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옥정 사귐의교회 주일 예배 설교 / 이사야 11장 /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 강정규 목사

2020-08-02 · 이사야 1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하나님의 진리 등대 /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 성도여 다함께 축복송 영상 우리는 선지서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무거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방법을 정확하게 다 담아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제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개미 이야기’입니다. 개미들이

있습니다. 개미들이 걸어가는 길에 웅덩이가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면 개미가 죽을만한 상황이에요. 제가 개미한테 외칩니다. “야 너희들 거기로 가면 안 돼.” 그런데 개미들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계속 그쪽으로 갑니다. 제 언어를 알아듣지를 못하죠. 그래서 제가 개미를 구하고자 개미들 앞에 막 장애물을 놓아서 그길로 가지 못하게도 해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제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제가 그 개미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내가 개미가 되어서 개미의 언어로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개미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것과 유사합니다. 어쩌면 그에게 우리는 그냥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고, 우리를 살릴 방법을 늘 고민합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주어도 그들이 그것을 따르지 않으니, 그는 선지자를 보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죠. 때로는

장애물과 같은 고난도 주셔서 우리가 깨닫고 돌이키기를 바라시죠.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자, 그는 직접 인간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죠. 저는 개미처럼 낮아지는 것을 그렇게까지 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지만, 그는 그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은, 그가 우리와 함께 꿈꾸는 것이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성경은 말하죠.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 설계도>와 같습니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그 나라의 설계도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과학 세미나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 과학세미나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게 될 거에요. 아무것도 없었던 무의 상태에서 하나님은 에덴이라는 세상을 만드십니다. 창조기사가 그것이죠. 창세기의 7일 창조는 이 땅을 만드시는 과정을 설명하시는데, 그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1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자연은 그 질서의 결과 아닙니까? 빛을 창조하셔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 바다와 육지를 나누시죠. 해달별로 24시간과 계절을 구분하시며 그 안에 질서를 주시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와야 하는 것이죠. 이

자연의 질서가 한 치라도 어긋날 때, 재해가 오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의 일부인 동물들이 그곳에 나타난 재해를 누구보다 빨리 깨닫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질서는 자연세계에도 주어졌고, 우리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질서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질서죠. 사람과 자연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피조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job’을 주시잖아요.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포인트는 ‘형상’이죠. 고대세계에서 왕들은 자신의 통치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먼 지역에 자신을 닮은

석상을 세우고, 그것으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드러내는 대리자와 부왕의 역할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그 질서 안에서 세상에 생육하고 번성하여서 땅에 충만해지고 모든 피조 세계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주시죠. 그것이

약속입니다. 땅을 통해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가 먹고 살기에 충분한 세상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일’을 통해서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도록 하나님이 세팅하셨죠.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우리는 땅을 경작하고 지키는 사며을 받은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땅을 통해서 우리가 필요한 부분을 얻도록 그렇게 모든 질서를 잡으신 것이죠. 노동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불로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질서에 어긋난 행위인 것이죠. 그런데 죄가 들어오죠. 죄는 질서를 깨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질서를 깹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나, 죄 이후에 하나님을 피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죠. 2) 사람 사이에서도 질서가 깨집니다. 죄 앞에서 서로가 핑계합니다. 창세기에는 분명히 그러한 질서의 뒤틀어짐이 죄 이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고통을 통하여 출산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처음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을 때는 이러한 고통 없이 출산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가 요즘에 자녀 낳기를 포기하는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사실은 출산 이후에 키울 걱정을 많이 하죠.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과 상당히 달라진 그러한 모습일 것입니다. 적어도 자녀 키울 걱정은 없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3) 사람과 자연 사이의 질서를 깹니다. 창세기의 기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는 있겠죠?

죄가 오기 전에는 사람과 뱀이 말을 했나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과는 다른 좀 더 친밀한 소통의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연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도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자연세계는 더 이상 인간에게 만만하지 않은 곳이 됩니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마도 그 전에는 조금만 돌보면 될 정도로 자연은 풍요롭고 인간은 그것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땅도 저주를 받아서 농사도 쉽지 않아지고, 인간은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땅의 소산을 맛보는

것으로 바뀝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지금처럼 열심히 가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과실을 풍족하게 맺어서 인간은 그냥 그것을 따서 먹는 수고를 하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땀 흘리는 수고 없이... “사과나무야 잘 있었어?” 그러면 사과나무가 인사하며 사과를 내어주고, 땅도 질서 가운데 완전하게 유지되어서 원하고 필요한 것은 다 공급되어지는 그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 높이 있는 것은 “기린~ 나 저것 좀 따줘~” 하면 되고, 독수리

