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은 아시겠지만 ‘시’입니다. 시편이 시라서 좋은 이유는 때로는 이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긴 설명보다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를 통해 설교의 문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2편을 소개할 것인데, 먼저 조금 더 유명한 <흔들리며 피는 꽃>입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_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쩌면 오늘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의 여정 또한 이와 같을 것입니다. 흔들리며 피어갑니다. 때로는 젖으며 그 안에서 피어갑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삶을 나침반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만 북쪽을
향해서 정확하게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바늘은 항상 흔들립니다. 우리의 방향이 주께로 정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미동도 하지 않고 흔들림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고장 난 나침반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 것 같다가도, 때로는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 같고... 내가 믿음이 좋은 것 같아 보이다가도, 한 순간에 내가 믿음이 다 사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쩌면 그렇습니다. 이게 사람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흔들림이 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되고, 방향을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향해서 서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시편 34편은 우리에게 이것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이 시는 표제가 매우 독특합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당연히 이 배경을 알아야 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목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다윗과 관련된 사건은
사무엘상 21:10~15입니다. 다윗이 가드의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했던 사건입니다. 다만 시에는 ‘아비멜렉’으로 되어 있는데, 아비멜렉은 애굽 왕들을 ‘바로’라고 부르는 것처럼, 블레셋 왕들에 대한 호칭이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 중 한명인 아기스와 관련된 사건인 셈이죠. 이 시기에 다윗은 사울의 시기와 오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일 먼저는 ‘놉’이라는 도시로 도망하고, 그 다음 찾아간 도시는 블레셋의 5대 도시에 속하는
‘가드’입니다. 이곳의 왕이 아기스였는데 그의 부하들은 도망한 다윗을 알아보고 그를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곳에 계속 있는 것이 위험하겠다고 느꼈던 다윗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척을 하였습니다. (삼상 21:13) 그래서 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하였다. 그들에게 잡혀 있는 동안 그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또 도망을 쳐야 하는 다윗의
삶이 어쩌면 참으로 비참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지은 시가 시편 34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이 시를 읽어봅시다. 제가 최대한 이 시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메시지 성경>을 이용해서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나, 순간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숨이 턱에 차도록 주님을 찬양하리라. 내가 늘 하나님과 함께 살고 숨 쉬니, 지금 곤경에 처한 너희여,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라 나와 함께 이 소식을 널리 전하고 주님의 말씀 함께 외치자. 하나님께서
저만치 달려 나와 나를 맞아 주시고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 그분을 우러러보아라, 너의 그 밝고 따스한 미소로. 네 감정을 그분께 숨기지 마라. 내가 절망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궁지에서 빼내 주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우리를 둘러 진 치고 보호한다. 너희 입을 벌려 맛보고, 너희 눈을 활짝 떠서 보아라.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분께 피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가장 귀한 것을 바라거든 하나님을 예배하여라. 예배할
때 그분의 온갖 선하심에 이르는 문이 열린다. 굶주린 젊은 사자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지만,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 하나님으로 배부르리라. 아이들아, 와서 귀 기울여 들어라. 너희에게 하나님 예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리라.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자 누구냐? 날마다 좋은 일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느냐? 네 혀를 지켜 불경죄를 피하고 네 입으로 거짓말이 새 나가지 않게 하여라. 죄를 버리고 선한 일을 행하여라. 평화를 꼭 붙들어 떠나지 않게 하여라! 하나님께서
자기 벗들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그분의 귀는 온갖 탄식과 신음을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참지 않으시고 무리 중에서 그들을 도려내시리라.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는 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구하시리라. 너의 마음이 상할 때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네가 낙심할 때 그분이 도우셔서 숨 쉬게 하시리라. 주님의 백성들이 자주 곤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늘 함께하신다. 그분은 네 모든 뼈를 지켜 주시는 경호원이시니, 손가락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 악인은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자니, 선한 이들을 미워하며 인생을 소모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 노예의 몸값을 치러 자유를 주시니, 그분께 피하는 이는 누구도 손해를 입지 않는다. 시편이 시라서 좋은 이유는 그냥 이 시를 읽고 느끼는 그것이 오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것에 귀 기울이시면 됩니다. 시인의 상황처럼, 인생에 고통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인 또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예배하자고, 그분을 의지하자고 말합니다. 히브리시가 굉장한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이것이 22행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의 ABCD가 ‘알렙-베트-기멜-달렛’ 이런 식인데, 1절의 시작이 알렙, 2절은 베트, 3절은 기멜, 4절은 달렛... 이렇게 22절까지 알파벳 순서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정말 뛰어난 예배자이면서 동시에 시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 몇 가지 눈길이
