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울 서신 가운데 ‘데살로니가전서’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도 한번씩 설교를 하려면, 이번주와 다음주에 전서와 후서를 각각 1주씩 설교하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또한 2019년에 만났던 책으로 주일예배와 금요기도회를 통해 한차례 설교했던 책입니다. 데살로니가와 같은 책을 바울서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울이 목회했던 교회 공동체에게 바울이 보낸 편지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라고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서신서는 편지의 내용이 담겨 있을 뿐,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이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배경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데살로니가 사역에 대한 기록이 담긴 사도행전을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이 세차례 선교여행을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교여행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여행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도 제자들도 바울도 모두 유대인인데, 유대인 외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여행이었기에 ‘이방선교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따른 것이죠. 예수님은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명령을 맡기십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신으로 오셔서 임마누엘 하셨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셨죠. 성령께서 오셔서 너희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 함께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참된 백성답게 살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은 제사장 나라, 즉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가정이나 일터나, 어떤 관계와 지역이던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곳에서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것이죠. 이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그 일을 하라는 것이 신약시대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들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복음을 전합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를 중심으로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바울을 중심으로 이방지역(땅 끝)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요. 그것이 구약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를 뛰어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니 성령이 그들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준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시대의 기준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도들의 위대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평생 갖고 있던 나의 가치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뜻에 순종하는 태도.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1차 선교여행은 바울과 바나바가 팀을 이뤄서 떠납니다. 두 사람의 고향지역인 구브로섬과 갈라디아
쪽으로 선교를 다녀옵니다. 2차 선교여행 부터는 바나바와 바울이 나눠서 각각 선교를 떠납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쪽으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파트너로 삼아서 갈라디아 지역을 다시 돌아본 후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곳까지 가게 됩니다. 원래 바울은 유럽 대륙으로 이때 넘어갈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드로아 환상’을 보게됩니다. (행 16:9)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행 16:10)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위대함은 무엇이라고 했죠? 순종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원래 계획보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인도를 따라서 마케도니아 지역, 즉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유럽에 건너가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지역이 ‘빌립보’ 지역입니다.
이곳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뒤이어 데살로니가로 가게 됩니다. (행 17:1)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유대 사람의 회당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십자가가 있는 교회 건물을 건축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곳에 예수님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교회는 대부분 가정교회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믿는 신자들의 무리가
가정에 모여서 예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왜 어느 지역은 거쳐가고 데살로니가를 목적지로 향해서 갔는지 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세계는 로마제국의 세상이었고, 지금의 그리스 지역에 속하는 데살로니가 땅도 로마의 영토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여러 식민지 도시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유럽대륙에서 아시아 대륙으로 넘어가는 항구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영토 확장 전쟁이나 식민지 폭동
진압을 위해 군대를 이동할 때, 주로 사용하는 도로의 목적지가 데살로니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유럽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하였기에, 무역과 여행을 위한 중요한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에서 아테네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선교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여러분, 바울이라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계획 속의 무계획, 무계획 속의 계획’이 그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전략과 계획을 세워서 갔을까요? 아니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갔을까요? 둘 다입니다. 바울의 선교에는 분명 전략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매우 치밀하고 매우 논리적이고 매우 과정적이고 매우 계산적인 면모가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여행은 아무 전략 없이 성령께 기도만 하면서 음성 듣고 다닌 것은 아닙니다. 그는 도시를 선정할 때도 로마 제국 안에서의 역학 관계와 중요도를 고려해서 선정합니다. 도시에 들어갔을 때도 그는 꼭 회당부터 찾아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장이나 광장으로 갑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인도를 따라가는 순종의 마음, 자신이 아무리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할지라도 끝내 주님이 길을 바꾸시면 그것에 순종하고 따라가며 그 안에 담긴 뜻을 구하는 마음이 그에게 있습니다. 계획이 있지만, 자신의 계획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맞추는 종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드로아의 환상 때문이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의 선교여정의 큰 물줄기가 바뀐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주어진 길에서 그는 늘 최선의
방법과 전략을 세웁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삶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맡기고 따라가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예배팀이 계획된 예배를 위해 미리 모여서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습 시간만큼은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야죠. 그러나
