x 개척교회 담임목사 with 코로나 2021.01.27. 기독교와 코로나, 참된 신앙에 대하여 [코로나 현상 읽기] 그리스도인의 품격 (누가복음 10:25-37, 2020.3.1) 매일성경.108 _ 역대하 1) 코로나 시대에 읽어야 할 책 (역대하 배경 강해, 2020.11.01) 아예 작년 3월에는 ‘코로나 현상 읽기’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었어요. 그때는 신천지가 코로나 전파의

중심에 서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설교와 관련하여 10가지 정도의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몇 가지 질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국가적 재난으로 심판하시는 분인가? (전쟁, 세월호, 질병 등) 2) 그럼 이번 코로나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인가? 신천지가 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인가? 4) 만약 근처에 소문난 부도덕한 목사가 코로나에 걸렸고 그 교회가 폐쇄당했다. 그 교회 다니는 친구를 만나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7)

하나님의 심판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에게 우선적인 일인가, 아니면 무엇이 우선일까? 8)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특별히 신천지의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에 대한 비판을 삼가야 하는가? 10) 하나님이 지금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태도는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신천지가 타겟이 된 상황에서 설교하면서, 그들이 방역지침을

어기고 협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이 일이 신천지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고 했어요. 곧이어 이태원이 중심에 섭니다. 동성애의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선교단체들이나 이단성 있는 단체들이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돌고 돌아 이제는 기독교가 전 국민의 욕받이가 되었습니다. 또 잠깐 화살을 피해가는가 싶더니, 최근에 다시 오미크론 사태로 교회가 그 중심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경험한 상황이기도 했고,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빈번하게 경험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자신 있게 이 일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죄하던 목사님들은 지금 어떻게 이 문제를 해석할까요? 그런데 코로나 때만 그랬나요. 동남아 나라들에 쓰나미가 휩쓸었을 때도 어떤 교회에서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이것은 불교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는 ‘구원파’를 박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코로나 사건 초기에는 ‘신천지’를 박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은 뭐라고 말할 것입니까? 교회를 없애려는 하나님의 계획인가요? 이제 코로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조금 해석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가 대할 때는 어떠한가요? 질병, 사업실패, 시험의 낙방, 여러 좌절들. 그 위기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어떻습니까? 고난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고난을 잘못

해석하면 절망으로 다가서고, 고난을 잘 해석하면 소망을 찾아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요엘서 1-2장에서 메뚜기 재앙을 말하지만, 이것을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사건을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닥친 고난이고 재난이다. 이렇게 말해요. 두 번째, 요엘서는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이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선포를 깨달으라고 촉구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요엘서는 성급하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로 나아올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여호와를 진실로 하나님이요 왕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난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심판으로 그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이러한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라고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상반되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들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정죄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어떤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던지, 혹은 심판과 전혀 무관한 일이던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우리의 태도를 바라보시기 때문이에요. 이 문제를 해결할 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가 정말로 믿고 있는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코로나 상황에 적용해보면 명확해집니다. 코로나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심판으로 보던지, 아니면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자연 세계의 재앙으로 보던지 그것은 모두의 해석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연 세계의 재앙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죠. 메시지 성경으로 1:13-14를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예복을 입고 함께 통곡하여라. 백성의 예배를 인도하는 너희들, 그들의 비탄도 인도하여라. 너희, 내 하나님의 종들아, 거친 베옷을 입고 밤을 지새워라. 예배하는 곳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봉헌도 없고, 기도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거룩한 금식을 선포하여라. 특별

