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뿌리 뽑힌 나무의 기적" / 강정규 목사 (2022.01.23) - 2부

2022-01-23 · 요한복음 5-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요한복음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정체를 세상에 찾아온 구원의 빛이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소개한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그분을 소개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 펼쳐집니다. 기적과 같은 사건들인데, 그것을 ‘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이 초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기적 같은 일에 아무리 놀라도 거기서 멈춘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 누구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 싶은 기적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굉장히 탄탄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글의 형식과 구조를 이해하면, 우리는 요한복음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2-4장에서는 유대인의 결혼식, 성전 제사, 랍비 니고데모,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유대의 풍습 혹은 전통이나 신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진짜 성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과 영생에 대해 말씀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영원한 생수이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만나며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어서 5-10장까지는 유대교의 4가지 절기와 관련된 내용이 이어집니다. 5장은 안식일, 6장은 유월절, 7장부터는 초막절, 10장에서는 수전절에

관련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묶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는 모두 유대교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날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절기를 허락하시며 가르치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유대 절기와 제도의 진정한 의미를 성취하고, 온전하게 성취하는 참된 메시아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5장에 나타난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6장의 유월절 내용도 다루고 싶지만, 한 번의 설교에서 다루려면 깊이

다루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안식일 사건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오늘 다루지 않는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은 네 편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미 마가복음을 통해서 다룬 바 있습니다. [매일성경 66강] 마가복음(4) _ 주님의 식탁 (막 6:30-44, 2020.3.15) 오병이어 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히 유월절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데, 유월절이란 출애굽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입니다. 양의 피를 문에 발라서 죽음의 상황에서 구원을 경험한

날입니다. 요한복음의 오병이어 사건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렵지 않은 본문이니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다음에 다른 본문에서 오병이어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 깊이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휘저어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나을 수 있다는 전설입니다. 이것이 전설인지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삶의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는 많은 환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 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바로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그는 그저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그의 삶에도 유일한 소망은 베데스다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치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설령 그 연못에 정말 그러한 신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 병자는 치유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요? 그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 1등만 치유받는 곳에서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이 1등으로 들어갈 확률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병자도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1등으로 물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런 도움을 줄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차피 그의 삶에 다른 희망은 없기 때문인지... 그는 이뤄지지 않을 꿈을 붙잡고 오늘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이런 베데스다가 있지는 않습니까?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하는 무언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데스다의 뜻을 아십니까? 베데스다. ‘자비의 집’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자비는 없습니다.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소망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절망뿐인 현실입니다. 바로 그곳이 베데스다였습니다. 어쩌면 역설이죠. 무자비한 자비의 집. 경쟁과 상처뿐인 베데스다. 그곳에 예수님이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 속에 38년 동안 고통받고 있는 한 사람.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십니다. (요 5: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낫고 싶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라고 대답할 소망조차 잃어버린 절망과 한탄이었습니다. (요 5: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낫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조차 자신 있게 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에 치여 절망 가득한 것이 그의 삶이었던 것이죠.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들고 걸어가거라.”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일어나고 걷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이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의 날입니다. 그것은 십계명에도 기록된 것이죠. 이날은 일하지 않고 안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조차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걷으러

나오지 않도록 말입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규정을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잘 생각해봅시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출근과 퇴근이 있으니 바로 적용할 수 있겠지만, 주부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일이 아닐까요? 저는 어떤가요? 저는 일하는 건가요, 아닌가요? 결국 이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일’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대 유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미쉬나’라는 자료에 남아 있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가지 노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1)바느질, (2)쟁기질, (3)곡식을 씻는 일/빨래, (4)곡식을 터는 일, (5)염색, (6)곡식을 키질하는 일, (7)수확물을 고르는 일, (8)곡식을 빻는 일, (9)체로 치는 일, (10)반죽하는 일, (11)빵 굽는 일, (12)양털을 깎는 일, (13)양털을 세탁하는 일, (14)양털을 두드리는 일, (15)양털을

염색하는 일, (16)실을 짜는 일, (17)양털을 짜는 일, (18)고리 둘을 만드는 일, (19)실을 두 가닥 엮는 일, (20)두 가닥을 분리하는 일, (21)묶는 일, (22)푸는 일, (23)두 땀 바느질을 하는 일, (24)두 땀 바느질을 하려고 뜯어내는 일, (25)사슴의 덫을 놓는 일, (26)사슴을 도살하는 일, (27)사슴의 가죽을 벗기는 일, (28)염장하는 일, (29)사슴을 염장하여 덮어두는 일, (30)가죽을 끍는 일, (31)가죽을 자르는

