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약함과 악함 사이" / 강정규 목사

2022-04-10 · 요한복음 17-1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교회의 절기로 보자면,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는 한주의 첫 시작입니다. 이번주간은 고난주간으로 보내고,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일입니다. 저희도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를 진행하며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금요일 기도회 시간에는 ‘풍삶첫’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 바로 전에 해당하는 17-18장에 대한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맛보고자 합니다. 1.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 내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는가? 무엇이 내게 소중한가? 이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지표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시간입니다. 내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가 중요하죠. 또한 물질도 그렇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경우가 많죠. 우리의 언어 또한 그렇습니다. 내가 요새 제일 많이 말하고 있는 주제가 내 관심사일 것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나? 누구를 위해 기도하나? 이 안에서 우리의 내면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가장 긴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예수께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바로 제자들을 위한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예수님의 선지자적 중보기도”(Jesus’ Prophetic Intercession)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사랑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또 자신에게 속한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1) 첫 번째 부분(1-8절) :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제자들의 구원을 위한 영광을 구하는 기도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이 부분에서 기억할 것은 ‘무엇이 영광인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때는 이제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나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개발하고 만든 사람도 그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잘 작동하게 되어 그 특성을 뽐낼 때 벅찬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을 ‘에어컨’이라고

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02년 미국의 윌리스 캐리어가 발명했지요. 실제로 뜨거운 열대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유익을 주고 있는 것이죠. 아마 그 사람들은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에게 매우 고마운 마음이 있을 것이고, 에어컨을 만든 사람도 에어컨이 그 목적대로 사용되어 많은 이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바라보며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모든 순간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버지께도 영광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은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사는 방법입니다. 2) 두 번째 부분(9-19절) :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보존해 주시기를 위한 기도 (요 17: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4절과 16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에 속했고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난 다음부터 세상에서 살기는 해도,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이 길이 나아가는 방향이 옳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걸어가며 보여주신 길이고, 따라오라고 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분이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구나’ 여기시고 기뻐하십시오. 3) 세

번째 부분(20-26절) : 제자들의 하나됨과, 그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게 될 미래의 제자들과, 그들이 형성할 우주적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기도 (요 17: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이-고견’이라면,

그것을 피하거나 이길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할 것 같은데, 주님은 하나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중요한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세상에서 서로를 붙잡아주고 의지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견뎌 낼 수가 없으므로 예수는 그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하나 되는 것은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듯,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를 사랑하십니다. 쉽게 말해 주님의 교회, 주님의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반대로 우리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이 우리를 넘어뜨릴 때, 그럼 무엇을 공격하겠습니까? 하나 된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를 깨놓고 공동체성을 무너뜨리면 각개격파 당한 기독교인들은 줄줄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즉, 우리의 힘과 우리의 약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줄곧 성장해오고 있으니까 우리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정말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있습니다. 크게 2가지 현상입니다. 일단 젊은 세대가 교회에 현저히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이든 성도와 목사님만이 남아있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런 교회들은 목사님이 은퇴를 할 때쯤 되면, 사라지거나 다른 교회와 합쳐서 교회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보더라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가 교회로 유입되는 수보다 많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줄어드는 일들이 많습니다. 개척한 교회들도 이미 여럿 사라졌습니다. 이미 전망이 어둡자, 신학교에는 사람들이 가지 않습니다. 과연 10년 후, 30년 후의 교회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외적으로는 분명히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하나됨 속에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이 이 안에서 경험되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리고,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출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참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우리 교회 공동체가 너무 좋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공동체의 안쪽만 보고 있으면 결코 안 됩니다.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 안에 아버지의 사랑으로 무장하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좋으니까 ‘우리만 이것을 누릴거야’가 아니라, 우리는 항상 아직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위한 삶이 무엇일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품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삶을 사셨듯이, 우리들도 깨지고 상한 세상을 회복하고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으로 못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마지막 명령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여 보다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17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7: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요 17:23)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놀랍게도 전도와 선교로 이어집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를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죄악 된 세상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모두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며 선물입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을까요? 말씀 안에 다 비결이 있습니다. (요 17: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령님이 있는 것이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성령을 약속해주셨잖아요. 우리 안에 진정으로 성령이 주인 되어 계시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하나 되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가 있죠. 그것은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풀어낼 방법은 성령님의 주인 되심을 따라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둘 모두 그것을 거부하면 갈등은 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즉, 지난 설교의 말씀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과 명령’이라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 17장은 그들을 향한 진심 어린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제자들을 향한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2. 제자들의 실패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기도와 달리 제자들의 현재 상태는 아직 미성숙해 있었습니다. 18장부터 그 내용이 나오죠. 일단 예수님에 대한 2가지 배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제자 유다의 배신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에는 정치적 욕망이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어떤 바가 있어서 예수를 따랐으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보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자, 예수를 배신하고 돈을

