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요한복음 톺아보기

2022-02-27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메시지 모음 : 7가지 메시지> 요한복음 전반기 마지막 설교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의 내용을 정리해보는 설교입니다. 우선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다시 봅시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을 위해서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서론과 같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 1: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요 1:3)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그분이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이 요한복음의 첫 부분이 전하여주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전하고 있는 말씀이자,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하여줄 수 있는 길과 진리입니다. 이 빛이 하나님을 떠나 어두움 가운데 놓여 있는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어 인간 스스로 가진 결핍과 한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죠.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그러나 빛이 사람에게 비추었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그 빛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해서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하기 시작합니다. 빛이 한 사람 안에 들어와 그를 밝히고,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행동, 그 사람의 삶의 변화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달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빛의 시작점이 아니라, 빛의 전달자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는 만큼, 그 투명도만큼 다른 이에게 말씀의 빛이 있는 그대로 비치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를 보고 듣고, 믿고

따르며 전한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은 언젠가 떠나지만, 말씀은 더 영원히 남습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본질인 그의 말씀이 오늘 우리 가운데 남아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고 누리며 따라가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2-12장은 표적의 책이라 부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계속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표적 앞에서 사람들에게는 논란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표적의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기록됩니다. 먼저 4개의 이스라엘 전통과 관련된 이야기 모음입니다. 우리가 <흔적>이라는 제목으로 이 부분을 나눴는데, 1) 가나의 혼인 잔치 2) 예루살렘 성전 청결 사건 3) 랍비 니고데모 4)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 사건이 먼저 등장하는 4가지 에피소드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는 이미 죄 아래 깨어진 세상과 깨어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심판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여러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알 수 없는 갈급함 속에서 답을 찾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자리 잡아야 할 곳이 비어서 발생하는 갈급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창조주의 흔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전에 가서 예배하면서도 그 종교행위로만 채울 수 없고,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정받고

지식이 풍부해도 채워지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삶을 발길 닿는 대로 살아가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바로 그런 우리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다시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창조주가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없는 우리의 삶에 남겨진 ‘흔적’이 있습니다. 내 삶이 거룩하고 선하게 보여도 그것으로 내 삶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삶이 부정해 보여도 주님은 그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니고데모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그 답은 주어질 것이며, 때로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삶에 지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실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4개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절기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수전절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절기들은 모두 유대교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날들입니다. 바로 진정한 구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3번째

설교를 통해 살펴본 이야기는, 5장에 나타난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입니다. 그는 그날도 베데스다 연못에 앉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유일한 소망처럼 느껴지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죠. 일 년에 한 번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휘저어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나을 수 있다는 전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설령 그 연못에 정말 그러한 신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 병자는 치유받지 못할 것입니다.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이 1등으로 들어갈 확률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병자도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어차피 그의 삶에 다른 희망은 없기 때문인지... 그는 이뤄지지 않을 꿈을 붙잡고 오늘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말입니다. 베데스다의 뜻은 자비의 집이지만, 그곳은 경쟁뿐이고, 어쩌면 절망뿐입니다. 그런 그의 삶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그

절망의 장소에 진정한 소망되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헛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그에게 주님은 진정한 생명과 참된 안식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주님이 행하신 논란의 사건이죠.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깨닫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안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질서입니다.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공급받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주어진 삶을 살아가다가도, 적어도 하루만큼은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며 주님이 주시는 힘을 얻는 것이 안식입니다. 종교와 전통에 의지하던 유대인들은 안식을 말하고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안식을 주시는 분이 되셔서 그분을 만나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가 다시 심기어 생명으로 자라나게 되는 아름다운 기적이 함께함을 믿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주님의 명령에 반응했던 한 사람의 삶이 회복된 것처럼, 오늘도 이 예배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찾아오시는 그 주님의 사랑 앞에 반응하여 참된 안식을 누리는 주님의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절기 시리즈 두 번째, 유월절에 있었던 이야기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될 그리스도를 열광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 나눴듯, 우리 또한 3달러 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마음만 유지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내 중심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CHRIST IN A MAN, 즉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십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너희에게 왔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몫은 무엇인가?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다짐하는 진실된 고백 위에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몫은 믿고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절기 시리즈 세 번째, 초막절을 앞두고 예수님의 형제 이야기가 등장하죠. 예수님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그들이었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따르는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 진정한 의미의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3달러 신앙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잃지 않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은 여러분을 불편해합니다. 사탄도 여러분을 더 공격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지 않을 때는 받지 않던 미움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 세상에 속해있던 나의 옛사람과 등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것이 단순한

