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샬롬. 반갑습니다. 어제 우리가 수요 묵상 기도를 드렸습니다. 네. 또 현장에서 같이 하신 분은 뭐 현장 잘 했지만 또 못 오신 분들은 영상으로 이것을 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어제 사실 저희가 찍은 영상이 음향의 이슈가 있어서 원본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어제 밤에 제가 핸드폰으로 녹음한 음성 파일을 영상에 입혀서 그것으로 이렇게 대체했는데 아무래도 그것도 또 아쉬워서 아이 내용이 어 그 5장의 내용이었잖아요.이 이 내용은 또 성도님들이 어
그냥 혼자 묵상하기에는 놓칠 수 있는 부분도 많고 그 나름 또 잘 그래서 나누고 싶은 마음이 준비했는데 아 또이 영상이나 이런 분에서 아쉬움이 있다 보니까 아 이것을 가지고 어 계속 공부하고 또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그래도 다시 한번 좀 찍는게 좋겠다라고 해서 이렇게 제 방에서 어 녹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 어제 메시지 혹시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분이나 또 참여했던 분이나 이것에 다시 한번 고린도서 5장의 말씀이 우리 공동체 어떻게 적용되어야지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묵상하고 있는데 지난 수요일 날 우리 영상 메시지를 통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 서론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뤘잖아요.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목양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어요. 여기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그런 주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분열 성적인 타락과 몸에 대한 것들 또 우상에 받쳐진 고기 문제 이런 것을 해서 다섯 개 정도의 주제를 크게 어 멀리서 이거에 대해서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근데 지난주에 우리가 다뤘던 굉장히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 뭐였냐면요. 종종 우리는 교회 아니나 성도들의 삶에서 이런 실질적인 문제를 마주할 때 이것에 대해서 실용적인 어떤 해결책을 말해 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런 어 부분에서이 고린도전서의 문제 다루면서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그들에게서 먼저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을 마주하다 보면 이 문제는 늘 두 겹의 어 그런 두 겹으로 보여지는 것들이 있어요. 하나는 그 사건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 혹 그 사람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어떤 어 상황 이런 것이죠. 근데 다른 하나는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갈등이 생각되다면 갈등도 다뤄야 되지만 그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경우에이 사람의 어떤 영적 상태가
또 거기에 기인하게 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회하다 보면 둘 다뤄야 돼요. 아무리이 사건 자체를 잘 다뤄도 그 사람에게 있는 근본적인 어떤 영적인 부분이 잘 다뤄지지 않아서 거기에 대한 것들이 회복되거나 변화되지 않으면 사실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될 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의 굉장히 중요한 특징은 바울은 지금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목양을 하면서 각각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려는 인간적인 해결책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함께 다루고 싶어 합니다. 왜냐? 그것이 진짜 회복에길 진짜 해결이기 때문이에요. 특별히 오늘 5장은요. 교회 공동체 측면에서 우리가 이런 문제 앞에서 근본적으로 붙잡아야 될 진리가 무엇인지를 매우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한번 5장의 말씀을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먼저 5장 1절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방 사람에게도 흔히 나타나지 않는 어떤 어 방만한 모습, 성적으로 그냥 타락한 모습 이런 모습이 있다라는 것을 제기합니다. 즉 고린도교회 안에 굉장히 이런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이걸 꺼내 놓고 이거에 대해서 다루기보다 이보다 좀 더 어 바울이 다루고 싶은 진짜 이 5장의 초점은 다른 데에 있어요. 이어지는 2절부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것을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지금 바울이 그 음행한 자의 음행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5장 1절을 그렇게 시작했지만 5장 2절은 그것을 교회가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즉 1절에 나오는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교훈을 위해서 이 5장을 쓴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 교회의 관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교만해졌다는 것은 여러분이잖아요. 교회입니다. 음행을 저지는 사람이 교만해졌다는게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고린도교의 태도가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러한 죄를 버젓이 옆에 일어나고 있는 그 죄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교만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학자들은 그것이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는 잘못된 이해 교만이한 것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거죠. 잘못된 이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 나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는 은혜 안에 있는 존재야. 아 그러니까 어 사실 내가 하나님 믿는다는게 중요하지. 내 행동이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 이런 태도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잘못에 대해서도 아, 이런 거 그냥 은혜와 사랑으로 품어 줘야지 된다라는 자기들 생각에 빠져서 그것이 옳다라는 확신에 빠져서 방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착각이고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로 표현하면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이런 어떤 잘못이 있어요. 그 거기에 누구가 와, 우리는 판단하지 말아야지.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명백히 보여지는 죄를 다루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함께 망하는 것이라고 지금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제가 목양 교육을 교회에서 가끔 하는데 공감과 동의에 대해서 구분할 것을 종종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누군가 이렇게 자기가 혹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관계 안에서 상처를 받았어요. 그