받고 팔아넘기게 되었다는 것이죠. 정치적 욕망의 부분은 성경에 드러나 있지는 않기에 확증할 수는 없으나, 유다 안에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러분. 저는 가룟 유다가 참 안타까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예수님의 신임을 받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재정을 맡긴다는 것은 신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자와 사도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구분됩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로서

꽤 많은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무리가 있고 그중에 제자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중에서 12명의 사람을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 사람들이 제자들 중에서 리더로서 훈련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소그룹을 이뤄 친밀한 교제가 가능한 맥시멈을 12명 정도로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죠. 즉, 가룟 유다는 예수님 곁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며 배울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뜻을 바꿀

기회도 주십니다. (눅 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눅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예수님은 유다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경고를 하십니다. 유다는 배신을 해야 하는 숙명이 있기에 어떻게든 배신을 하게 될까요? 저는 유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기회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2절이 말해주듯,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 섭리에 따른 사건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유다라는 특정 인물이 배신하도록 예정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달을 수 있을 때 깨달아야 합니다. 더 가면 안 되는 ‘멈춤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신앙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무너짐이 있고, 회개하거나, 회복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주님이

마음 주시는 그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내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넘기고 맙니다. (요 18:3) 유다는 로마 군대 병정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유다의 배신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더 크게 아프게 한 것은 두 번째 배신, 즉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배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면 유다는 진심으로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모습은 많지 않았잖아요. 어쩌면 예수님 주변에서 늘 고민하며 주저했던 것이 유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그렇지 않죠. 예수님이 세족식을 하실 때는 온몸을 씻겨 달라고 했던 것이 베드로요, 예수님이 마지막 설교를 하며 떠날 것을 암시하셨을 때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 베드로입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는 명실상부한 제자들의 대표였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고백하던 것이 베드로였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가끔 은혜받으면 “내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하겠습니다”라는 거짓말을 할 때가 있듯이 말입니다.

제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지 아시고, 예뻐하시죠. 저는 우리가 ‘약함’과 ‘악함’ 사이에 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함을 핑계하고 방치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악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도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을 따르는 일에 완전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며 실패했던 사실은 잘 압니다. 그보다 우리가 오늘 말씀 가운데서 조금 더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왜 실패했는가입니다. 실패를 잘

분석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마음이 정말 강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적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당황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어떻게 합니까? 가지고 있던 칼을 꺼냅니다. (요 18:10)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의 마음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오히려 예수님이 나아가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들을 물리칠 능력이 반드시 있을 테니, 자기가 먼저 행동대장처럼 나서면 예수님도 능력을 보여서 대적을 물리치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시고 그대로 끌려가면서부터 베드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도망갔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잡혀간 예수님이 있는 대제사장의 집으로 갑니다.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이 베드로를 추궁합니다. 아마 보통 때라면 호탕하게 반응했겠죠. 하지만, 자신이 예수님 믿고 기세등등했었는데, 자신의 대장인 예수님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잡혀간 것을 봤으니, 모든 혈기가 잠잠해지고 두려움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중에는 베드로가 귀를 자른 말고의 친척도 있었는데, 그가 묻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너를 보았다.” 결국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다’라고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인데요. (눅 22:61)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다. 이 순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이 났을까요? 거기서 예수님을 놓고 도망친 그는 통곡합니다. 그 통곡 속에서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제 생각에는

‘후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무력감’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 결단, 각오를 지키리라 자신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배신했습니다. 구약의 다윗은 어떠한가요? 그는 자신이 그런 큰 범죄를 저지르는 왕이 되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무너집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리스도는 묵묵히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향해 나아가시지만,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실패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진심 어린 고백을 드리는 것도 우리지만, 그러나 그 고백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여정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내 삶에 있는 실패를 그냥 실패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딛고 주님께로 나아갈 것인지는