예배가 시작되고 생기는 모든 변수는 내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맡기고 따라가는 모습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변수를 받아들이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에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수가 있다고 하여, 무계획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주님께 다 맡겼어’라고 하는 태도도 옳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배팀 인도자가 아무 연습도 안하고 오늘은 성령이 인도하시는대로 갈테니 알아서 하십시다. 해서는 안되죠. 설교자로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대부분 꼭 원고를 씁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자리에서 설교를 갑작스럽게 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때는 하나님을 믿고 맡기며 나아가야 하겠죠. 어쩌면 오늘 우리의 예배도 그렇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지금이야 많은 목회자들이 안식년을 갖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보니 그런 시간들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목회자도 경험하고 배워야 하는 부분도 있고, 충전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죠.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식년도 없었고, 두분이 동시에 주일에 교회를 떠나 계셨던 적도 없으셨습니다. 저희 모교회는 목회자들에게 성지순례를 보내주었는데, 그때는 주일을 껴서 12일 정도를 가거든요. 그때에도 부부가 함께 가지 않고, 한 분씩 돌아가면서 다녀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 계신 동안 교회에서 장례가 난 적도
있는 등, 이슈가 생길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도 주일에 교회를 비우는 것에 굉장히 큰 부담감을 갖는 사람입니다. 지난 5년 반의 목회 여정가운데 주일을 사귐의교회에서 지키지 못한 것은 갑작스러운 아버지 장례식 때, 그리고 이번이 그렇습니다. 코로나 중간에 누님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가족들끼리 얼굴을 봐야 하기에 미국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주일을 최대한 빠지지 않고 다녀오기 위해, 주일예배 후 출발해서, 그 다음주 금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계획을
세웠죠. 그것이 제가 생각한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6년 전에 자유로운 몸으로 미국에 갔을 때는 3주의 일정으로 조금 넉넉하게 다녀왔지만, 이번에는 오가는 시간 빼고 10일도 안되는 시간에다가, 중간에 설교 사역까지 있고, 돌아오자마자 청소년부 수련회와 초청예배 등이 있어서 조금은 벅찬 일정을 각오하고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계획 속에 빠듯하게 일정을 세워서 모든 것을 소화하려고 했던 이유는, 제 마음 안에 이런 전제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사귐의교회에 최대한 붙어 있는 것이 좋다’는 저의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부교역자라도 있으면 모를까? 현재 상황에서 유일한 목회자인 제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치밀하게 계획한 일정은 보기 좋게 무너졌습니다. 한국에서도 가족들이 다 걸려도 혼자 살아남았던 제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골골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코로나에 걸리고, 미국에서의 첫주는 내내 골골거리고, 사역을 마친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한 필수 코로나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오면서 꼼짝없이 10일을 더 미국에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원래 저의 개인으로서의 삶에는 굉장히 여유가 넘치고 너그럽습니다. 저 혼자만 영향을 받는 일이라면, 계획이 어떻게 바뀌든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관계된 일, 특별히 제가 맡은 어떤 일에 있어서는 계획대로, 질서있게 일이 진행되는 것을 굉장히 원하는 스타일입니다. 시카고에서도 맡겨진 설교 사역도 잘하고
싶은데, 목은 너무나 아프고, 기침은 계속 나오고... 한국에 돌아오면 청소년부 수련회 특강에, 초청예배 준비 등 벌려놓은 일들도 잔뜩인데... 무엇하나 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제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니까 마음이 참 그랬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시카고에서 설교를 하러 가는 차 안에서도 하나님이 주셨던 마음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였습니다.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예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동일하게
주일 한번 밖에서 보내려다가 오늘까지 총 3번을 밖에서 보내며 이런저런 진행과정을 지켜보며 제가 느끼는 것은... “정규야, 네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다.”입니다. 제가 있어서 좋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지키시기에 좋은 교회임을 저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코로나로 인해서 건물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게 되었음을 봅니다. 이전에는 건물 중심이었으나, 코로나가 터지고 나니 그 넓은 예배당이 있어도, 텅텅 비게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모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면서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코로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코로나라는 변수를 통해서 우리는 깨닫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그저 우연, 재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 예측 못하는 일, 변수가 있습니다. 무신론자에게는 그저 우연일 뿐이고, 그 변수를 만들거나
혹은 해결할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변수가 하나님의 의도이든 아니든, 그 변수를 책임지시고 해결하시고 길을 만들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변수 속에서 무엇이 최선일지도 항상 고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이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쫓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 질문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든 예배를 지켜내려고, 그 시간을 디딤돌로 사용하려고 애썼던 우리의 그 노력들이 코로나 이후 한 걸음 더 깊은 신앙으로, 더 깊어진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저도 미국에 있지만,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 있습니다. 지난 3주간의 주보, 제가 만들었죠. PPT 만들고, 유튜브도 편집하고, 줌으로 리더들과 회의하고, 제가 할 일에 대해 대타를 구하고, 여기서도 설교 준비하고, 영상
촬영하고.... 참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 손 놓고 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상황이 무엇이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내가 할 일을 잘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주님이 하실 일은 또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우리의 삶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내가 하지 못하는 부분은 주님이 하심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것이 되었다면, 주께서 책임지시는 우리의 삶이 안전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왜냐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임을...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 뜻대로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저는 제 계획과 판단을 한걸음 더 신뢰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에 분명히 배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제가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럼에도 괜찮다는 것을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상황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계획과 달리 마케도니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지만, 바울은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사역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을 거점으로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며, 또 평일에는 스스로 노동을 하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사역합니다. 