집회를 소집하여라. 지도자들을 다 불러 모아라. 이 땅의 백성들을 다 모아라. 그들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여라.” 저는 크게는 코로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구나.’ 분명한 메시지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아무리 크고 웅장하게 지어놓아도 소용이 없음을 우리는 텅 빈 예배당을 수차례 보면서 깨닫습니다. 비로소 교회가 건물을 벗어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또한,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 강조하던 우리의 신앙에 대해 돌아보게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고, 흩어진 자리에서 어떤 신앙을 추구할 것인가? 더이상 교회의 모임 예배에만 의존하여 신앙을 지킬 수 없어요. 동시에 예배 시간 외의 삶의 모든 순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더욱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예배에 얼마나 ‘의지’가 필요하고 ‘진정성’이 필요한지도 배우고 있습니다. 설교자로서도 시험대에 서 있죠. 회중이 없는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칠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목사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을 바라봐도 편하게 목회하려면 이렇게 편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핑계가 확실하잖아요. 영혼을 향한 마음이 없는 목회자들은 코로나는 그냥 방학이에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잖아요. 누군가에게 이 시간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시간이고, 누군가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어디 코로나를 통해서 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닥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모습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다면,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가? 돌아봐야 해요. 요엘서는 우리의 상황을 보게 하고, 그것을 통해 궁극적인 구원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지금은 메뚜기가 자연적 재앙으로 왔지만, 이 사건을 보면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재앙이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여호와의 날이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미래에 여호와의 날이 임하였을 때 그날은 그런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작은 재앙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거늘,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들이 맞이할 우주적 재앙에 대해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삶의 작은 실패와 고난 앞에서는 그토록 크게 요동하면서, 하나님을 떠나 있으므로 직면하게 될 신앙의 실패에 대해서는 왜 고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마치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깨닫지 못하는지... 요엘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욜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욜 2:11)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시고 그의 진영은 심히 크고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메뚜기 재앙이 문제가

아니라, 더 큰 재앙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요엘은 외치고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 관계의 깨어짐, 목표의 좌절. 우리는 그런 일을 경험하면 세상을 다 잃은 듯 아파합니다. 여러분, 저도 사업이 잘되지 않을 때의 아픔을 조금은 압니다. 저도 부교역자 때 이력서도 여러 번 써보고 면접 봤다가 떨어지는 일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아픔을 우리 성도님들이 겪는다고 생각하면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쉽게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에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남들보다 한 걸음만 뒤처진 듯 느끼면 전전긍긍하면서, 왜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안주하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파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묵과하고 있습니까? 신앙의 여정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하며 안주하고, 그저 흘러 떠내려가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바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감옥에 있어도 기뻐해요. 이전에 그가 자랑하던 것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깁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어떤 가치관이 그에게 이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질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 안에서 그의 삶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참 자유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협이 통하지를 않아요. 내게 뭔가가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늘 당당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평안합니다. 세상이 주는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했어도, 조금 못났어도 괜찮습니다.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설령

내 삶에서 다른 어떤 부분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 그런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잃어버리지는 않는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세상의 풍파 가운데서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엘은 깨달은 자들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욜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이제라도!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라는 것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메시지

성경은 ‘너희 옷만 바꾸지 말고, 너희 삶을 고쳐라’ 말합니다. 우리가 ‘썬데이 크리스천’이라는 이야기를 가끔 씁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기 위한 겉모습만 취하고, 여기서는 괜찮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없는 듯한 삶을 6일 동안 살아가는 것을 그렇게 말합니다. 바로 옷만 바꾸는 신앙이 그런 것일 테죠.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곳에서의 하루가 아닙니다. 어쩌면 요즘에는

