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신자반 6과를 시작합니다. 주제는 기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대화가 끊어진 연인이나 부부가 있다면 그 관계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화가 없는 곳에 사랑과 애정어린 격려가 있을 수 없는 법이죠.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 마음을 말씀드리고,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즉,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관계는
별거 중인 부부와 같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누리라는 명령인 셈입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언제 어디에서든 우리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또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대통령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집니다. 만약 대통령이 그 특권을 모조리 사양하며 자기 집에서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국빈을 자기 집에서 맞으려 한다면, 그는 겸손하다기보다는 관계자와 국민을 번거롭게 하는 어리석은 대통령입니다. 주어진 특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 가운데 사용하여야 하는 법이죠. 그럼 우리의 특권인 기도를 사용함에 있어서 세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도라는 엄청난 특권을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둘째, 정말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될까요? 셋째, 과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없다면 하나님은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실까요? 1. 하나님께서 기도란 특권을 주신 까닭이 무엇인가? 앞선 예처럼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여러 특권을 주는 것은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입니다. 최적의 상태에서 국민을 위해 옳고 바른 결정과 봉사를 할 수 있게끔 국민이 특권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경호원이 지키는 청와대에서 살아야 하고, 방탄 자동차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대통령이 이 사실을 망각한 채, 주어진 모든 특권을 자기 자신을 위해 남용하고 오용한다면 그는 반드시 그 특권을 부여한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됩니다. 기도의 특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을 위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아름답게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기도의 특권을 자기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진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돈을 구할 수도 있고 건강을 구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할 때 기도는 미신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여러분. 미신과 참된 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신은 자신의 변화에는 관심 없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신을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 합니다. 그래서 미신은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없고,
오히려 욕망만 배가시킵니다. 반면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맞게 자기 자신이 변화되려는 의지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신앙인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변화가 뒤따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이 기도의 특권을 계속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남용하고 오용한다면, 그는
끝내 그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 되는가? 기도와 응답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도의 단계와 수준’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좋은 본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1-15는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문입니다. 세 사람이 등장하고 세사람이 받은 기도의 응답이 나오는 본문이죠.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나병환자(한센병)입니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 8: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마 8: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그는 주님께 나아와 자신의
병을 낫게 해주시기를 간구함으로 응답받은 사람입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외딴곳에 격리되어 있었는데, 병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나병환자들이 격리된 장소를 떠나 임의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은 돌팔매질하면서 그를 내어쫓았습니다. 즉, 본문에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목숨을 건 용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셨고, 그의 병을 낫게 해주십니다. 응답받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제사장을 찾아가
정해진 예물을 바치고 깨끗해진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나병의 회복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의 판정을 받은 후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와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에게 이르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믿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애절한 문제를 주님 앞에 아뢰고 응답받는 것은 아름다운 신앙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참된 믿음의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자기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령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믿음의 결과는 아닙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도, 기도도, 그 출발점은 항상 우리 자신입니다. 나를 위해 믿고, 내 자식과 내 사업을 내가 원하는 대로 가꾸기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이기심은 신앙의 출발점으로 쓰여야지, 신앙의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주님을 찾고 기도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과 기도는 그다음 단계로 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초등학생으로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인물은 백부장입니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 8: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마 8: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그는 예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들고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문제를 들고 왔습니다. 타인이란 가족이거나 친척도 아니라, 자기 집의 종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당시의 종이란 노예이며, 주인의 소유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종의 중풍병이 낫기를 주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진전해 나아가야 할 두 번째 단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한 가지를 더 주목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님께서 자기 집을 방문해 주시기를 원하고, 자신이 병든 곳을 직접 만져
주시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께서 그의 집으로 친히 가 주시려 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사양합니다. 그 사양의 이유가 놀랍죠. 주님께서 멀리서 말씀만 하셔도 종의 병이 완치될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이 성숙한 믿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 또한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아닙니다. (마 8: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마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본문이 보여주는 마지막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그의 장모는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의술로는 열병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생명이 위독한 셈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장모의 회복을 위해 단 한 차례도 기도를 드렸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친히 그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주님께서 그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다라야 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이 단계가 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군에 입대하는 아들의 등에 군 복무 기간 동안 먹을 쌀과 반찬 그리고 이불을 지워 보내는 부모는 없지요. 나라를 위해 입대한 이상 나라가 책임짐을 아는 까닭입니다. 하물며 주님을 위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심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으로 결정하신 것만이 실은 내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의 구성과 다릅니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를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의 모델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결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 자신이나 나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 살며,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일용할 양식으로도 자족한 삶을 살며,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며, 세상의 유혹과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결단의 기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전 주기도문에는 앞에 ‘대개’를 붙였는데, 지금은 거의 빠져 있습니다. 대개로 번역되면서 오히려 의미에 혼선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헬라어 원문에서 ‘호티’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 때문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다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나라와 모든 권세와 모든 영광을 영원히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결단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구하기 전에 내가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영원히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까닭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 살며,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함께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며 살고, 타인의 허물을 용서하는 넉넉한 마음을 지니며, 세상의 유혹과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결단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 기도의 응답에 대한 것은 우리가 염려하거나 고민할 문제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를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기를 힘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첫 번째 설교를 맺으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안에서 반드시 필요할뿐더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특권’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특권을 하나님 안에서 겸손하게 사용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가 아닙니까? 나의 문제를 위해서 무엇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물론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좀 더 발전된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성숙한 기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친 기도는 가장 큰 모범이 됩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 앞에서 그분의 나라와 뜻을 위해 살기를 힘쓰고 다짐하며 나아갈 때,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돌보시고 채우십니다. 어쩌면 이것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삶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고,
또 보다 성숙함으로 변화하여 주님을 구하며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구합시다. 주님이 마음을 구합시다. 주님이 가져다주는 어떠한 다른 것보다, 우리의 마음이 전심으로 그분을 구하며 나아갈 때, 그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