시켜서 저쪽 산에 있는 것 가져오라고 하고. 그리고 에덴에서는 육식이 없었죠. 이 부분을 아쉬워하시는 저와 같은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아마도 육식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충만한 영양분의 공급이 있었겠죠. 고기 먹는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고기보다 땅의 소산물들이 맛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린 다 모르죠. 우린 죄로 인해 무질서한 세상을 물려받았으니까요. 4) 자연과 자연 사이의 질서도 깨집니다. 일단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유해한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전에는 자연도 서로 돕고 돕는 완전한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마도 죄로 인해서 육식동물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연세계 전반에 서로를 파괴하는 모습이 생겨났다는 것이죠. 약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뉴 노멀(New Normal)’이 된 것입니다. 먹이사슬. 이런 우리에게 당연한 용어는 사실 죄악 이전에는 없었던 이야기인지도 몰라요. 죄악시대 이후에 모든 질서는 완전하게 달라집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자연도 인간을 파괴합니다. 세균이 인간의 질병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균을 만드셨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만드셨다면 필요한 모습으로 무해하게 만드셨을텐데 변질된 것이겠죠. 코로나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벌한 것이다.” 오랫동안 생태학자들이 기후변화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굉장한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했죠.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미래학자가 말하는 것이 있죠. 190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이 지구상에서 차지하고 있던 땅이 14%랍니다. 2000년대에 인간이 거주하거나 사용하는 땅이 77%가 됩니다. 동물들이 사용하고 있던 공간을 인간이 다 차지하게 된 것이죠. 오랜 세월 동물들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던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인간세계로 넘어온 것이 코로나 19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코로나 19는 지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백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인간의 활동이 정지되자마자 자연세계가 여러모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을 지키고 보존하는 사명을 잘 해왔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설교를 통해 전하는 것은,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시대에 대한 비전이 나오거든요. 죄악으로 가득한 남유다의 타락과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으로 가득 차 있는 이사야서에 한줄기 소망의 빛이 비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지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죠.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즉 이것은 다윗의 가문을 통해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신 것을 말하는 것이죠. 현실에서 다윗 왕조는 파국적인 모습입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다윗의 후손인 아하스 왕은 앗수르에게 완전히 빠져서, 그들의 제사 양식까지 가져와서 유다를 우상숭배 가운데 빠뜨리고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셨죠. 그래서 다윗에게 약속을 주시죠. (대하 7:18)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이것이 그 유명한 다윗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다윗에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죠. 실제로 여로보암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에도 다윗 왕조는 망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유다는 다윗 왕조가 있는 한, 우리는

괜찮다고 여긴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언약은 무조건적인 언약이 아니라, 잘 읽어보면 세부조항이 있는 언약이었어요. (대하 7:17)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명령을 지켜 행하면... 다윗과 같이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조가 그랬습니까?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그런 모습이었어요. 다만 하나님이

한번은 더 참아주시는 것이죠. 솔로몬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잘못했을 때 바로 벌하지 않고 참으시는데, 그 이유가... “네 아버지 다윗 봐서...” 이들이 밟고 살아가는 가나안이라는 땅도 마찬가지죠.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비전을 담은 설계도라면, 그 나라를 꿈꾸며 모델하우스로 주신 것이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이 땅 가운데 만드신 것이 이스라엘이고, 가나안 땅인 것이죠. 그러므로 에덴동산과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게

될 가나안은 유사한 곳으로 표현됩니다. 에덴동산 가나안 지리적 조건 강이 흐름(창 2:10) 젖과 꿀이 흐름 (민 13:27), 풍부한 물 (신 8:7) 생산물 다양한 보석들(창 2:11-12) 다양한 광산물 (신 8:9) 식물 다양한 유실수들(창 2:9) 풍성한 과일들 (민 12:23; 신 8:8)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산책하심(창 3:8) 하나님이 함께하심 (신 11:12) 출애굽한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시작할 그 백성들이었죠. 에덴동산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1세대는 거르십니다. 그들의 불순종의 모습으로는 이 땅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데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죠. (수 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수 21: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으니, 이제 그들에게 ‘안식’이 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창조 때 주님이 하신 것과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계도를 주셨던 것처럼, 이제 모델하우스를 세우는 것이죠. 그런데 여호수아는 절반은 정복이고 절반은 땅 분배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모든 땅 분배까지 하시고, 하나님은 이제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땅’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사실은 땅의 분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읽어야 합니다. 저는 땅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땅을 모든 사람의 삶을 위해 나눠주셨어요. 공공재입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가 들어오며 이 땅을 갖고 경쟁하고 다투고 욕심을 부립니다. 현대사회는 더 하죠. 땅과 집이 거주를 위한 기반이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그 이상의 부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 언급한 ‘불로소득, 자연보호, 땅의 문제’ 등에 대해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기준을 찾아야 합니다. (수 21: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가나안 땅에 입성하고 땅 분배를 하신 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씀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워가면서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질서를 세웠어요. 시내산으로 먼저 부르신 목적이 거기에 있죠. 거기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하셔야 할 일이 있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세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을 여호수아의 때에 다 이루셨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은 다 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뭐가 남습니까?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의무. 하나님이 꿈꾸시는 그 나라의 모습을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땅에서 그렇게 살지 않아요. 이들은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처럼 가나안 땅에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서도

