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저는 매일성경으로 설교를 해오고 있습니다. 이제 3년 4개월이 지났습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다짐한 것이 있다면, 이 기회를 통해 성경 66권을 모두 설교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매일성경의 흐름에 따라 그 주 말씀을 갖고 설교를 준비하니, 쭉 따라가면 6년이면 성경 전체를 설교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느헤미야, 아가서, 역대상, 히브리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에스겔, 여호수아, 빌립보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시편, 오바댜, 요한계시록,
창세기, 마가복음, 에스겔, 하박국,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 이사야, 고린도후서, 역대하, 베드로후서, 누가복음, 출애굽기, 잠언, 야고보서, 갈라디아서, 사사기, 요엘, 빌레몬서, 골로새서, 요한복음, 레위기. 지금까지 성경 66권 중에서 37권을 설교했습니다. 절반을 넘었습니다. 저는 블로그에 설교 원고도 다 올리고, 영상도 모두 있으니, 우리가 어떤 책을 알고 싶을 때 찾아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혹시 중간에 교회 가족이 되신 분들은, 듣지 못한
부분의 말씀을 읽어갈 때 활용해보시길 바랍니다. 3년 반 정도의 여정에서, 가장 오랜 기간 설교했던 것이 이사야 14회, 에스겔 13회 설교를 했더라고요. 하필 선지서들이 길어서 전하는 저에게도 굉장히 큰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성경에는 짧은 1장짜리 책도 있거든요. 가급적 66권을 어떻게든 놓치지 않고 다루려고 한 번씩은 주일에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 38번째로 만난 본문인 <요나서> 또한, 지난 목요일부터 오늘까지 4일의 묵상으로 끝나버린 짧은 책입니다.
오늘 저의 목표는 여러분이 오늘 설교를 통해서 요나서를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집에 가서 궁금해서라도 꼭 한번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번 그런 소망을 갖고 말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월-화에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틀 동안 설교하는 것도 소중했지만, 사실 그 안에 여러 의미 있는 시간들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사랑하는 두 분의 은사님과 하루씩 시간을 가진 것도 소중했지만,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두 명의
후배 동역자와의 만남도 값졌습니다. 첫날 설교를 마치고 나가는데, 회중에 있던 한 형제가 저에게 쪽지를 주었습니다. 회중으로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신학대학원생이니 전도사님이죠. 제가 오랜만에 학교를 가서 약속이 많이 잡혔습니다. 5~6개의 만남 스케쥴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월요일 점심 2시간이 스케쥴이 계속 잡았다가 취소가 되었어요. 그런데 한 형제가 전한 쪽지를 받아서 읽어보니 제 설교를 들으며 저와 이야기를 꼭 한번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쪽지를
읽자마자, 제가 이 친구를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성령님의 생각이다.” 그래서 식사 시간을 통해 2시간 정도 이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주에 올라와서 수요일 아침에 또 다른 형제에게 문자가 와있었어요. 마찬가지로 그 설교 시간에 있었던 또 다른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말씀을 듣던 중 저하고 이야기를 꼭 나누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를 않았데요. 그런데 집에 와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아내가 저를 알더랍니다. 제가 전도사
사역으로 거쳐 갔던 교회의 청년 자매가 아내였던 것이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연락했다며, 10분이라도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후배들에게 먹히는 사람이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죠. 30분 넘게 통화를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우연히 후배 사역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느끼는 것은 ‘이들이 길을 잃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도사로 살기에,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항상 거룩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것처럼 서 있어야 하지만, 안에서는
깊은 갈등이 있고, 안개와 같은 여정에서 답을 찾고 있음을 두 사람 모두에게 느꼈습니다. 뭐 제가 해줄 얘기가 있나요? 나도 그런 방황이 있었고, 고민도 있었고, 그 안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게 된 것을 조금 나누며 위로하였습니다. 제가 두 사역자의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사역을 맡았던 한 사람, 요나라는 인물을 다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가운데는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분에게 익숙하지 않은 미가, 나훔, 스가랴, 스바냐...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역자 가운데, 가장 이상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고민을 나눈 사역자들은 아주 신실한 고민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요나는 신실하지 못한 모습이 가득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처럼 <이렇게 나쁜 사람> 일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요나서는 성경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기보다는 그냥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에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잘 살펴보면 정말 볼수록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대부분의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선지자가 선포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즉, 이사야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주셨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죠. 당대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말입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메시지보다는 요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초점부터 조금 유별난 책입니다. 책의 주제와 결론 또한 “요나와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전체적인 내용을 좀 살펴보도록 할게요. 우선 구조는 그야말로 간단합니다. 맞물려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1, 3장은 요나와 이방인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 4장은 요나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장소로 보자면 1장의 무대는 배, 2장의 무대는 큰 물고기, 3장은 니느웨 성안, 4장은