일, (32)두 글자를 기록하는 일, (33)두 글자를 쓰기 위하여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집을 짓는 일, (35)집을 부수는 일, (36)불을 끄는 일, (37)불을 피우는 일, (38)망치로 두드리는 일, (39)물건을 나르는 일. 이렇게 39가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의하면 이제 지키는 것에 문제가 없을까요? 39번째 조항인 물건을 나르는 일을 생각해봅시다. 물건이란 그럼 무엇입니까? 제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면 그것은 물건을 나른 것이 될까요?

나른다는 것에는 이동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 이동은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이동의 범위를 규정하지 않으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안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질문하게 되고, 거기에 대한 규정을 유대 지도자들의 전통 가운데 계속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하게 하고 싶은 것은, 이것에 대해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그들의 진심까지 우리가 함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했던 노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진심입니다. 저는 주일에 설교를 전하고 나면 이런저런 설교에 대한 피드백을 듣습니다. 설교에 대해서 진실한 사람일수록 이 설교를 어떻게 적용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그 태도는 매우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고서 그것을 어떻게 지킬까 고민했던 그들의 태도는 옳고 마땅합니다. 조금은 고지식해 보일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은 시대적 차이일 수도 있어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거의 성경책 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윗세대는 주일에 성경책을 꼭 가슴에 품고 다녔어요. 성경책은 바닥에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주일에는 돈도 쓰지 않으려 했어요. 헌금을 드릴 때는 다리미로 다리거나 은행에서 빳빳한 새 돈으로 바꿔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은행에서 그렇게 돈을 바꿔오셨고, 저희도 어렸을 때 헌금은 내가 가진 돈 중에서 가장 새것을 드리고자 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 그래서 동전의 발행연도를 보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윗세대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잖아요. 우리가 그들의 그 마음은 소중하다고 여겨야 해요. 유대인들이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은 포로기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다른 땅에 끌려가서, 성전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들에게도 남은 것은 자신들의 ‘삶’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삶의 모습이 중요한 지표가 되었어요. 삶에서 얼마나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가? 그것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한 최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의 척도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딱 떼어내서 해석하려다 보면 말 자체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 말에 담긴 말한 사람의 의도와 마음입니다. 율법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들 안에 율법이 명문화된 법처럼 작용하다 보니, 십계명의 ‘정신’은 사라지고, 글로서 작동하는 ‘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 가운데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라는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의 정신은 생명 보호입니다. 당시 집이 1층 위에 지붕은 평탄하게 지었어요. 거기서 사람이 올라가서 부주의하면 떨어져서 죽거나 다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난간을 만들라는 계명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정신에 입각해서 어떻게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기 위해 힘쓸 것인지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한 정신은 사라지고 계명 자체만 남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율법 조항은 이제 건축법에 불과합니다. 바로

그 결과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 법’은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진정한 안식을 주기 위해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안식은 누리지 못하고 일을 했나 안 했나 그것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베데스다 치유 사건에서 예수님이 어긴 법이 무엇이었죠? 사람을 고친 것이요? 아닙니다. 치유도 방법이 중요해요. 9장의 치유 장면에서는 치유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진흙을 반죽했거든요. 반죽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말씀으로 치유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어겼죠? 고침 받은 사람이 누운 자리에 깔았던 것을 들고 갔잖아요. 그것이 위반입니다. (요 5:10)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이것이 논쟁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예수님이 시킨 일이죠.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안식일 법을 어기는 행동을 지시하셨습니다. 매우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그에게

가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봐야 해요. 왜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을까요? 예수님은 트러블 메이커인가? 유대인들과 맨날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안식일에 그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자주 하세요. 예수님이 본래 성격이 좀 괴팍하거나 삐뚤어져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 골탕 먹이려고 그러셨을까요? 좀 서둘러 하루 전에 병자를 고치든지, 아니면 하루 참았다가

다음날 고쳐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 꼭 큰 논쟁과 갈등과 위험을 불러올 일을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땅에서의 잠깐 누리는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기적은 잠시 내 삶을 좋게 바꿔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생수는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그런 것이죠. 잠시 배부르게 하는 기적도 좋지요. 그러나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기적은 통로에 불과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기적으로의 초청입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펴서 제일 먼저 알려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세계와 피조물과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작이고, 그분으로부터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입니다. 그리고 3장에 가면 뭐가 나옵니까? “그런데 사람이 그 하나님의 품을 떠났다.”