상처를 나에게 이야기합니다. 그 상처에 대해서 내가 마음에 대해 공감해 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아, 너 굉장히 속상했겠다. 이렇게 얘기해 주는 거 필요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 공간과 조금 다른게 동의인데 동의는이 사람이 하고 있는 주장과 행동에 대해서 내가 편들어 주는 거예요. 아,이 사람이 어, 어떤 관계 안에서 어떤 이 사람이 뭐 잘했든 잘못했든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거에 대해서 위로해 주는 말은 필요할 수 있어요. 그 공감이에요. 그러나 이 사람이 지금
혹시 자기 기준에서 뭔가 잘못 보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위로해 준다고 동의해 주게 되면 이 사람이 잘못 엇나간 그 방향으로 더 엇나갈 수 있기 때문에 동일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감정에 대해서 우리는 만져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받은 자의 상처로 인해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서도 이상한 잘못된 방향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어이 사람이 굉장히 오해하면서 공격하고 있거나 공동체 공동체 향해서 비방하고 불평하고 있거나
이런 어떤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다 옳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약에 그것에 대해서 위로해 준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마치 그것이 오라라는 사인을 주게 되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과 함께 같이 죄에 빠지는 것이고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더 죄에 빠뜨리는 걸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하는 행동이 내 형제의 죄를 그러므로 부추이게 되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쩌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오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러한 현상에 대해서 통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공동체라면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 죄에 어떤 빠져 있다면 그 죄에 빠진 모습 보면서 우리가 보여야 될 반응은 위로가 아니에요. 사실은 슬픔이에요. 통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이다면 어쩌면 한 사람의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에 둔감해진 공동체란 사실입니다. 사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 조금 마음에 찔림이 있었어요. 왜? 저희 교회도 공동체가 커지다 보면 이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거든요.
그 안에서 어떤 모습은 내가 봐도 아 저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라는 마음이 있어요. 근데 뻔히 잘못된 거 줄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솔직히 종종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아 괜히 건드려 봐서 좋을 거 없어. 건드려지면 또 내가 다 책임져야 돼. 힘들어. 물론 목사 저 혼자 다 할 수 없어요. 이제 이미 고동체는 저 혼자 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어쩌면 당연하다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잘 지켜내야하기 때문이에요. 오늘 우리가 배웠지만 죄가 자기 중심성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자기 중심성의 의미는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한 내 기준이 옳다고 여기고 있다는 거예요. 고린도교회 배경에 대해서 지난주 말씀드시피 고린도교회는 한고 도시였고 굉장히 많은 문화가 섞여 있고 타락한 도시였어요. 주변 사람들은 어쩌면 다 죄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고 있는 그 교인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야,이 정도는 뭐 우리 도시사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 지금이
시대 이렇게 안 한 사람이 어디 있어? 담들 다 하는 거야. 왜 이렇게 이런 갖고도 민감하게 그래? 고린도 지역 자체와 그 시대가 그런 문화 속에 있었으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바울이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죠. 여러분은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 적은 누룩과 같은 죄가 있어요. 이거
안 다루면 이것이 온 반죽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죄의 특징은 내 죄를 동조해 줄 사람을 끝없이 찾습니다. 내가 누군가한테 어떤 얘기를 했어요. 근데 내가 지금 좀 삐뚤어져 있어. 근데 옆에 있는 사람이 야 그건 너 속상데 그건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거야라고 얘기해 주면요 그 사람하고이 얘기하기 싫어져요. 또 다른 사람 찾습니다. 그 다른 사람에게 또 내 이야기 동제해 주고 맞아 맞아 해줄 사람을 찾아요. 그래서 죄는 언제나 전파력이 좋습니다. 근데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잘 대처하기 위해서 오늘 말씀이 필요한 거예요. 우린 때로는 기독교의 은혜와 사랑을 오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죄에 대하여서도 은혜와 사랑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아,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했잖아. 그냥 이것도 사랑해 줘야지. 아닙니다. 은혜는 죄를 잊은 죄인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 회개하면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품고자 하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지 하나님은 죄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을 받아 주신 적이 없어요.
