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 성찬예배

"담대하게 거침없이" / 강정규 목사

2024-06-30 · 사도행전 21~28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희교회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매일성경>이라는 묵상집을 활용하여 묵상하며, 주일설교는 그 흐름에 맞춰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일성경은 6년 주기로 성경을 일독합니다. 그 이야기는 주일설교도 6년을 하면, 성경 66권을 모두 설교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개척 초기 2년은 주제설교를, 그 후 2019년부터 매일성경의 흐름대로 설교를 해왔습니다. 이번 해가 6년 차입니다. 그런데 커리큘럼이 6년 주기로 바뀌어서 2020~2025년이

1주기 입니다. 저희는 그전 커리큘럼의 마지막 해부터 설교했기에 올해까지 설교를 해도 66권 중에 몇 권이 빠지게 됩니다(역대하, 에스라, 에스더, 학개, 스가랴, 스바냐, 미가, 유다서). 그러므로 내년까지가 정확하게 한 바퀴를 채우게 되는 것이고, 그중 어떤 책은 두 번씩 설교하게 됩니다. 저희가 이런 설교 방식을 택한 것은 딱 한 가지 목적입니다. ‘성경을 편식하지 말자!’ 66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모두 설교로 나누자는 목표로 힘쓰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왜냐하면 66권 전체를 모두 설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설교 준비에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66권을 설교하지 못합니다. 저도 늘 제가 좋아하는 책, 자신 있는 본문만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강해식 설교가 좋은 것은 매주 본문을 제가 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어지는 본문을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로 붙잡고 씨름하며 설교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특정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본문을 골라서 설교하는 위험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본문 안에서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전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두달 간 사도행전을 만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에게 지금 이 시기에 꼭 필요한 말씀이 주어지는 것을 봅니다. 신기하게도 늘 그렇습니다. 저도 말씀을 따라가며 채움받고 도전받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설교의 여정을 마치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사도행전

마지막 설교입니다. 바울은 1~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서 출발하여 ‘키프로스’, ‘튀르키예’, ‘그리스’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눴듯, 그는 이제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전에도 바울은 선교여행 후에는 늘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서 잠시 정비한 뒤, 다시 선교를 떠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3차 선교여행 후의 귀환은 그 전까지와 다릅니다. 이번에도

선교보고를 하지만, 그 이후의 여정은 투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선교여행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성도들과 헤어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계속하지요. 바울과의 마지막 만남을 갖는 성도들도 온통 눈물바다였습니다. 저도 부교역자로 사역하는 곳에서는 늘 시작이 있으면 마지막이 있었습니다. 시작은 늘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마지막은 늘 아쉬움이 컸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적인 죽음의 위협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더욱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바울의 미래에 대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바울을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행 21:4) 우리는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서 만나고,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말하였다. (행 21:10) 우리가 여러 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였다. "유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행 21:12) 이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바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 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너 T야?’라고 할 정도의 반응이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위로를 얻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로 가서 선교 보고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였던 ‘야고보’를 비롯한 성도들이 바울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방지역에 행하신 놀라운 일을 듣게 됩니다.

이방지역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셨지만, 예루살렘에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 수만 명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한 가지 민감한 부분을 나눕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출신 교회 성도들이 많았고, 이들은 ‘율법’에 대해서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의 사도인 바울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 또한 유대인이기에 그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경건한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바울이 반대한 것은 이방 사람에게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기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하는 디모데와 디도에 대해 바울이 달리 권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디모데는 ‘할례’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고 사역적으로 더 필요하다고

여겨서 할례를 받게 합니다(행 16:3). 할례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죠. 반면, 이방 출신인 디도에게 사람들이 할례를 요구할 때는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치며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갈 2장, 행 15장). 그것이 예루살렘 공회를 열게 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유대인 성도의 율법 준수는 인정, 이방인 성도도 스스로 경건함을 위한 율법 준수는 인정, 이방인 성도에게 율법 준수를 의무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 성도들은 바울에 대해서 건너서 듣다 보니까, 그가 율법 준수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서 좋지 않은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러한 부분 때문에 바울을 성도들이 적대시할까 봐, 오해를 풀 수 있도록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유대인 성도 중 나실인의 서원을 행할 네 사람을 데려가 정결 예식을 행하고, 그들의 머리 깎는 비용을 대신 지불하여, 바울이 유대인 성도들의 율법 준수에