우리는 뭐가 없으니까 못해요. 안돼요. 이런 경우가 많지만, 바울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걱정은 사치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해야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이런 희생, 그리고 자신의 가정을 기꺼이 복음의 처소로 개방한 야손의 헌신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장해갑니다. 사역의 열매가 맺어지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요. 바울은 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불가피하게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마도 이 기록이 단서일 것입니다. (행 17:7)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는 곧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진정한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죠. 이것은 종교적 의미였으나, 기독교를 적대하는 세력들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엮어서 기독교를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쿠데타 세력과 같이 모함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조차도 그런
의심을 받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다른 차원의 것임을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하여 대한민국의 정부를 부정하는 어떤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복음 사역은 곧 심한 핍박과 박해와 마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바울은 다른 도시로 급히 떠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의 심경이 느껴집니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장하기 시작한 어린 성도들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얼마나 필요했겠어요. 바울 또한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습니까?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바울의 성향을 고려해볼 때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바울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도시로 가라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살전 2: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남겨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면 바울은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되는 것이죠. 바울은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냅니다. 자신은 갈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죠.
디모데를 보내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이 직면한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살전 3:2) 우리의 형제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여러분에게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러분을 굳건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을 격려하여, (살전 3:3) 아무도 이러한 온갖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우리는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듣게 된 바울은 너무나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모습으로 잘 자라가고 있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신은 두 부분으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1-3장’은 예수님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실함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4-5장’은 앞으로도 지속된 성장을 해나갈 것을 도전합니다. 한마디로 잘하고 있고, 그 모습 변치 않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 좋지만, 동시에 크고 작은 고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면, 우리와 같은 방향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름을 느끼고, 그것을 처음에는 좋게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유별나 보이기도 하고, 뭔가 다른 태도로 살겠다는 것에서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선 그리스도인들은
그 역행하며 부딪히는 것이 첫 번째 통과해야 할 시험이 되곤 합니다. 전에 없었던 여러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까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그 유혹과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유혹과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은 방향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걸어가는 방향과 나를 이끄시는 성령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박해 속에서도 이겨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살전 2:13)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잘 심기어지고, 살아 역사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잘 기억하기 원합니다. 어쩌면 데살로니가
교회도 핑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전해주면서 고난이 와도 이겨내자고 해놓고, 막상 고난이 오니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이해하기 보다는 핑계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사탄은 또 얼마나 그들에게 영적인 시험과 공격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더 큰 뜻을 갖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했기에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최근에 살펴본 히브리서도 교회 공동체에 보낸 편지였습니다. 히브리서와 데살로니가서의 수신자들은 매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지만, 환난 앞에 주를 향한 마음을 잃고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는 상태가 히브리서였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어린 교회이지만, 환난 앞에 담대하며 형제를 사랑하기를 말씀대로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다시금 우리가 깨닫는 것, 신앙은 짬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 호봉제는 없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 깊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더러는 오히려 자기 고집과 자기의 신앙에 갇혀서 하나님의 뜻과 더욱 멀어진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실력은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야생마가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권위와 영향력은 연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부디 우리 사귐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낮아지고, 자기 고집보다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바울의 이러한 고백이 참 부럽고 도전이 됩니다. (살전 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새번역성경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부탁하며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서 배운 대로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저도 바울처럼, 먼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귐의교회 성도님들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