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목사의 아들로 자라서 바로 신학교를 갔고, 그 이후에는 목회자로 살다 보니, 모교회와 사역자 생활 딱 둘로 제 교회 경험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만, 2번 정도의 기간 동안 교회를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번은 부교역자 사역을 마친 후 다시 부교역자 사역을 시작할 때까지 2달 정도의 기간이었고, 다른 한 번은 개척을 준비하는 반년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역자로서의 삶. 즉, 주일이 가장 긴장되고 바쁜 삶을 살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방문자가 되어 소속되지 않은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만 드리게 되니, 뭔가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예배에 뭔가 더 집중이 되는 측면도 있었고, 새로운 분위기와 어색함 속에서 덜 집중이 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어쨌든 몸도 마음도 참 편했습니다. 가능하면 다양한 교회를 탐방하는 것이 저의 목적이었기에,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의 다양성에 신선함을 느끼기도 했고, 때로는 오히려 정신이 없어서 예배를 한 것인지 구경을 한 것인지 모르겠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기간이 저에게는 몇가지 깨달음을 주는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목회자의 입장이 아닌, 교회의 방문자 입장에 서보는 실제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죠. 제가 목사인데도, 교회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은 때로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첫 참석인데 식사를 하고 가라고 붙잡으면, 감사하면서도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저는 탐방 중이므로 다음 주에 다시 안 올 것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너무 규모가 작은 교회에는 한 번만 가서 예배하고 안 오면 실망이 될까 봐 쉽게 찾아가지 못했던 그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지금 저희 교회에 방문자에게 저는 최대한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힘쓰는데, 그것은 그때 제가 느꼈던 경험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방문자 중에서도 먼저 이야기를 걸어주시면 저도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누지만, 예배만 드리고 조용히 가시는 분에게는 가벼운 인사만 나누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몇차례 예배를 오셔도 성함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굳이 가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관심이라기보다는 기다림이라는 나름의 배려입니다. 첫 탐방은 2개월이니 순식간에 지나갔고, 두 번째는 6개월이었는데, 그 시간 안에서 점점 제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부담 없이 예배만 드리는 것이 자유롭고 편하고 좋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맞춰가서 예배 끝나면 나왔죠. 식사는 될 수 있으면 교회 밖에서 아내와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배생활을 2~3달 하다 보니, 저와 제 아내에게 동시에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교회 공동체에 속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배를 분명히 잘 드렸는데, 뭔가 채워지지 않는 반쪽이 여전히 있음을 그때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고독함, 혹은 나눔의 단절이었습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고, 은혜를 나눌 관계성이 없고, 마치 문화센터 특강을 듣는 것처럼 예배에 맞춰가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오다 보니, 점점
갈급함이 생겼습니다. 예배를 드리니 뭔가는 배우고 옵니다. 지식은 쌓입니다. 그러나 연속성도 없고, 무엇보다 그것을 붙들고 함께 살아갈 공동체가 없다보니, 말씀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력도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가끔 사역에 지쳐있을 때면, 예배만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예배만 드리다 보니 교제를 나누고 싶다, 더 나아가 사역을 하고 싶다는 마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성도의 교제, 즉 ‘친교’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신자반> 에서는 교회생활을 정삼각형 구조에 비유합니다. 말씀-봉사-친교. 이 세 가지가 교회 생활의 삼각형 구조입니다. 정점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교회는 존재할 수도,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설교, 성경공부, 전도 등 말씀과 관련된 생활은 언제나 교회생활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만 있으면 그것은 신학교일 뿐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만 따로 떼어 놓으면 삶과는 전혀 무관한 사변적인 논리나 추상적인
이론이 되기 쉽습니다. 신학자들의 여러 이론이 가끔은 탁상공론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신학교가 아니므로, ‘봉사’는 교회 생활의 한 축입니다. 그것을 통해 주님의 비전에 참여하고 신앙이 자라갑니다. 그러나 만약 봉사만 있으면 그것은 자선단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말씀을 정점으로 한 봉사여야 하고, 모든 봉사는 말씀의 실천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말씀생활은 삶과 괴리되는 추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축이 더 필요합니다. 그것이 ‘친교’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이 말씀과 봉사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지속성을 갖거나 성숙해지기 어렵습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절망하거나 좌절할 때가 있고, 때로는 말씀과도 멀어지고 교회의 봉사와도 멀어지기 쉽습니다. 혼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타성이 붙거나 주관적이 되어 고립되고 정체되기 쉽습니다. 오늘 다룰 주제가 바로 이 친교인 것이죠. ‘친교’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친교가 중심에 있다면 그곳은
사교클럽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저도 기본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하기에 사역을 ‘친교’를 중심으로 풀어갔던 경험들이 어린 시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소그룹 모임에서도 처음에는 삶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만, 끝까지 삶만 나누는 모임이라면 그 모임은 곧 영적으로 죽습니다. 교회의 친교는 말씀의 토대 위에서, 또한 봉사 속에서 이뤄지는 친교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성도의 거룩한 교제 혹은 교통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가 추구하는 ‘사귐’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부분을 담아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럼 친교의 유익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성도와의 만남과 나눔을 가지며 다른 교우들에게도 절망의 순간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저랑 교제를 나누는 분들은 제가 저의 연약함과 어려움을 고백하면 “목사님도 그러세요?”라고 하면서 ‘미소’를 짓는 것을 가끔 목격합니다. “네. 저도 자주 절망합니다.” 그러나 절망만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죠. 또한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서 그 절망 가운데 선을 이루는 것들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또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통해서 다른 교우의 삶에 도전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요, 가정과 일터에서도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신선한 도전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믿음이 성숙해져 갑니다. 때로는 가족과도 나누지 못하는 문제로 괴로울 때, 성도들 안에서의 대화를 통해 성경적인 해답을
