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종말을 아는 삶 / 강정규 목사

2023-09-01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이해를 위해 애쓰는 부분이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입니다. 제가 처음에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을 때, 당시 저에게 배운 청년들의 첫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천국이 죽어서 가는 곳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니...’ 이것은 당연한 반응이죠.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천국 = 사후세계’라는 인식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세적 삶의 모습으로 그 보상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 곳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던 사람들에게, 현세적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는 것부터 하나님 나라임을 가르치고, 그것이 거듭남이고, 영생이라고 가르치고 이해시키는 것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주 월요일부터 학교가 개강하여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첫 강의이고, 신학대학 학생들 30명 정도가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절반 정도가 현세적으로

경험되는 곳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여전히 절반 정도는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에게도 제 강의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고, 누군가는 한학기를 지나며 깨닫고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죠. 그럼 하나님 나라는 현세적이기만 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 또한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 의하여 믿습니다. 저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험적으로 믿는 사람을 함부로 믿지

않습니다. 사실상 오히려 의심하고 거리를 둡니다. 그와 별개로 성경에서 약속한 미래에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저는 믿습니다. ‘이미’와 아직 중에서 ‘이미’의 하나님 나라가 현세적이고 시작된 하나님 나라라면, ‘아직’에 해당하는 기다리는 나라를 특별히 구분하여 부르는 표현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의 전제는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과 만물의 새롭게 됨입니다. 만물이 충만케 된 그 순간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아직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그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을 기다리는 그 중간의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해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성경의 모든 개념이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그림 안에서 이해할 때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초반부에 나눴던 예화가 기억나시나요. 영국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학교에서 퇴근하는데,

한 청년이 담대하게 전도하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교수님은 씩 웃으며, “에베소서 2:8에 따르면 있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8에 따르면 지금 그냥 진행 중이지. 그리고 디모데후서 4:18에 따르면 아직 못 받은 게 확실하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시제이죠. 많은 사람들도 교회에서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때로는 손들고 고백하게 하죠.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구절에서는 ‘구원을 받는’, 영어로 보면 ‘to us being saved’라고 하여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미 받았다고 했던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조금 사라진 것일까요?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죽음이 임박해서 기록한 디모데후서에는 ‘구원하시리니’라는 미래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가요, 받고 있다는 것인가요, 받으리라는 것인가요? 이것은 바울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배경 안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그도 자신의 구원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도 그에게 이미 시작된 일이고, 어떻게 보면 아직 얻지 못한 것이고, 또 받고 있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배경을 갖고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은 온통 여기 저기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책이 될 수밖에요. 저는 여러분을 계속 도울 것입니다. 이번 시리즈 동안,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고, 그 나라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그 구원에 참여한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발생하는 변화들에 대해서 주로 다뤄왔습니다. 이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우리가 다뤄보려고 합니다. 1) 거짓 종말론 먼저 다룰 주제는, ‘종말’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단’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짓거리는 사람들의 ‘불안’을 들추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입니다. 그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 ‘종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 말씀이 유명합니다. (마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마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마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제가 몇 차례 설명하기도 했었지만,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생각들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주로 이 말씀을 많은 부흥강사와 선교단체 집회 등에서 접하게 됩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느끼게 해주는 영상과 함께 설교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의 한국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사건들이나, 전 세계적 재앙을 보여주며, 이것이 난리와 난리 소문이며, 사랑이 식은 종말의 모습이라고 하면 너무 와닿는 것이죠.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완전한 오독입니다. 일단 성경해석 자체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 말씀을 하신 일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는데, 제자들과 그 성전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구약의 마지막 무렵에 바벨론 침공으로 무너졌습니다. 그 후 70년이 지나서 귀환한 백성들이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합니다. 아마도 귀환한 사람들이 최선을 다했어도, 예전의 성전만 하지 못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한참을 지나서 로마 시대의 분봉 왕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무려 80년의 장기프로젝트로 성전을 리모델링하고 확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이 상당히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라는 변방 출신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너무 멋진 건축물이었고, 그것에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성전이 파괴되어 사라진다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감람산 위에 앉아 있을 때, 품었던 궁금증을 묻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2가지 질문으로 구분되지만, 마가복음의 문맥을 보면, 제자들에게 성전파괴는 곧 세상 끝날로 이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전파괴 예언을 들으면서, 그것이 세상 끝날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기며, 그때의 징조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때가 언제이고, 그때 있을 만한 징조는 무엇입니까? 이런 세상 끝에 대한 징조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왜 ‘끝’을 알고 싶을까요? 우주 멸망, 지구 종말, 이런 키워드의 영화도 많지 않습니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죄를 지으며 살다가도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면 돌이켜 회개라도 하고 싶은 것이겠죠.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전 파괴’와 ‘세상의 끝’은 다른 사건입니다. 제자들이나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성전파괴가 되는 것은 세상 끝에 있을 일처럼 여겨졌겠으나, 실제로 성전파괴는 일어났고, 그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의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당대의 사람들과 생각이 다르셨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두 가지를 따로 설명하십니다. 위에서 설명한 ‘난리와 난리 소문, 기근과 지진 등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종말의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전파괴를 향한 예언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그러나 일상적인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것은 마치 산통과 같습니다. 산모에게 진통이 오는 것은, 이제 아기가 나온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출산은 아닙니다. 진통이 시작된 후 출산까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진통은 반복됩니다. 여기서 ‘산통’과 연결되는 것이 ‘재난의 여러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출산’이 ‘성전 파괴’입니다. 산통이 시작된 것, 즉 재난의 여러 현상들은,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파괴까지 꾸준히 반복적으로 나타날 현상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도 성전파괴 전에 많은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와 이단들이