니느웨 성 밖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죠. (욘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라는 성읍을 기억하십니까?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데, 현재는 이라크 티그리스 강변에 있습니다. 앗수르라는 제국의 수도였죠. 요나가 갔을 때도 그곳이 앗수르의 수도였는지는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고대 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요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즉,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선교적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자기 백성을 향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방선교는 신약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향하는 곳은 이방나라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가 많지요. 그래서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구약을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제가 거듭 말씀드립니다. 경고는 사랑을 전제합니다. 정말 심판을 주는 것이 목적이면 경고 없이 때려야 제대로 심판할 수 있습니다. 요나도 이것을 알죠. 하나님이 이방 나라, 그것도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나라에 대해서 뭔가를 하시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그 일을 위해 자기가 가야 하는 것은 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전면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주저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놓고 그분의 명령을 무시하는 경우는 요나가 유일합니다. 제가 요나씨를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벌써 인상이 별로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뭔가 삐딱합니다. (욘 1:3)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다시스)으로 도망가려고, 길을 떠나 욥바로 내려갔다. 마침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를 만나 뱃삯을 내고, 사람들과 함께 그 배를 탔다. 주님의 낯을 피하여 스페인으로 갈 셈이었다. 여러분이 성경의 지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면 이것이 어떤 상황이신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일본 가서 선교하라고 했더니, 인도나 유럽 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스페인(다시스)은 세상의 끝에 있는 땅입니다. 즉, 요나가 어지간히 가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에 대놓고 반항한 것이죠. 그런데 요나가 탄 배가 바다에서 큰 폭풍을 만나서,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뱃사람들은 바다를 잘 알죠. 이것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믿는 신에게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은 몰랐지만, 이것이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어요. 정작 선지자라는 요나는 이 시간 아무것도 모른 채 배 밑층에서 잠이나 자고 있습니다. (욘 1:6) 마침 선장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여기서도 선원들은 배와 승객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무관심합니다. 요나는 다른 사람에 관심이 1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웃의 위기에 전혀 무관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배 안으로 내려갔고 밑창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바닷속, 죽음의 문턱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도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뱃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방법을 찾습니다. 이 재난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여겼기에,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원인을 찾습니다. 바로 그 제비에 요나가 걸립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1)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2) 어디서 오는 길인가 3)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이에 대한 요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욘 1:9)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전문용어로 ‘입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정말 믿고 경외하는 사람이 지금 이렇게 대놓고 반항을
합니까? 신약의 표현으로 하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입으로 그렇게 한다고 천국 백성이 아니죠. 오히려 선원들이 바른말을 합니다. (욘 1:10) 요나가 그들에게, 자기가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서 그에게 소리쳤다. "어쩌자고 당신은 이런 일을 하였소?" 그때 바다에 파도가 점점 거세니니까, 사람들이 선지자인 요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때 요나가 뭐라고 말합니까? (욘
1:12)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여러분. 저는 순교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을 해왔던 사람이라서, 어린 시절에 요나서를 읽을 때는 요나의 이 모습을 보면서 약간 오해를 했습니다. 요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닙니다. 요나는 기회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도망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죽어버리면 니느웨 안가도 될 완전한 기회인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요나는 여호와께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냥 죽겠습니다. 끝까지 들이박는 사람이 요나였던 것입니다. “주님, 차라리 절 죽이세요.” 신앙생활을 하다가 반항하는 사람은 고난 앞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면 벌써 죽었겠죠. 깨닫고 돌아오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에게 지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자기를 바다에
던져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착합니다. 그래서 요나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배를 돌려 살아가려고 노를 젓습니다. 하지만 파도가 더 거세게 일어나므로, 최후의 수단으로 요나의 말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요나의 말대로 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욘 1:14) 그들은 주님을 부르며 아뢰었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욘 1:15) 그들은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다. 폭풍이 일던 바다가 잔잔해졌다. (욘 1:16) 사람들은 주님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고서, 주님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요나의 불순종을 통하여 주변 사람들이 회심하고 하나님을 믿는 계기로 삼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요나를 불순종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택을 능히 뛰어넘어 그것을 선용하여 일하실 전능자입니다. 요나의 불순종도 하나님 안에서 기회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크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나가 그대로 죽어버리면, 요나의 승리지요. 요나는 아마 바닷속으로 빠져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보다 위에 있는 분이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시작됩니다. (욘 1:17)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여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천지창조를 믿는다면, 그래서 그분이 정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이런 예외적인 사항이야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단,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물고기는 ‘고래’는 아닙니다. 가끔 주일학교 공과책에 이 물고기를 고래로 그려놓는데,