찾게 됩니다.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리로 따뜻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더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배 외에도 교회의 크고 작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성도가 함께 모여서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은총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그 설교 시간만으로 우리의 삶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안의 교제와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말씀이 삶이 되는 과정을 함께
경험하며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은 우리 안에 은혜를 되새기고, 풍성케 하는 것입니다. (전 4: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특별히 우리도 올해 교회의 중요한 핵심 사역으로 목양사역을 세워가려고 합니다. 목양사역은 양육과정과 공동체 모임을 의미합니다. 팸 모임. 코로나 전에 팸 모임을
했었는데, 그때는 주일 예배 이후에 잠시 20분 정도 짧은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희가 이 사역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기에 금요예배 시간에 격주로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저는 사실 금요기도회의 지금 모습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반으로 줄이더라도 팸 모임을 금요일에 하려는 것은, 결국 공동체가 살아나야 우리가 함께 오래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돕고 붙들어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사귐을 위해 함께 나아갑시다. 5. 헌금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헌금을 가르치는 설교를 하는 것은 제게 부담이 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가 사례비를 받으면서 더 부담이 있습니다. 원래 헌금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지만, 가장 사탄이 장난질을 많이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도 개척 후 4년 동안은 제가 사례비를 받지 않았기에, 목회자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헌금을 강조한다는 오해를 받을 일은 없었고, 그래서
더 걱정없이 설교를 했었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사례비를 받는 것은 성경적인 삶의 방식이고, 무엇보다도 헌금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경이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죠. 그러므로 제가 이런 것을 가르침에 있어서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성령의 보호를 구하며 이 주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전통교회에서 자랐기에 제가 경험하며 자랐던 교회들은 대부분 헌금 시간에는 헌금 바구니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주보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되었습니다. 또 예배 시간에 헌금한 사람들을 호명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제가 경험했던 교회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한얼산 기도원 철야를 종종 갔었는데, 그곳은 헌금한 금액까지 주보에 공개했는데, 대표자 1명의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예를 들어, 1,000원 홍길동 외 22명, 2,000원 임꺽정 외 8명.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곳에 이름이 나오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예배하는 친구들과 서로의 이름이 나오게 하는 경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법은 동전까지 함께 헌금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면 2,300원 강정규 이런 식으로 주보에 나왔고 그것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지금 보면 그런 일들은 좋게 보면 철모르던 시절의 순수함이고, 나쁘게 보면 바로 그런 짓이 ‘헛짓거리’입니다. 그때가 제가 중학생 때였고, 헌금이 어떤 개념인지 잘 몰랐을 때였습니다. 그저 의무? 습관? 혹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위한 소규모 투자였는지도
모릅니다. 헌금의 진정한 의미는 그보다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늘 독보적 존재입니다. 유일신 신앙이란, 여러 신 가운데 하나님 하나를 잘 믿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렇게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인간들은 각기 여러 신을 믿고 섬기지만, 사실 모든 신은 헛것이요.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유일하게 동급의 영향력을 지닌, 그런 위험성을 가진 대상으로 표현하신
것이 ‘돈’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제가 보기에 ‘돈’에는 힘이 있습니다. 돈에는 소위 ‘유사전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능해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돈을 자꾸 의지하려 합니다. 바로 그러한 의지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경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섬기는 삶을 결정하는 순간이 옵니다.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 있어서 물질을 대하는 태도는 중요한 신앙의 척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생활은 신앙의 중요한 훈련이자 내 마음의 지표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신앙의 척도였습니다. 그 계명을 복종함으로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면, 이 시대에는 물질과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헌신과
헌금으로 표현되는 것이죠. 헌신이 시간을 드리는 개념이라면,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주인 됨을 고백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며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신앙의 고백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것이다.” 이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대상 29:10)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대상 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3)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4)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명목의 헌금이든, 그것은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 때 우리는 헌금으로 인해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간혹 있죠. 제가 실제로 경험했던 어떤 성도는 헌금을 미리 준비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난 후 그날의 감동에 따라 즉석에서 헌금 액수를 결정해서 냅니다. 자신에게 그날의 설교가 감동이 되었으면 좀 더 많이 내고, 별로였으면 조금 내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헌금은 뭘까요? 헌금이 심사 점수인가요? 높은 뜻 숭의교회를 담임하셨던 김동호 목사님이 진행하시는 유튜브 채널의 한 부분을 보게
된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코너였는데, 신실한 부부가 헌금 문제로 이견이 있어서 질문을 남긴 것입니다. 부부가 집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집값이 올라서 차액이 생긴 것입니다. 부부 모두 그 차액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마음이 같았습니다. 다만, 이 부부가 집을 정리한 이유가 얼마간 평신도 단기 선교사로 떠나기 위한 것인데... 그 십일조를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 헌금으로 드릴지, 아니면 선교지에 가서 선교지를 위한 헌금으로 사용할지에