대해서 그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야고보의 의견을 따릅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과 비본질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과의 식탁 교체를 의도적으로 피할 때 그 모습에 격분하여 대놓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방 사람도 형제로 받으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또 그에 맞는 모습,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지혜도 보여줍니다. (고전 9: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신념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죠. 그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오직 복음을 위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도 이러한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내면이 주님으로 가득 차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삶아 숨쉬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외적으로 한쪽에 성경을 품고 다니고, 대화마다 ‘주여, 주여’를 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되려고만 하면 자칫 고립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세상의 추구, 세상의 가치, 세상의 방향과 달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기에 겉은 비슷한데 속이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이 성도의 구별됨, 즉 ‘성도의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거룩한 사람이야’를 외적인 모습과 언어로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지내다 보면 삶에서 느껴지는 ‘거룩함’이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것. 저는 그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를 부탁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형국 목사님은 후배 목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가 겉으로 딱 봤을 때 목사처럼 보이면 실패한

것이다.’ 다음 주에 우리가 뵙겠지만, 그래서 그분은 진짜 목사같이 안 생기셨어요. 예전의 목사님들은 100미터 밖에서 봐도 ‘목사’로 딱 보입니다. 대화를 하면 벌써 목소리부터 ‘할렐루야’ 이러잖아요. 그것이 필요했던 시대도 있었다고 봐요. 그러나 이 시대에서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런 구별은 오히려 거리를 만듭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성품을 닮아서, 같이 있으면 배우고 싶고, 따라가게 되는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여러분에게

듣고 배웁니까, 보고 배웁니까? 보고 배우죠. 우린 다 알아요. 여러분의 삶이 누군가가 보고 배울 수 있는 모습이면,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수 따르미’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이런 바울의 노력 덕에, 예루살렘 교회의 회심한 성도들에게는 오해를 받지 않았으나, 선교지에서 바울의 복음을 반대하며 살아갔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도시에 방문했다가 그곳에 있는 바울을 알아보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행 21:27) 그 이레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군중을 충동해서, 바울을 붙잡아 놓고, (행 21:28) 소리 쳤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합세하여 주십시오. 이 자는 어디에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이 곳을 거슬러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더욱이 이 자는 그리스 사람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혀 놓았습니다." 무리를 충동하고 선동했다는 표현이 선교여행 기간에 참 많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도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가짜 뉴스’입니다. 앞서 봤듯이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고, 바울이 그리스 사람을 성전법을 위반하면서 함부로 출입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프레임이죠. 사탄에 대해서 성경은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합니다. 언제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서 거짓된 말로 바꿉니다. 그런 예시는 차고 넘칩니다. 교회 공동체를 사탄이 무너뜨리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중간에서 장난질을

치는 것이죠. 물론 거기에는 중간에서 또 말 퍼트리기를 좋아하는 미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확성기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성경은 입술의 파수꾼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언가를 전해 들었을 때, 바르고 냉철하게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뿐 아니라, 어디서나 말로, 글로, 댓글로, 실수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시대처럼 몸으로 하는 폭력이 아니라, 말과 글로 하는

폭력이 더 난무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양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감’과 ‘동의’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줄 때, 우리는 ‘공감’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동의’를 하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공감은 그 사람의 기분을 이해해주는 것이고, 동의는 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 두 사람이 다툼이 있을 때, 공감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기 해줘도 됩니다. 그러나 한쪽이라도 우리가 ‘동의’한