나타났고 활동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된 것으로 이해했겠으나, 잘못 이해한 자는 세상 끝이 왔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부분까지 정확히 언급합니다. (마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예수님은 이런 일에 대해서 끝이라며 소란 떨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종말에 대해 호들갑 떨며 유난을 떠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들, 데살로니가서)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 또한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여기서 끝을 주님의 재림으로 해석하고, 재림을 앞당기기 위하여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의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3절에서 제자들이 ‘세상 끝’에 관해 물을 때, 종말을 의미하는 헬라어 ‘쉰텔레이아’를 썼지만, 예수님의

대답 중에 나오는 6, 13, 14절의 ‘끝’은 시간적인 의미의 끝이 아니라, 목표의 완성을 뜻하는 ‘텔로스’를 씁니다. 즉 원어로 보면 14절의 ‘끝’은 종말의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성전 파괴’라는 예수님이 하신 예언이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의미에 맞게 해석하면, ‘복음이 이방 민족에게까지 증언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 전파되면, 그때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갖고 지금 우리가 그 끝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하면, 의미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모든 민족’이나 ‘온 세상’, ‘천하’ 등은 모두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취로 로마의 끝인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한 것을 두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골 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예수님이 30년경에 승천하시고, 60년경에 로마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로마 전역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바울이 말한 시점은 60년대입니다. 그러자 70년에 로마의 침공에 의해서 정말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죠.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입니다.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이 성취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이런 결론을 내야 합니다. 첫째, ‘성전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40년이 지나서 온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전파괴를 말씀하실 당시 제자들에게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약속하신 다른 모든 말씀들(재림, 새

하늘과 새 땅)도, 지금 우리의 눈에는 희미하나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실현될 것을 믿는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면, 우리는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 등의 말씀을 근거로, 이제 종말이 임박했고,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 말세에 대한 징조라고 말하는 설교나 가르침을 분별하여 들어야 합니다. 종말을 가르쳐야 하지만, 종말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사실상 예수님의 승천 이후, 재림까지의 모든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종말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어떤 특별한 징조, 시기를 논하는 것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징조’가 있는 유일한 사건은 ‘성전 파괴’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일어난 일이지만, 예수님은 그 일이 어떤 사건 속에 일어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은 전쟁입니다. 재난입니다. 그래서 난리와 난리 소문, 거짓 선지자 등의 활동은 ‘징조’가 아니라

예언성취의 시작일 뿐입니다. 징조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징조가 아닌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오히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24:6) 또 너희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당황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성전파괴의 시점)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 로마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는 때는 재난이며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때는

일상에서 벗어나 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는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는 ‘징조’가 명확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정확하게 그 징조를 말씀하십니다. (마 24:15)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마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러니까

‘성전파괴’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둘로 나눠서 답을 주신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 등의 상황은 늘 있는 일이므로, 그때는 흔들림 없이 살아가고, 15절 이후의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은 이 일의 징조이니, 그때는 서둘러 피하여 화를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4-14절을 세상 끝의 징조처럼 말하고, 15절 이후 내용은 무시합니다.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정반대인 것이죠. 그럼, 예수님은 ‘세상의 끝(종말)’에