죄를 내려놓고 함께하자고 끊임없이 말씀하세요. 죄를 내려놓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죄를 동조해 주는 것은 죄입니다. 형제를 영적으로 살리는게 아니라 영적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가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돌이키면 우리는 그 형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천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형제가 죄에 대해서 무감각화가 되고 이게 뭐가 죄야? 아, 이런 거 다 하는 거잖아. 죄에 연합한 삶을 포기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죄가 온 교회에 전염되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의 공동체가 아니에요. 그 얘기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크든 작든 죄의 영향력을 많이 끊어낸 사람이 있고 적게 끊어낸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거룩함을 향해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교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좋은 공동체는 그렇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 혼자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서의 옳은 자정 작용, 자연 치유가 일어나는
공동체예요.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 죄에 빠진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근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치유해 가고 올바른 방향으로 깨닫게 도와줘서 우리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속상함 섭섭 마귀가 찾아와서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거 그 영향력에 같이 무너져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잘 도와줘서 돌이킬 수도와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필요합니까? 죄 동조하는
사람이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교회됨을 지키는 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별하고 거룩을 추구하고 죄와 싸울 줄 아는 사람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교회를 성경은 엄격하게 다른 기준이 있는 곳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0절 볼게요. 그 말은이 세상에 음행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약탈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비하는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이 얘기가 뭐냐면 어,이 세상에 음행하는 사람들,이 세상 안에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 예수님도 죄만은 세상에 오셨어요. 그분은 거룩하지만 죄만은 세상 가운데 속해 살아갔습니다. 그곳에서 특히 세리와 죄인과 같은 죄인들과 가까이 살아가셨어. 사귀셨습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살아갈 때 여러분이 거룩한 성도의 정체성 갖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아직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소위 말하는 성경 죄인들과 같이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죄로부터 우리가 벗어나 살려고 하면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수 없다는 얘기를 여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이 얘기인 거죠. 그런데 세상은 그렇다는 거예요. 근데 교회는 다릅니다. 형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대할 수 없다는 거예요.이어서 한번 읽어보면 그 11절이 그 내용을 다루고 있어요.
그러나이가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사귀지 말라고 쓰는 것은 신도라 하는 성도적 신도라는 어떤 사람이 음행하는 사람이거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거나 사람을 중상하는 사람이거나 술취하는 사람이거나 약탈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즉 이야기는 자기가 그리스도하고 말하면서도 음행 탐욕 우상수매 중상 술취함 약탈들을 버저이 행하고 있는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 너무 강한 어딩이죠. 동조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귀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여러분이 중에 뭐 음행하는 거 성적인 어떤 쾌락을 추구하는 거죠. 탐욕 욕심내는 겁니다. 몇 가지는 오늘 좀 풀 필요가 있는데 우상숭배. 우리는 이 우상숭배 잘 해야 되죠. 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추구하는 건데 또 다른 것에 나의 삶을 받치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내 자녀의 어떤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서 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자녀를 키우는게 아니라 세상의 방법 세상이 옳다는 어떤 방법에 내 자녀를 받치고 있다면 그게 우상숭배라고
학자는 어떤 학자는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중상은 어 내가 뭐 뒤에서 내 지체를 향한 뒷말 이런 걸 통해서 관계를 깨는 행동이죠. 약탈은 뭡니까? 우리가 뭐 도둑질입니까? 이것은 내가 비즈니스나 어떤 관계 안에서 내 유익을 위해서 남을 속여서 피해를 입히는 나의 교무한 행위들 말들 다 이게 약탈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모습을 버젓시하고 있다면 우린 성도지 못한 거예요. 근데 그런 모습 버전하면서 성도라고 하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다 없냐라고 하면 찔리죠. 어 우리가 이게 잘못된 걸 알면서도 영향받고 자꾸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적어도 이런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 서로 안의 관계와 말을 통해서 아 내가 지금 죄 가운데 있고 것을 깨닫 깨달을 수 있어야 되고 깨달을 때마다 아 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이게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내가 욕심인 건데 살고 있는 거 부끄러워야죠. 만약에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면 그