것처럼 되면, 그로 인하여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쪽을 편드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둘 사이에서 재판관이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양쪽의 의견을 다 듣지 않은 채, 어떤 사안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되곤 합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알고 예방교육도 하지만 실전에서는 종종 작동되지 않죠. 바울에 대한 가짜 뉴스는 진실이 아님에도 다시 한번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지 않은 일도 모두 한 일이 되고 맙니다. 이 정도면 정말 바울이

불쌍합니다. 무리들은 바울을 둘러싸서 성전 밖으로 끌고 갑니다.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성전 경비대에게 이 소동이 전달됩니다. 천부장, 즉 1,000명의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 즉시 현장에 달려갑니다. 무리들은 출동한 병사들을 보고서야 바울을 향한 무차별한 폭력을 멈춥니다. 현장에 도착한 천부장은 일단 무리 안에 갇힌 바울을 체포하고, 조사하기 위해 데려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무리가 난동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무리들은 더 난폭한 모습으로 연행되는 바울을 뒤따라오며

소리칩니다. ‘죽여라! 저자를 죽여라!’ 여러분, 저는 3차 선교여행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 바울이 체포되는 것이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위협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이 상황을 다시 잘보면 체포됨으로 인해 바울이 살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체포되게 하심으로, 그를 위험에서 구출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결박 당하는 것이 안 좋은 일이라고 여기며 각오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더 큰 위협이 있었고, 그는 그 위협에서 체포를

통해 벗어납니다. 바울이 연행되어 가는 길에서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바로 자신을 죽이러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허락을 받고, 쫓아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서서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이 시간까지도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간증을 합니다. 자신의 출신부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자신이 유대교의 신앙을 버리게 되었는지 ‘회심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회심하며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말하죠. 회심하기 이전의 자신도 어쩌면 지금 바울 앞에 있는 사람들과 같았다고 말하는 것이죠.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던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과거 모습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길 바라며 복음을 전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무리들은 바울의 이야기에 양심이 찔렸던지, 아니면 더 화가 났든지 격분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로마의 천부장은

급히 바울을 병영 안으로 대피시킵니다.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이 이 남자를 죽이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서, 바울을 채찍질하여 추궁하려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때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밝히죠. 그러자 천부장은 태도를 바꿔서 바울을 결박에서 풀어주고,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변론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바울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장차 바울을 통하여 하실 일을 알려주신 것이죠. (행 23:11)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마주한 바울의 적대자들은 그 어떤 선교지에서 만난 적대자들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중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 마흔 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를 죽이기 전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결단한 사람이 40명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우리는 한 사람이 나를 비방하더라도 잠이 안 오는데, 바울의 마음이 참 쉽지 않았겠죠. 그 40명은 적극적입니다. 그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천부장을 속여 바울과 변론할 자리를 만들라고 부탁합니다. 천부장이 들어주면, 바울이 그 자리로 오는 그 틈에 바울을 덮쳐서 죽이겠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바울의 외조카가 이 계략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급히 바울의 면회를 신청하여 이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지키신 것이죠.

하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습격당하여 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바울은 외조카를 천부장에게 보내어 그들의 계략을 알립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가이사랴의 감옥으로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총독의 관할지였으므로, 이 사건은 총독 ‘벨릭스’가 맡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천부장의 임무는 바울을 그 재판을 위해 안전하게 호송하는 것이었죠. 그렇게 바울은 예루살렘 근처의 도시인 ‘가이사랴’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헤롯 궁의 감옥에 구금되죠. 이곳에서 바울은 2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결의한 시점에, 로마제국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역설적으로 로마의 감옥이었습니다. 알 수 없지만, 또 이해가 되는 하나님의 이끄심이죠.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과정을 본다면, 당시 일개 부족에