대해 묻는 제자들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하셨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대한 특징은 이것입니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마 24: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냈다.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전파괴’에는 명확한 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움직이면 됩니다. 그러나 ‘주의 재림’에는 징조가 없습니다. 재림은 예기치 않게 일어납니다. 2) 요한계시록 6장의 해석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복음서 외에도, 비슷한 연결성을 보여주는 본문이 사도 요한이 기록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여러 상징과

환상이 나오는데, 6장에는 ‘인 재앙’이라고 하여 여섯까지 재앙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번째 재앙은 최종적 재앙으로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전까지 역사안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재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막 13:7 이하, 24 이하 계 6장 1 전쟁(난리) 전쟁 2 국제적 투쟁 국제적 투쟁 3 지진 기근 4 기근 사망과 음부 5 박해 박해 6 해와 달이 어두워짐; 별이 떨어짐;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림 해가

어두워짐; 달이 붉어짐; 별이 떨어짐; 땅의 권세자들과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림 앞서 언급한 복음서의 내용처럼, 성전파괴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산통이 계속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에서도 일곱째 재앙이 있을 때까지 재앙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 패턴이 예수님의 설교에 나타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성전파괴의 징조가 아니었다는 복음서의 가르침처럼,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여섯 인의 재앙’들은 수없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하여 재림이 왔다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에 해당하는 재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세상에는 여러 재난은 일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8과 마가복음 13:8에 나오는 ‘재난의 시작’이 ‘진통’이라고 한 것은, 진통의 특징은 그 기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진통이 몇 번 있어야 아이가 태어날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통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 확실해진 것이냐면,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점입니다. 메시아는 이 땅 가운데서 악의 세력들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고 심판하시곤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끝이 온 것은 아닙니다. 어떤 현상들을 보며, 조급한 마음을 갖거나 너무 들떠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탄원할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십니까? 그러나 이러한 탄원은 재림의 때를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내하며 성실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성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예언과 약속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초점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3) 종말에 대한 가르침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징조를 보고 극적인 회심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삶은 항상 준비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의 가르침 뒤에는 종말에 대한 짧은 비유가 이어집니다. (마 24: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마 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마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주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고, 위선자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5장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유들이 등장합니다. 이 비유들은 ‘재림에 대해 준비하라는 교훈의 비유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부터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가 앞부분에 등장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잔치(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구원받았다고 끝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 재림까지 우리의 삶은 소중합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뒤이어 등장하는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인의 돌아옴까지 우리는 맡겨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달란트는 ‘특권과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곧 이 세상을 떠나시고 제자들만이 이 땅에 남겨지게 됩니다. 참된 제자라면 가만히 앉아서

재림의 주님이 다시 오심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이 땅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소명’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에 무책임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비유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맡기시는 책임의 크기를 정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주권입니다. 목회자에게도 성도에게도 각자의 분량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책임이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좋은 고백일 수 있으나, 때론 정말 무책임한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기대 안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종은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나라에 속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주를 닮아가는 과정 가운데 온전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고 부활도 있을 것입니다. 주의 재림 때까지,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는 ‘기다림’이라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이 기다림은 단순히 무의미하고 공허한 ‘지연’과 ‘연착’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① 신실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24:45-51), ② 열 처녀의 비유(25:1-13), ③ 달란트 비유(25:14-30) 세 비유에서 주인이 오는 시기는

각각 다릅니다. ① 종의 예상보다 주인이 일찍 오기도 하고, ② 처녀의 예상보다 신랑이 늦게 오기도 하고, ③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주인이 오기도 합니다. 세 비유에서 각기 다르게 표현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다림의 시간을 우리가 함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이것은 우리의 삶을 마치는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내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주어진 삶 안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요? 열 처녀 비유

중 어리석은 처녀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실제보다 ‘쉽게’ 생각했기에 실패했고, 달란트 비유에서 악한 종은 실제보다 더 ‘힘들게’ 생각했고 안일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며, 이제 그 미래를 바라보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모든 비유가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하나, 우리는 신실하게, 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나의 일을 하는 것. 세상이 시끄럽게 난리가 난 것처럼 떠들며 ‘이거 해야 한다, 저거 해야 한다, 이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여도, 나는 잠잠히 내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주님을 정말 알고, 주의 진리 위에 서 있는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 다해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