성경에는 고래와는 구분된 단어로 ‘큰 물고기’(다그 가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피노키오’ 이야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 이야기가 요나서를 모티브로 기록되었죠. 거기서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들어갑니다. 2장은 그 물고기 뱃속에서 드려진 요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요나서 2장이 논쟁입니다. 과연 이 기도를 ‘회개’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이 요나의 진정한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앞의 상황이나 뒤의 상황과 모두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요나의 회개기도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요나 개인의 고백으로 보지 않는 일반적 기도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2장에 ‘회개’는 없습니다. 감사와 서원이 있을 뿐입니다. 본인이 잘못한 것에 대한 언급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순종의 서약만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요나의 기도가 어쩌면 그렇습니다. 어쨌든 반성 없는 반성문과 같은 기도, 그 끝에 앞으로 잘하겠다는 믿음직스럽지 못한 고백에도,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제 다시 순종할 기회를 주십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뱉어낸 것입니다. (욘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저는 어렸을 때,
요나 이야기에서 착각했던 것이 이 부분입니다. 물고기가 토해낸 곳이 니느웨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커서 지도를 보니 니느웨는 내륙에 있는 도시거든요. 그러니까 요나는 다시 걸어서 니느웨까지 가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요나가 이번에는 니느웨까지 갑니다. 자, 이 부분을 잘 보셔야 합니다. (욘 3:3)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욘 3:4)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여러분, 여기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십니까? 니느웨는 성을 둘러보는 데만 사흘 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룻길을 걸으며 전합니다. ‘하룻길을 걸으며’로 본다면 그나마 하루는 열심히 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학자들은 이 표현은 ‘하룻길을 가서’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흘 길 거리의 성읍 중 하룻길을 가서 외친 것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가서 심판 메시지를
전하긴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것만을 행할 뿐입니다. 참 나쁜 선지자입니다. 또한 그의 심판 메시지는 히브리어로 다섯 단어입니다. 즉 그의 심판 메시지는 엉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니느웨의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심판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도 그의 선포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제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혹시라도 구원을 받을까 아주 염려하는 사람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은 니느웨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 있지만, 요나는 그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신학대학원에 가서 설교했던 내용은 ‘양 한 마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설교를 듣고 제게 상담을 요청했던 후배 사역자 가운데 한 사람의 고민은 이것이었습니다.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에게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려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해 품고 계신 마음이 뭔가를 살피면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찾아와 두드릴 때, 그분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내 힘으로 어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요? 못합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사랑하려고 상대방을 바라보면, 사랑할 모습보다 사랑하지 않아야 될 수많은 이유들이 먼저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이기적인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나는 사랑하시기를 원하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일까요? 혹은 무관심한 것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사랑받기 충분하지 않은 네 모습부터 봐. 그런 너도 사랑하신 하나님인데, 네 옆에 그 사람은 안 사랑하겠니?”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네가 나의 사랑을 알고, 너도 나를 사랑하기
원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네 옆 사람을 사랑하렴. 그것을 보는 것이 나는 가장 좋단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는 자들은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맞장구를 치겠죠. 그런데 그렇게 말만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새계명 기억하시죠?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 혹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들의 대적인 유대지도자들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먼저 함께하는 사람들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멀리 있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선적으로 내 삶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해요. 여러분,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려우면 최소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긍휼’을 기억해보세요. 적어도 긍휼한 마음이라도 우리 안에 갖고 보세요. 나를 핍박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아직 하나님을 몰라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내게 상처를 주고 어려움을
준다면... 긍휼한 마음으로 보십시오.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함에도 하나님이 날 긍휼한 마음 가운데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그것이 ‘이렇게도 좋은 사랑’입니다. 요나라는 이상한 선지자,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선지자. 그가 정말 마지못해 내뱉은 회개의 메시지. 구원에 어떻게든 이르지 않게 하려는 그의 검은 속내가 담긴 그 메시지. 그런데 그 메시지를 통해서 또 역사가 일어납니다. (욘 3:5)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요나가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라는 것은 아마도 그의 모습이나 말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나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이 전면적인 회개 운동에 나섭니다. 마치 1장에서 배에 있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런 요나의 불순종이나 다름없는 모습 가운데 나온 회개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그들의 악한 길에 대해서 돌이킵니다.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돌이킴의 기회에 반응하니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많은 예언자들이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며 돌이키라 명하지만, 구약의 역사를 보면 여호와께 돌아오는 일에 대부분 실패합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 해냈어요? 