바로 선악과 사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잃어버렸고 깨어진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것이 4장부터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 가운데는 계속 죄가 함께 하죠. 가인이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모습인가? 지금 내 삶이 창조주가 보시기 좋았다고 했던 그 삶인가? 성경은 ‘No’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이 창조주가 원하셨던 삶이 아니다. 이 삶을 주시고 행복해하셨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창조주가 주신 세상과

삶을 잃어버렸다. 회복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과정을 보면, 그 안에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안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단계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이것은 그분이 이 세계를 대충 지은 것이 아니라, 질서대로 계획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합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그 시작부터 달랐죠. 다른 것은

말씀으로 지으셨다면, 사람은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합니다. 즉, 사람은 진화론에서 말하듯이... 우연히 어떤 물질에서 무계획 속에 탄생한 생물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우리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지만 좋은 방향으로 진화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특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6일 동안 창조하신 하나님은 7일이라는 날까지 창조의

시간표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안식하십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인류는 7일의 자전거를 주기로 삼아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도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셨지만, 7일째 안식하셨어요. 6일의 창조로도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7일째 안식은 무엇을 하신 것이냐면, 생명이 충만한 창조를 마치신 후, 그것을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도 이 안식을 경험하길 원하셨어요. 기뻐하고 누려야 해요. 그런데 죄악된 세상은 그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약학자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일(죄를 택한 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 이상 그분의 ‘무한함’으로부터 공급받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내재적 자원으로 자기 존재의 의미와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내재적 자원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재적 자원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적 자원은 무엇보다도 ‘한계’라는 특징이 있다. 한계성의 특성은 바로 결핍이다. 예컨대 지혜가 부족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처한다. 또 사랑이 부족하여 갈등투성이인 삶을 살아야 하고, 시간에 속박됨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의 노예가 되어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심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지닌 자원만으로 살겠다고 한 인간의 실존이다.” 저는 이것을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에 비유하는데, 이분은 그것을 조금 더 큰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은 생명의 근원인 대지에서 뿌리뽑힌 나무와 같다.” 역시 저보다 스케일이 커서 생명의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라고 우리를 표현합니다. 대지로부터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도 한동안은 살 수 있죠.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고 잎이 푸르다 하더라도 그

나무는 대지에서 뽑힌 순간부터 죽음의 권세 아래 높인 것이며, 죽음의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잎이 시들기 시작하고 가지가 마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 나무가 죽음에 처해 있다는 증표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겪는 결핍과 고난도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인간은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수많은 시간 동안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자기의 삶을 확대하고 안녕을 확보하는 길을 자신의 힘으로 노력합니다. 문명의 발달이 우리의 생명을

확대하기도 합니다. 행복과 안녕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확대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예측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는 만큼, 죽음과 사고의 그림자도 커졌습니다. 산업혁명은 편리를 가져왔지만, 자연 파괴와 공해의 그림자도 가져왔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전쟁의 위협을 증가시키기도 했습니다. 유선전화에서 무선전화, 그리고 휴대폰까지 물리적으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휴대폰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자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제가 저희 아내에게, “여보. 내가 한해를 계획하기 위해 3일 정도 휴대폰을 꺼두고 기도원에서 좀 생각을 정리하고 오면 안 될까?” 착한 저희 아내는 “기도원은 가도 돼. 휴대폰 끄는 것은 안 돼.”라고 말합니다. 제가 부재중 전화가 좀 많은 편입니다. 안 그러면 살 수가 없어서 무음으로 해둘 때가 있어요. 뒤늦게 부재중에 응답하거나 연락에 답을 하다 보면, 미안함이 늘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삐삐 시절이 더 자유로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는

밖에서 친구 1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은 화날 일도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10분 기다리는 것도 우리는 분노합니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잘 ~ 사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우리 다음 세대를 향해 ‘너희의 삶이 더 행복할 거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 발전한 문명 가운데 살아갈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더 좋은 삶이 아닐 수 있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발표된 보고서를 보니까 2070년이 되면 한국 인구의 절반이 62세 이상이라고

합니다. 초고령화 사회로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수명이 늘었다는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코로나 이후 사회적 고립도’에 대해 분석한 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측정하냐면, ‘집안일을 부탁하고 싶은 경우,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경우’ 둘 중 한 질문에라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34%가 고립되어 있습니다. 역대 최고 수준입니다. 집안일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경우에도