대해서 이견이 생긴 것입니다. 섬기는 교회는 그리 크지 않은 교회라고 합니다. 아내는 출석 중인 교회에 드려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남편은 선교지에 드려야 한다는 의견인데...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 두 부부가 모두 신뢰하는 목사님에게 의뢰해서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우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헌금을 안 하는 경우도 있는데, 부부가 우선 함께 헌금을 작정한 것에 대해서 격려와 칭찬을 해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습니다. 자신도
비슷하게 부동산에서 차액이 생긴 적이 있는데, 그것도 수입이므로 십일조를 했었고, 자신은 다니던 교회에 헌금을 드렸다고 말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고 어느 쪽이든 헌금할 수 있지만, 만약 자신에게 둘 중에 어느 곳에 헌금하는 것이 좋냐고 묻는다면, 자신은 아내의 입장과 같다고 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필요를 결정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십일조로 드리고, 그 외의 선교비는 마음이 있다면 별도로 드리는 것이 옳다고 의견을 주셨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도 청년들을 지도하면서 비슷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조금 리더십에 혼란을 겪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청년들 중에서 신실한 친구들은 십일조를 하긴 하는데,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기보다 십일조만큼의 금액을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서에 찬조를 한다든지, 교회의 누구를 위한 선물이나, 사역을 위한 재정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죠.
그때 저도, 청년 시절에 버는 돈에서 십일조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줬지만, 그것은 헌금에 대해서도 내가 주권을 갖고 사용하는 행동이므로 헌금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헌금은 헌금으로 드리고, 다른 부분은 마음에 따라 그 외에 자원함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가르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새신자반>에는 십일조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십일조’는 총 세가지 종류였습니다. 첫 번째는 성막 유지 및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용도입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교회의 유지비용 및 목회자 사례를 위한 용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십일조는 감사와 축제의 의미로 드려졌습니다. 세 번째 십일조는 3년 1번의 십일조의 사용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십일조에 포함됩니다. 공동체 모임과 사역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다가, 3년에 한번은 구제를 위한 것으로 사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십의 이조’ 정도를 헌금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교인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 등을 포함하여 전체 수입의 20퍼센트 정도가 되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수입이 별도로 있지 않다면, 가족들의 헌금 전체가 그 정도 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헌금의 수치일 뿐, 이것이 율법화 되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재철 목사님 또한 십일조 헌금을 다른 교회에 바치면 안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던 일화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그러한 마음의 동기에 대해서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 동기가 다음의 두 경우에 해당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죠. 첫째, 자기만족을 위한 경우입니다.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에,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바친다고 해서 그 누구도 칭찬하거나 감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 교회, 특히 작고 어려운 교회에 바쳤을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 교회의 목회자나 관계자들로부터 감사와 칭찬을 받게 된다. 바로 이것을 즐기면서 작고 어려운 교회에
십일조를 보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아니라,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홍보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라면 십일조를 떼고 자신의 자원하는 마음대로 나머지 부분을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권면합니다. 둘째,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불신하는 경우입니다. 자기 교회에 십일조를 내어 보아야 잘못 사용될 것이 뻔하므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 안에서 다른 용도나 다른 교회에 보내는 헌금으로 사용하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경우라면, 그 당사자는 당장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십일조를 바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교회를 불신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 교회에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한 주간의 의미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십일조를 바칠 수 없을 정도로 불신하는 교회에서 드린 예배라면, 그 예배는 불신의 예배요, 그것은 한 주간을 그냥 내버리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믿고 십일조를 바칠 수 있을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헌금에 대해 설교를 할 때마다 제가 매번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마침 <새신자반>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십일조는 세금이 아닙니다. 세금은 의무를 다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는 철저히 내 소관에 있는 내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의 증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헌금을
제외한 나머지, 즉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린 후,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쓰겠다는 다짐 가운데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오죽하면 박하나 회향과 같은 조미료의 십일조까지 바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의 삶이었죠. 성전 밖에서의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질책하십니다. 헌금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해야 할 것을 다 했다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는 책임입니다. 삶이 뒤따르지 않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헌금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대가 지금 마음껏 헌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 그대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삶이란 헌금이 있다. 헌금함에 넣는 헌금은 때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그러나 삶의 헌금은 드릴수록 당사자를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 그래서 삶의 헌금보다 더 아름다운 헌금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