요나가 해냈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들 가운데서 해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특히 저와 같은 목회자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어떤 사역의 열매가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죠. 우리가 뭔가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대상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연약한 순종, 못난 순종까지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오죽 크기에 이런 나조차 사용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못마땅한 한 사람이 있죠. 바로 회개의 통로로 사용된 요나입니다. (욘 4:1)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요나가 왜 화가 났을까요? 요나가 화난 이유가 나옵니다. (욘 4:2)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욘 4:3)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니느웨가 구원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합니다. 그런데 구원이 일어나자, 요나는 하나님이 애초에 이렇게 하려고 다 해놓은 것이라며 화를 냅니다. 즉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납니다. 그리고 또 죽여 달랍니다. 거의 생떼를 부리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가 요나에게는 분노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요나는 자기중심성이 가득 찬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대적인 니느웨 성읍 사람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자신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난 것입니다. 자기가 그 일에 도구가 된 것이 싫은 것입니다. 자기 뜻과 다른 일에 자기의 에너지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뜻대로 되는 것에만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은 참된 신앙인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도 감사하고 그 안에서 주 뜻대로 되었다면 경축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요나는 성 밖으로 나가서 초막을 짓고 성읍에서 일어날 일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맡겼던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엇나가고자 하는 요나의 불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요나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기대한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다시 회개를 멈추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는 그 변질을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니느웨가 다시 죄악 된 모습으로 돌아가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요나를 위해 물고기를 준비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엇나가는 요나를 깨우치게 하고자 이번엔 박넝쿨을 준비하십니다. 나뭇가지로 엉성하게 만든 초막에서 햇빛 때문에 괴로워하던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시죠. 그러자 요나는 이번에는 하나님이 자기 편인 것처럼 느꼈는지 기분이 무척 좋아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음날 벌레 한 마리를 보내셔서 박 넝쿨을 갉아 먹어 시들게 하십니다.
해가 떠오를 때, 뜨거운 동풍을 보내십니다. 햇빛이 요나를 강하게 내리쬡니다. 그러나 요나가 또 자신의 특기를 발휘합니다. (욘 4:8)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시죠.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습니다.” 즉 요나의 분노는 자기중심성에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시면 그것이 기쁜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일지라도 따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이것이 요나가 이 책에서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요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깨우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이것이 요나서의 마지막 절입니다. 즉, 요나의 답변은 기록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과연 요나는 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변했을까요? 메시지 성경 요나서 머리말 부분입니다. “요나 이야기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것은, 그가 지고하고 위대한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나는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다. 요나는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없다. 그는 우리가 우러러보아야 할 이상적 인물이 아니라, 어리석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우리 수준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요나의 어리석음을 재료 삼아 일하시고, 결국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내신다.” 요나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요나를 통해 내 내면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요나서는 우리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요나에게 물었듯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마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좋은 사랑을 보이시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나서를 거울 삼아 오늘 내 안에 요나와 같은 모습을 점검하시고, 그 안에 요나와 같은 내 모습이 발견된다면 주님께 그 부분을 다뤄달라고, 성숙시켜 달라고 의지하며 나아가십시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너무나 관대합니다. 나는 아무리 못나도 하나님이 나는 사랑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 냉혹합니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까지 잡아내려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숙함이란 말씀을 통해 나를 살피는 것입니다. 남을 바꾸기에 앞서 나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에서 확인했듯, 하나님의 용서는 언제나 인간의 반응으로 완성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서에서도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회개한 자들이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기 원하시지만, 아무나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초청하고 아무리 품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역할은 주님을 대신하여 가서 그 사랑을 알게 하고 전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요나도 이 책 이후에 변화되었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삶에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삶도 날마다 변하여 가길 소망합니다. 내 안의 이기주의, 나의 기준, 나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입만 살아있는 신앙인이 내 모습이 되지 않기를 갈망하십시오. 상대방을 내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바꾸어 가려고 하지 말고,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서기를 소망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때론 멋진 일입니다.” 거기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새기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