아직 우리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에게로 와서 먹고 마시라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초청은 모두를 향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를 향한 구원의 사역을 주님이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길은 주님이 내어주셨어요. 그것을 믿고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난주부터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세요. 여러분의 연약함이 있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딛고 나아오기를 기대하시고, 그것을 돕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여정에서도 예수님은 온통 그뿐입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것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언약 백성의 죄를 사하는 것이었지요. 그것을 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이상한 짓이나 하고 있습니다. 칼을 들고 설치려고 하는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제자들)은 물러가게 하여라.” (요 18: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셔서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는 사명을 이루려 하십니다. 아직 미성숙한 제자들을

위해 걱정하며 기도하시고, 또 끝까지 보호하시려고 하며 나아갑니다. 미성숙한 상태. 이것이 약함이죠. 여러분, 모두가 단번에 성숙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우리의 약함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함을 훈련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약함’을 핑계 삼고 그것을 내버려 두면 그것은 곧 ‘악함’으로 가버립니다. 사울 왕 또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에도 그의 약함이 나타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사무엘을 통해 그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훈련하며, 회개와 결단을 통해 넘어서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약함에서 악함으로 가버렸습니다. 다윗. 그 잘나가던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악함일지 약함일지 구분되지도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잘못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감추어진 그의 잘못을 드러내십니다. 나단을 통해서 다윗의 모든 범죄(간음, 살인 등)를 깨닫게 하신 그 순간이 그가

악함의 길로 가느냐를 결정하는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돌이킵니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그 죄를 극복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유다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주님께로 온전하게 향하지 못했습니다. 끝내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하며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실패한 제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동일하게 실패의 길로 가고 있던 사람이 베드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주님께 보였던 사랑의 열정은 곧 자책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죠. 아마도 베드로의 내면에서 정죄함으로 베드로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짓눌렀을 것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마지막에서 3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3번 물으심으로 만회할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베드로도 변해있음을 보게 됩니다. 늘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그 물음 앞에 함부로 답을 못합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물음 앞에 그는 예전처럼 “당연하죠” 말하지 못하죠. 그는 세 번째 예수님의 물음 앞에 근심하며

자신 안에 있는 진솔한 고백을 드립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자신의 고백으로,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깨달은 베드로. 주님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함부로 약속드릴 수도 없는 그 베드로의 아직은

연약한 마음을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능력을 주셔서 그 약속대로 살게 하시는 것은, 이제 그의 삶에 진정한 주인 되시는 성령에 의해서임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함’ 가운데 있는 내 모습은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핑계로 삼는 것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룬다는 것은 약함을 느끼는 만큼, 성령님의 도움을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단련해 나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반드시 돕습니다. 그리고 약함을 극복하면

바로 그것이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존경할만한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의 약점이 고스란히 소개됩니다. 베드로의 약점, 바울의 약점, 다윗의 약점, 모세와 아브라함까지. 모두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이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약함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약함을 핑계삼고 약함 가운데 끝까지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악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약함을 모두 하나님 안에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딛고,

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나아가고자 힘썼습니다. 적어도 방향은 흔들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주님을 위하여 한걸음씩 가고자 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바로 그것을 돕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의 최종적 결론은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서 약속하셨던 성령으로 귀결됩니다. 그분은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보혜사가 되어주셨던 예수님은 아직은 연약함 가운데 머물러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며 하나 됨을 통해 주님의 사명을 다하길 기도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혹은 우리의 악함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내고 싶어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요한복음 14, 16장과 더불어 로마서 8장을 묵상해보시길 권합니다. 지난주에 제 삶에 ‘약함’에 허우적대던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저를 그때 살린 말씀이 로마서 8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오늘

요한복음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제자들이 부러우신가요? 우리도 우리를 사랑으로 도우시는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그는 도와주십니다. 기도할지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약함과 여러분의 악함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것 여러분 힘으로 감당 못 합니다. 가만두면 곪습니다. 사탄은 계속 그것으로 여러분을 정죄할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깨끗하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반기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조하는 성난 군중이 됩니다. 어쩌면 그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아직은 연약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연약함을 감당하시며 그것을 돕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 한 주간, 그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앞에 거해 보십시오. 내 연약함이 발견될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고난주간 우리가 함께 나누고픈 찬양을 드리며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고난주간에 저는 이 찬양을 참 많이 불렀습니다. 원래 저는 이 찬양을

부를 때, 인간들이 배신하고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마음이 아프셨다고 생각을 하며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조금 생각이 달랐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아픔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그 무지한 사람들의 연약한 모습에 대한 것이 아닐까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셨고, 다 이루셨고, 이미 길을 내어주셨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연약함에 대한 안타깝고 긍휼한 마음이 아닐까

묵상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마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릴 수 있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