불과했던 야곱의 가족이 당대 최강대국 애굽의 보호 아래 들어가 살면서, 그들은 한 민족을 이룰 수 있는 숫자로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애굽에서 머문 400년을 하나님이 준비한 요람에서 이스라엘이 자라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사탄은 그런 이스라엘을 위협해서 아이들을 죽이기도 하고, 종으로 박해하도록 애굽의 바로를 부추겨 악을 행하지만, 그때는 또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출애굽 시키시고, 민족을 이룰 숫자가 된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황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저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우리는 있다고 믿습니다. 당시 로마는 엄청난 영토의 제국이었고, 제국의 가장 끝부분에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빌라도’도 있었던 것이죠. 벨릭스의 임기 동안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있었고, 그곳에서 벨리스와 그의 아내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그의 허락하에 동료들과도 교제하며 지냈습니다. 벨리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총독에 오릅니다. 그는 정의를 무시하는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감옥에 내버려 둡니다. 바울의 재판은 가이사랴에서 종종 열렸는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전처럼 이동할 때 매복해 있다가 죽이려는 계략입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싶은 베스도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이때 바울이 대답하죠. (행 25:10) 바울이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나는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행 25:11) 만일 내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으로서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를 요청했고,

베스도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이제 팔레스타인 총독의 판단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재판에 회부된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호송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분봉 왕 헤롯 아그립바가 새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를 방문하기 위해 가이사랴에 옵니다. 총독과 분봉 왕이 각기 등장하는데요. 로마가 제국 중 직접 다스리는 직할 지역은 총독을 파견했고, 그 외의 지역에는 분봉 왕을 임명해서 지방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한 도시에 둘이 있을 수는 없고요. 예루살렘은 총독의 관할이었고,

이스라엘 북동부 지역에는 분봉 왕 헤롯 아그립바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아그립바를 만난 바울은 그에게도 복음을 증언하게 됩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했던 간증과 설교의 일부분을 읽어봅시다. (행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에 따라 바울은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깨어진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그의 사명입니다.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 예수를 믿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하는 일이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게 주신 사명이 아닙니까? 교회는 회심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저는 ‘교회의 수평 이동’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가운데 교회에서 교회로의 수평 이동한 사람들의 등록은 받지 않고, 오직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하여 목회를 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회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를 한 뒤, 수평 이동이 기준이 아니라, ‘회심’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두가 회심한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회심하게 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의 삶이 어둠에서 빛으로,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것 하라고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회심의 경험이 강력했기에, 세상에서의 위치와 자리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총독에 대하여도, 분봉 왕에 대하여도 이렇게 말합니다. (행

26: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 (행 26:29) 바울이 대답하였다.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여러분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가운데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겠습니까? 기업의 총수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가운데 무엇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확신하며 살았기에 당당한 것입니다.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서 이런 당당함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기준 앞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렇게 해야 성공한 인생이다. 이것이 있어야 성공한 인생이다.’ 세상은 날마다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리를 확신하는

자는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것은 없어도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사랑하며 따르고 있다는 그 사실이 가장 복된 것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고 총독이 그것을 승인했으므로, 이제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탈리아 로마까지의 여정은 매우 길죠.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야 하는 다른 죄수들도 있었고, 그들을 지키는 군사들, 배의 승무원들이 함께 탑승합니다. 이 일은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담당하게 됩니다. 당시에 한 번에 가는 직항 노선은 없었기에 배를 바꿔타면서 로마로 가야 합니다. 바울의 로마 호송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죄수로서 끌려가는 것이 바울이지만, 사실상 이 여정에서 바울이 가장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 27:9) 많은 시일이 흘러서, 금식 기간이 이미 지났으므로, 벌써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행 27:10) "여러분, 내가 보기에, 지금

항해를 하다가는 재난을 당할 것 같은데, 짐과 배의 손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릅니다." (행 27:11)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그러나 곧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몰아치며 배가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배가 폭풍우로 심한 손상을 입었고, 바다 가운데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침몰을 각오할 만한 것이었으므로 배에서 짐을 모두 던지고, 3일째에는 선원들의 장비와 식료품까지 다 바다에 던져 배를 가볍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점점 배의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행 27:21)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에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 말을 듣고, 크레타에서 출항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이런 재난과 손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 27:22)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행