이들은 쫓겨나게 됩니다. 다윗의 후손? 약속대로 살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보호하실 리 없죠. 다윗의 후손인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게 두 눈이 뽑혀서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지으신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하게 무너집니다. 다윗왕조는 망하고, 성전도 무너지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망하게 되는 것이 이들이 자초한 죄악의 결과입니다. 결국 이사야서도 그것을 이야기해요. 너희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심판의 메시지를 비집고 하나님은 소망의 빛을 비취고 계신다는 것이 중요해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끝났다고, 내가 끝난 것은 아니야. 내 계획이 다 무너진 것은 아니야. 나에게는 방법이 있고, 나에게는 계획이 있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다윗과의 언약. 너희는 비록 어겼으나,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이룰 것이다.” 말씀하시죠.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심판의 책에서 꺼내든 하나님의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직 구약에는 그 정확한 이름은 등장하지 않기에, 구약에서 우리는 그 약속한 분은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이죠. 우리말로 하면 ‘구원자’입니다.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서 하나님은 구원자를 계획하시고 약속하고 계시죠. 메시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는 여호와의 영으로 무장되었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질서대로 성실하게 다스리실 것입니다. (사 11:2)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사 11:3)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사 11:4)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사 11:5)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에덴동산인 설계도이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가나안 땅이 모델하우스라면, 바로 메시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이 땅에 임하는 그 나라를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통치하고 다스리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이미 왔습니다.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야구의 표현대로 설명하자면, 이미 타자가 홈런을 쳤습니다. 그러나 아직 1-2-3루를 돌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서 그가 다시 홈으로 들어오면 끝납니다. 그 끝에는 승리 팀과 패배 팀의 결과가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사실 홈런을 친 순간 이미 그 승패는 결정이 난 것이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그 승리의 결과에 참여해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마지막에 이뤄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의 가사이죠. 1)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2)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하나님이

설계하고 계획하고 기다리시는 그 나라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다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서가 보여주는 그 비전을 보면서 한 가지는 명확히 알 수 있어요. 주님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나라. 주님이 태초에 꿈꾸셨던 그 나라. 죄로 인해 망가지기 전의 그 상태. 주님의 계획은 영원하고 그 나라가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뉴 노멀. 지금 우리의 사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겼던 것은 옛것이 되고 새로운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 이제 이것이 노멀이라는 얘기는, 우리의 기준이 여기에 맞춰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의 영적 기준은 태초부터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획인 <하님의 나라>에 있어야 합니다. 그 질서의 회복, 그 정의의 회복에 있어야 합니다. (사 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죄악의 모습에서 벗어나 주님이 뜻하신 나라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 땅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모든 경쟁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가운데 모두가 주님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아름다운 자유에 관한 시와 노래는 항상 자유가 없는 억압된 환경 가운데 터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가득하게 된 계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고난에

직면한 포로기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이 땅의 지도에서 사라져서 로마의 속국이 되어버린 그 때,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늘 절망하고 좌절케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이 삶이 끝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말씀대로 살겠다고 포기하고 희생하고 고난을

견디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신실하게 이뤄진 것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과 소망이 있기에 오늘은 우리도 그것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그냥 지나가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앞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준에서 어긋난 것들은 회개함으로 나아가시고, 주님 앞에 옳은 모습은 끝까지 믿음으로 변치 마십시오. 세상은 이것이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면, 공의롭고 성실하신 주님께서 그의 나라에서 반드시 여러분을 따스한 품으로 맞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찬양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을 우리에게 주셨고, 주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죄로 인해 망가진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며 주님을 노래하며 나아갑시다. 승리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