몇 시간이죠. 여러분은 삶에서도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삶에서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고, 그분의 눈앞에서 살아가고자 힘쓰고 계십니까?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정말 믿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고 계심을 진짜로 믿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완벽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은 자녀가 완벽해서 사랑하십니까? 그래도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가고자 힘쓰는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입니다. 요엘서에서 메뚜기 떼는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하는 재앙의 이중적 모습을 담아냅니다. 농경사회의 경제적 어려움과 동시에 이방 국가의 침략에 대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 주변 열강들에게 늘 침략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기회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들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 늘 도움이 되셨던 분입니다. 주님은 그 소망을 말씀하십니다. (욜 2:17)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은 성전 현관과 번제단 사이에서, 울면서 호소하여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의 소유인 이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통치를 받는 수모를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세계 만민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서 조롱하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 가운데 경험할 수 있는 복이 ‘샬롬’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 원래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죠. 그 평안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욜 2:27)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심판의 메시지로 시작한 요엘서는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지난주 설교를 통해서 나눴듯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를 사랑하시어 다시 회복시키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워하시며 말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회복의 시작은 여러분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 안에 회복될 때, 교회가 회복되고, 교회가 하나님 안에 충만케 되어, 세상에 이 충만함의 비결을 전해야 하죠. 충만한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기쁨과 위로의 날입니다. 우리가 그날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애쓰고 헌신하며 나아갔던 삶을 주님께서 아시고 위로하시고 칭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의 날까지는 그럼 하나님은 기다리기만 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거든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가장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이 여기서 주어집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해 베드로가 설교할 때 인용됩니다.

거기서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표현하죠.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 말씀을 보면서 주목해야 할 것에 주목하지 못하고, 주목하지 말아야 할 것에 주목하는 때가 있습니다. 주목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언, 환상, 꿈’입니다. 그것들은 성령이 임하신 결과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현상에 집중한 나머지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보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녀 세대나, 젊은 세대나, 노년 세대나, 혹은 종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백성은 곧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되,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요엘서는 성령이 함께하실 것을 소망의 메시지로 전했고, 우리는 지금 그 성령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는지 아십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느 날부터 노크하고 계심을 느끼신다면... 그래서 나로 하여금 할 수 없는 선한 생각과 행동을 요구하신다면... 저는 그 성령의 생각에 동행해 보시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령님을 경험하며 내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엘서의 결론입니다. (욜 3:16) 주님께서 시온에서

외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소리를 내시니,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요새가 되실 것이다. (욜 3:17) 이스라엘아, 그 때에 너희는,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거룩한 산 시온에서 산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 되고,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도성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의 실패와 넘어짐 속에서도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그 일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한 곳이 된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에덴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이루실 새에덴을 향해 길을 내시고 부르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날은 바로 그 모든 회복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결국, 요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다가 영원한 심판에 직면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삶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 주님이 주시는 소망함 가운데 살 것인가? 허무한 세상이 주는 그 허무에 굴복하여 “다 이렇게 사는 거지”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깨어진 세상에서도 “다른 길”을 보여주시며 초청하시는 말씀의 빛을 따라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동참할 것인가. 하나님은 요엘서를 통해 우리를 그 기대와 소망의 말씀 안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성경의

종말론적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 안에는 소망함이 생기지만 동시에 갈증이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면 점점 회복되기는커녕, 절망케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가득하면 빛도 선명하게 빛납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현실은 우리를 좌절하고 낙심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지만, 주님의 영이 충만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 안에서 샬롬을 누립니다. 이 땅의 절망

가운데서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가게 하는 힘은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님과 함께 주님께서 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이 땅에 주님이 해나가실 그 일들을 고대하며 소망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약속하기를 주님께서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이 땅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소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에서 성령의 임재와 함께 장래 일을 말하고 예언한다는

것은, 세상에 임할 궁극적인 하나님의 소망에 대하여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보았던 선지자 이사야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로마 시대 약육강식의 세상 가운데서도 초대교회 공동체에 성령이 임하시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재산을 가진 이들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내놓고, 서로를 진정한 가족으로 대하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더욱 이기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들지만...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배 가운데, 지금 여러분 안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신비하고 이상한 말을 하고 예언하고 환상을 보면서 세상과 다른 구별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어진 세상, 처참한 현실에 살면서도 주님이 주시는 꿈을 꾸며, 세상이 알 수 없는 행복과 평안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이 신비롭습니다. 때로는 사업이 망했는데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때로는 건강을 잃었음에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거기에도 주 뜻이 있음을 발견하며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정신승리’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몰라요. “야, 너 이상해.” 그런데 그 삶이 계속될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자신들에게 없는 ‘보석’이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그 보석이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 그것이 있음을 이 시간 고백하고 노래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