27:23)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행 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행 27:25)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행 27:26)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야기처럼 정말 14일째가 되던 때, 폭풍 속에서 표류하던 배가 육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출항했는데, 배가 암초와 충돌해서 이번에는 완전히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죄수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나서서 바울을 보호했고, 결국 모두가 바다에서 나뭇조각 등을 붙잡고 헤엄을 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이 멜리데(몰타) 섬입니다.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배에 함께 탄 276명이 모두 위기 속에서

살아남게 됩니다. 멜리데에서 바울은 독사에게 물리게 되고, 모든 사람들은 그로 인해 바울이 죽을 것으로 보았으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죠. 또한 바울은 그곳에서도 원주민들을 치유해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모든 공동체를 돌봅니다. 결국 3개월의 시간을 보낸 후, 바울과 일행이 로마로 입성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실질적인 선장이요, 지도자요, 목회자로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로마로 온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로마 땅에 들어가자, 로마에 거주하는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마중 나오는데, 로마에서 무려 69km 떨어진 곳까지 바울을 마중 나옵니다. 그 자체가 바울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이었죠. 성경은 이들을 본 바울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행 28: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보통 사람을 통해서 받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하면 먹을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나요?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어느 날 먹을 것을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오죠.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런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런 성도, 그런 동역자들의 모습이 위로였고, 감사였고, 그들을 통해서 용기와 담대한 마음을 얻습니다. 저는 이것이 또한 교회 공동체의 존재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사도행전은 어떻게 끝납니까?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납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땅끝까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바로 당시의 사도들에게 땅끝은 ‘로마’였기 때문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이 모든 과정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와 성도들의 목숨을 건 순종이었습니다. 성령과 말씀의 역사는 우리의 순종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나 변함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냅니다. 선교지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감옥에서도, 호송되는 배 안에서도, 그리고 로마에서도 말입니다. 로마에서 그는 가택연금을

당하게 됩니다. 병사들이 지키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는 있었죠. 그는 유대인들을 그곳으로 불러서 복음을 전합니다. (행 28:23) 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였다. 그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터놓았다. (행 28:24)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어쩌면

사도행전이 끝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와, 복음 앞에 엇갈린 다른 반응들입니다. 모두 다 믿었다고 말하며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동화가 아니거든요. 바울은 끝까지 복음을 전했지만, 그 복음 앞에서 늘 반응하는 자와 반응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따르며 살아갈 때, 그런 우리와 함께하는 동지도 생겨나겠지만, 우리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마지막 두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행 28: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행 28: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저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이 두절을 너무 좋아합니다. 바울의 끝을 바울답게 보여주며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는 마지막 메시지. 사도행전의 긴 설교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안타깝지만, 예수님과 바울이 사역했던 때로부터 20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환난은 찾아옵니다.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는 제법

긴 인생을 살아가며 깨닫게 됩니다. 환난은 계속 있겠구나. 성경이 우리에게 그러니 말씀하신 것이겠죠. 동시에 성경을 진짜 믿는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한 주님의 승리 또한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승리란 우리에게 오는 환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의 삶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헛된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 그 승리란 무엇입니까? 그 수많은 고난과 공격 속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환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난 속에서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지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에서 위로하시고, 주변에 사람들을 통해 위로하시며, 다시 힘을 주시고, 다시 충만케 하시고, 다시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에서, 그 제국의 심장에 서서 외칩니다. 담대하고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도행전 28장은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힘써 따라갔던 베드로와 사도들. 그리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끝까지 살아갔던 바울. 그리고 이제 그 바통을 이어받아 살아가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닐까요? 사도행전 29장을 이어서 써 내려가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아직 둘 다 좋다면, 진리 안에 더욱 머물며 무엇에 내 인생을 걸지 고민해 보십시오. 그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나의 주인과 나의 삶의 방향을 정했다면, 더 이상 뒤돌아보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품고 담대하게 거침없이 살아갑시다.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삶의 끝까지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의 끝까지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행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