상태는 위험한 상태라는 거예요.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악함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위험한 경계에 있는 것입니다. 아, 그냥 난 성도인데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은 위기예요. 참된 신자는 내가 혹시 죄의 자리에 빠질 때라도 뻔뻔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깨달을 때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에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마음만 아파하고 있는게 아니라 진짜 내가 변화하기 위해서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내 형제들에게 나를 좀 도와달라. 내가 이 부분이 너무 약하다. 내가 너 여기 넘어진다.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이에요. 그게 그런 의미에서 오늘 고린도전서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거예요. 하나님 모르는 사람과 하나님 아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회심한 자가 외심 구분합니다. 다르다는 거예요. 12절 13절이 그 내용입니다.이어서 한번 읽어 봅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해야
할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과 내쫓칩시오. 자, 심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어렵고 판단이라고 해 봅시다. 밖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분별해야 되는 경우는 우리 안에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분별하고 어떻게 보면 경계하고 함께 죄 있나 아니나 우리가 잘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국 그들이 끝까지 밖에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것은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세상 밖에 있는 사람을 다 찾으면서 당신이 왜 죄 가운데 있냐라고 말할 수 없어요. 그데? 그들은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에게 우리가 지금 말하고 싶은 죄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뭐 해야 돼요? 우선 복음을 전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관계에 대해서 다릅니다. 그래서 12절에 말하는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한 심판은 진단해 주고 분별해 주고 함께 점검해 주는 거예요. 교회 안에 있는 형제에게는 우리가 이것 해야 합니다. 왜냐면 형제니까요. 형제가 어떤 단어입니까? 같은 곳에서 태어난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존재예요. 한 어머니 뱃속에 태어났듯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는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형제가 됐다면 형제의 죄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서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내 형제를 방관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관계를 맺죠. 어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의 모습이 아 저건 저렇게 안 되는데라 마음이 있어도 관계가 없으면 실제로 그것을 말해 주기 어렵습니다. 저 같이 어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상황에서는 관계가 없어도 말할 수 있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관계의 신뢰성 위에서 사실은 형제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교회가 공동체야 되는 이유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내 형제를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서로를 죄로부터 보호하고 서로를 책임지고 우리 공동체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에클레시아에 있는 사람을 식구라고 불러요. 밥을 같이 먹는 관계가 식구죠. 내가 누군가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 안에
있는 관계의 깊이,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의 관계 맺을수록 내가 누군가의 삶을 더 개입하고 함께 해 줄 수 있어요. 그게 나를 어쩌 우리가 혼자 있을 때 내가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께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도와줄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세상은 점점 어떤 길을 갑니까? 개인화되죠. 왜냐면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뭔가 관여를 하려면 관계가 쌓여야 되는데 그게 다 피곤한 거죠. 해봤자
도움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랑을 위한 수고를 하지 않고 점점 개인화돼요. 그래서 나를 지켜줄 사람도 없는 거예요. 교회는 세상과 다른 길을 가는 공동체입니다. 제가 하나북을 만나면서 뭐 이미 알고 있는 단어였지만 회심과 목양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됐어요. 회심이 뭡니까? 회심. 회심은 한 사람이 이제 영적 생명으로 탄생한 겁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그래서 되는 거죠. 회심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의 형제가 된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끼리 형제가 되는 거죠. 회심한 사람은 회심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 하나님이 나의 삶 주인다는 것은 내가 종이 되겠다. 내가 하나님 뜻을 따르겠다는 거잖아요. 회심하는 사람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교회의 소속인 거예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미신자는 복음을 먼저 전해 줘야 될 사람이에요. 그들도 회심할수 도와야죠. 회심한 때부터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회심한 이유부터 우리가 영적 가족으로서 형제 자매가 돼서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 각 사람이 회심의 결단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입니다. 내가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결단대로 진짜 내 삶을 살아가도록 지켜내는 것 그것이 목양입니다. 내 형제를 그래서 원래 우리가 머물던 그 자리, 내가 늘 하던 옛 사람의 습관, 그 죄로부터 보호하고 건전해서 회심한 자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양입니다. 목양자, 목자들도 해야 되지만 내 형제라면 누구나
다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가 잘못 가면 부모가 먼저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우고 애쓰겠죠. 그러나 형제라면 내 동생이고 내 형이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하지 않고 그저 우리끼리 같이 모여서 좋은 친교를 맺는 것이 목양이 아니에요. 우리 신하게 기쁘게 잘 지내는 것이 목양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래서 막 기쁘고 친하고 친교를 중요시 여기는 관점을 봤을 때는 누군가는 아 교회가 왜 이렇게 사랑이 없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사랑과 어떤 친교를 동일시 여긴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러한 거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은 그래서 여기 잘 보시면 사실 여기 건진과 출교가 나와요. 바울은 이 교회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다루면서 권진과 추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5장 5절도 그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런 자를 사탄에게내어 주었으니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자,이 사탄에게 내었다는 것이 지금 교회 공동체에서 쫓아냈다는 거예요. 권증해서