유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나를 내어놓지 않고 부족함 만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 일부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 전부를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늘 생각하고 결정하십시오. 주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해서 결정하십시오. 그 결론이 내 삶에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면,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그분을 따르기를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은 초막절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초막절에 거행하는 불을 밝히는 행사와 물을 길어오는 행사의 요소들을 통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분임을 소개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갑니다. 우리의 변화는 나만의 변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타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이 머문 자리에,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남겨진 자리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내 행동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일으키신 후, 오해하는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치시려고 ‘긴 설교’를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I am saying’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의 표적 사건이 7개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I am saying’ 메시지도 7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도 요한복음에는 7번 나옵니다. 성경의 완전수인 7을 이용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나는 ~ 이다’라는 메시지인데,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 묻습니다. 만약 그들이 나를 보낸 이의 이름을 묻거든 뭐라고 말하리이까? 그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분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시작과 끝이라는 것입니다. ‘I AM WHO I AM’. 바로 이 표현을 헬라어 문자로 번역하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피조물이라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차이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모두 유한합니다. 모두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죄 아래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에게 있으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삯인 사망을 우리는 벗어버리고, 사탄이 주는 정죄감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생이고, 회복이고, 구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의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처럼,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은 매우 강력한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육적인 눈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영적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주님께서 치유하고 고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원하시는 것은 치유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도 우리 교인들을 통해 일하시는 놀라운 소식들을 듣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회복과 영접, 치유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그렇게 일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도 눈을 뜨고, 치유된 맹인처럼 주님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눈이 보지 못하여 사물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맹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서 보여주는

진짜 맹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입니다. 오히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그가 나아가게 됩니다. 영생으로 그는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 사랑 앞에 서 있으니, 영적인 눈을 뜨고 그 사랑과 진리 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양식 삼아 빛을 증거하는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에고

에이미'로 예수님이 자신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인 우리를 ‘양’에 비유하시죠.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양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과 생명으로 드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길이 되신다는 표현이 ‘양의 문’이라는 표현입니다. 다른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중요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복음인 것입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선한 목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던 구약의 다윗은 이렇게 말하죠.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습니다.” 즉,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한 번의 죽음이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는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도 그런 선한 목자가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11장의 나사로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나사로를 살리고, 대신 자신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한 걸음 더 내딛게 됩니다.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다짐하게 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유대로 가시는 예수님은 결국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그 사랑 받은 우리가 주님께 같은 마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갈 때, 주님은 마땅한 그

사랑을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우리의 고백과 결단을 더욱 사랑하시며 기뻐 맞이하시는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는 한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때는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날에 벌어진 일이죠. 나사로의 동생인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 발을 닦습니다. 제가 원래 디퓨저나 향수를 강하게 맡으면 머리가 아픈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공부할 때 은은하게 나는 디퓨저를 하나 찾아서 스터디카페에도 그것을 놓고 제 방에도 그것을 비치해 두었어요. 그런데 지난 주간에 방문했던 손님이 그만 그 디퓨저를 엎질러서 바닥에 절반 정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디퓨저의 향이 목양실에 진동했지요. 어쨌든 아끼는 디퓨저가 반이나 쏟아진 것이 내심 아깝기도 하고, 며칠 동안은 향이 너무 강해서 혼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리아가 향유를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부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향유는 제가 쓰는 디퓨저처럼 몇만 원짜리가 아니었어요. 예수님 곁에는 평상시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능력이 탁월한 제자가 있었죠. 그래서 그가 재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는 본능적으로 계산부터 하는 것이죠. "이 향유를 왜 붓느냐? 이것을 팔면 300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겠다"라고 그가 말합니다. 나드 한 근은 325g 정도로 대략 소주병 크기 정도 됩니다. 그것이 300데나리온인데, 이는 300일 품삯입니다. 10만 원씩 계산하면

3,000만 원의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평소에도 검소하시고, 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의 일을 자주 하셨던 것 같아요.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을 때, 그것을 예수님은 받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요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요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아마도 오빠 나사로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이 계산적이지 않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고자 하는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 딱 한 가지 갖고 계시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소중한 것이죠. 주님도 함부로 가져가지 않으시죠. 그저 우리가 기쁨으로 주님께 마음을 드릴 때, 그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드린 마음의 고백. 아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 다음날이면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바로 그 전날 예수님을 향해 아낌없는 사랑을 전한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는 예표적인 행위이자, 예수님이 받는 위로이지 않았을까요?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죠. 12장에서는 마리아를 통해 섬김을 받으셨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섬기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에 예수님이 섬김과 서로 사랑을 가르쳤던 것은, 바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신 마지막

부탁.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새 계명.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 예수님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기를 계산 없이 행할 때... 그것은 우리의 행복이 되고, 더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께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위로를 이 시대에 우리가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임을

증거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러한 사랑으로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