가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시 34: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인은 ‘항상’ 주를 찬양하리라고 말합니다. 항상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사나 죽으나 내 삶에 무엇이 찾아오든 찬양하리라는 것입니다. 찬양은 환경에 따른 조건적 반응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입술로’라는 것은 마음에 담아두는 고백이 아니라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앙의 ‘의지’입니다. 저는 예배할 때 반드시 우리의 ‘의지’가 드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내 의지를 담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혹시 오늘 곤고한 마음 가운데 예배에 나오셨습니까? 3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 34: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그 곤고한 마음을 바꾸는 힘은 ‘찬양’입니다. 선포하십시오. 내 영혼에게 선포하십시오. 서로를 세우며 권면하십시오. 그것이 공동체 예배의 힘입니다. 아마도 이 시에서 가장 유명한 시구는
8절일 것입니다. (시 34:8a)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제가 가끔 이런 비유를 듭니다. 짜장면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음식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말로 설명해서 알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맛보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맛보는 것은 ‘실제적 경험’입니다. 실제적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를 권합니다. 그런 자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선하심을
경험하기에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선하심을 경험하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경이 아니라, 여호와에 대한 경험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에서 하나님은 ‘의인’에 대한 특별한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의인은 예배하는 자들, 주를 찾는 자들입니다.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 34:17)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의 눈이 오늘도
주를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나와서 주를 찾는 여러분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귀는 여러분의 부르짖음에 기울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의인이라고 완전합니까? 아닙니다. 의인도 수없이 흔들립니다. 고난 많은 삶의 여정 가운데 인생이라면 항상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립니다.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나아오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나왔다면’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나침반 바늘이 흔들리면서도 북쪽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오늘 하나님을 향해 통회하는 자에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시 34: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메시지) 그분은 네 모든 뼈를 지켜 주시는 경호원이시니, 손가락 하나 부러지지 않는다. 저는 이 시구를
보면서 한 가지 예화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전도사 사역을 시작하기 전 DTS 때, 설교의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설교를 저는 기억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설교가 끝나고 박수를 받았는데, 어쩌면 그 경험이 제가 설교 사역을 해나갈 수 있는 작은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전한 말씀의 내용은 성령님이 동행하시는 삶에 대한 제 간증이었는데.. 마지막 예화가 이것이었죠. 제 삶은 이 얇은 종이와 같습니다. 이 종이는 누구나 손가락으로라도
뚫을 수 있는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이 뒤에 벽이 있다면 이 종이는 어느 누구도 뚫을 수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뚫으려 하다가는 손가락이 부러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내 뒤에 누가 계시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도망자의 신세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기에 그는 원망이 아닌 찬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고,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지였으며, 그의 신앙의 긴 여정이
향하는 방향이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바울은 잘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다윗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의 여러 시들은 그저 고백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고백이 여러 설명보다 더욱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오늘 설교의 마무리는 시를 통해 이 설교의 메시지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여러분의 삶에 벽이 있습니까? 저에게도 늘 벽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담쟁이는
본능을 발휘합니다. 조용하게 벽을 오릅니다. 절망의 벽 앞에서도 담쟁이는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천천히 한 뼘을 오르더라도 꼭 함께 손잡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끝내 그 벽을 넘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절망의 벽 앞에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이 주시는 소망으로 덮고, 조금은 느릴지라도 함께 나아가 끝내 이기는 삶입니다. 주님 손잡고, 함께 하는 성도님들의 손을 서로 잡아주며 함께 우리를 가로막는 벽을 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여정을
완주하는 것이 저의 목표이고, 우리 교회의 비전이며, 여러분과 제가 함께 꾸는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