출교했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 보면 출교한 자에게 바라는 것도 어떤 목적이냐면 그의 비록 육신은 그 안에서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의 영이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의 나의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출교의 목적도 구원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건진과 출교를 어 제가 공부했을 때도 최후의 목양이라고 부릅니다. 형제를 그냥 잘 지내는게 내가 제가 아까 목양이라 그랬잖아요. 내 형제를 지켜내는 거예요. 지켜낸다는 것은 무조건 봐 주는게 아니라 진짜 이 형제가 만약에 어떤 죄에
있는데 이 죄를 다 건징해야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는 그 건징에 따라서 혹 건증 받아지 않을 때 출교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공동체에서 쫓아내서라도이 사람이 이 잘못의 크기와 어떤 것에 대해서 깨닫게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이게 교회예요. 바울은 그냥 아 죄인은 다 잘라버리 이렇게 말하고 싶은게 아닙니다. 근데 교회 안에서 죄를 그대로 두면 결국 그 사람도 망하고 공동체도 망합니다. 고린도교가 지금 그 위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권증을
해야 됩니다. 물론 모든 걸증하는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 따라서 건징도 해야 됩니다. 건징도 사랑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형제를 죄 가운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편할 수 있지만 그것이 가장 잔인한 무관심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서로의 삶에 대해서 좀 무관심해요. 관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생활 잘하려고 합니다. 권진도 없어요. 자기 신앙생활 잘 지켜내는 것에만 익숙합니다. 그것이
정말 교회일까요? 어차피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어요. 그게 정말 교회일까? 좋은게 좋은 거가 교회일까? 만약에 그렇게 하면 그게 더 편할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되게 쉬워요. 근데 우리는 성경적 교회가 무엇인지를이 말씀을 통해 배우 배우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때로는 사랑이란 핑계 속에 은혜한 핑계 속에서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 그래서 제가 이런 거 나누고 싶은 것은 오늘 말씀 참 무겁죠. 네. 저도 무겁습니다. 성경적 교회는
고상한 것이 아니에요. 성경 교회는 어쩌면 치열한 것입니다. 삶을 맞대고 끌어앉고 같이 살려내기 위해서 분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고 기쁘고 편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형제를 살려내야 합니다. 지켜내야 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몇 번 다짐하는 것이 뭐냐면 아 진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하자. 핵심은 행하자예요. 왜냐면 종종 아까 여러 핑계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안 하려고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글거 부을 만들기 싫고. 근데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고 내가 뭔가 행해야 된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좋은게 좋은게 아니라 하나님앞에 부끄럽지 않게.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셔야 되는 경우 많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다뤄야 될까?이 문제 어떻게 풀어 가야 될까? 어떤 데는 내가 진짜 내 형제에게 하나의 진술한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보다 세 배의 무조건의 선행을 먼저 베풀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할 힘은
내가 그 사람에게 먼저 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 안에서 말로 하는 사랑은 쉬워요. 어 형제님 자연히 사랑합니다. 어, 중요한 거지만 거기서 시작하는 거지만 그것에 멈추는 건 쉽습니다. 사랑은 성경의 사랑은 공동체 사랑은 봄날의 햇살 갖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최고점인 십자가였어요. 피팅기의 현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정면으로 다루시고 끌어나시면서 그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목숨까지내어 주시기 위해서
분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형제 사랑이 무엇일까? 고린도서 5장은 그와 함께 결국 교회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좋은 사람들 모임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이 있죠. 죄인는 환영합니다. 그러나 죄를 환영할 수 없습니다. 죄는 싸워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죄로부터 끊어내고 지켜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형제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는 가족이야 합니다. 그
성경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건강해지고 있는 것은 아까 했듯이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자정작용과 치유 능력이 강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분별과 진정한 사랑을 배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형제를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않고 내 형제가 연약해진 그 순간 그를 위로하면서 그러나 그가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길 안에서 있도록 끝까지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으로이
말씀 안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지켜줍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끝까지 포기하지 맙시다. 제가 우리 사랑하는 사귐의 교회 공동체 우리 성도 여러분들과 하고 싶은 약속이고 또 여러분들과 하고 싶은 걸어가고 싶은 그런 길입니다. 네. 오늘 말씀 잘 기억하면서 그런 공동체한 여정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