그럴 사람이 없다는 비중이 1/3이라는 것이 저는 너무 충격적입니다. 한국의 40대 남자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왜 그럴까요? 죽어라 일하다가 정말 죽는 것입니다. 그럼 왜 죽어라 일할까요? 그렇게 일하면 잘 살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죽어라 일해서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다가, 죽는 일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문자적 율법해석으로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발달 된 문명 속에서, 그만큼 고독해지고, 그러면서 우리

삶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참된 안식을 알지도, 맛보지도, 소망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기에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샬롬’을 모릅니다. 우리의 현실은 1등이 되기 위해서 늘 경쟁해야 하는 베데스다 연못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베데스다 연못이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시는 것,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 멀어졌을 때조차,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수치를 나뭇잎으로 가린 것을 안쓰럽게 여기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분입니다. 인간들의 세상에 하늘의 생명을 허락하시고자 사람들에게 찾아오셨던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그분은 오셔서 다시 주시기 원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도 그러한 의미입니다. 너희의 삶이 내게 속하여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바쁜 삶을 살다가 분주함 가운데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일 명령이 가르치는 것은 꼼지락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생업’을 중단하는 날입니다. 내가 나의 일을 중단함으로 내 스스로 내 삶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태도를 부인하고,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기준대로

발전시키면서, 이날을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정죄하는 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동안 안식을 누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회복된 일을 보면서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이 무너지는 것에 불쾌해합니다. 여러분, 복음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찾아오면, 여러분이 세워놓은 기준들과 충돌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패배를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게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트집을 잡고 박해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여러분. 앞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그냥 만들어놓기만 한 그런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도 모든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모든 세상이 그분께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셨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오늘도 이 예배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요 5: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요 5: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 수 있는 시간이다. 내게로 나오라. 내가 너희를 살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갈급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가 되기 위해서 오셨지만, 그런 주님을 보지 못하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말하는 소망의 근원인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세상에도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것이 참 많지요.

로또와 같은 것 말입니다. 대박. 한방. 그런 한탕을 기대하며 평생을 살아간다면 어쩌면 그런 내 모습이 38년 된 병자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요? 언젠가 내게도 큰 거 한방이 올 거야. 세상은 그것을 소망하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대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돈도 세상의 것이기에 그것은 한계가 명확합니다. 돈이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줄 수는 있지만, 건강까지 줄 수는 없습니다. 돈이 거창한 저택과 집을 줄 수는 있지만, 아름다운 가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돈이 안락하고 편안한 침대를 줄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단잠까지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정말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돈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따스한 햇빛, 시원한 바람, 생명력을 주는 공기, 영원한 생명, 참된 사랑.

다 하나님이 근원 되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입니다. 내 삶에 진정한 안식과, 진정한 평안과, 행복. 그것은 오직 주님 안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찾으셨습니까? 그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주님이 찾는 것은 저와 같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런 기대를 갖고 찾고 계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태초부터

사람은 가장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요 5:40)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유대인은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씀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만 집중하다가

율법의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안타깝죠. 어쩌면 우리도 예배는 드리지만, 성경을 읽지만, 복음이신 예수님을 모른다면 그것은 주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오늘도 말씀 가운데서 저는 여러분이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진정한 근원을 발견하길 원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회도 없어서...헛된 것을 쫓아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도 찾아가서 물으실 것입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진정한 행복을 원하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러한 기적을 믿습니까? 물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크고 능하시고 초월적인 존재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 사건들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 사건이 보여주는 예수님, 그분입니다. 기적 사건 자체에만 우리가 초점을 둔다면 율법의 조항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여러분이 발견한다면 오늘 이 말씀은 생명의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뿌리 뽑힌 나무가 기대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저는 요즘에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참으로 신기한 분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비유가 참 와닿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바람을 통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바람의 존재를 압니다. 영이신 하나님도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분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들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봅니다. 저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계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주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함께 이분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하며, 그 놀라움을 바라보며 노래하며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주일, 우리의 삶에 그 놀라움을 행하실 주님이 우리를 가장 간절히 찾는 날입니다. 우리의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어쩌면 우연히 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우연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예배하는 여러분을 먼저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을 이제 마음에 품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려보십시오.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움이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를 통해서 날마다 경험되고, 증거되고,

선포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