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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속에서 만나는 위로" / 강정규 목사

2022-05-01 · 나훔 1-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우리가 만나볼 책은 나훔입니다. 지난주 요나서에 이어서 나훔서를 보는 것은 꽤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모두 소선지서 12권 안에 든다는 것도 공통점이지만, 무엇보다 ‘니느웨’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봤듯이, 요나서는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에 심판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기대와 달리 심판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나훔은 그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요나서와 달리 우리는 <나훔>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요나서가 요나라는 인물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면, 나훔서는 예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오랜만에 다시 역사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5개 정도의 제국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에 출애굽기의 배경이 되는 애굽은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조금은 흐름에서 조금은 논외라고 본다면, 제국역사의 시작점은 앗수르, 즉 앗시리아 제국입니다. (5대 제국 : 앗수르-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 앗수르도

밤이 있고 낮이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힘을 키우면 주변 나라를 침공합니다. 이때가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잠시 말씀을 드리면, ‘사울-다윗-솔로몬’이 통치하던 120년의 기간은 12지파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던 ‘통일왕국’ 시대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나라가 나눠집니다. 10개 지파가 연합한 북왕국의 이름이 이스라엘, 2개 지파가 연합한 남왕국의 이름이 유다입니다. 북이스라엘-남유다라고

부르지요. 분열왕국 시대에, 지리적으로 앗수르가 커지면 가장 먼저 위협을 받는 것은 ‘북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은 주변의 다메섹과 하맛 등의 나라와 연합하여 앗수르를 견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북이스라엘 예후 왕 때, 앗수르의 침공을 당하여 조공을 바치게 됩니다. 그러나 앗수르도 밤이 옵니다. 국력이 약해져서 이웃 나라에 정복당해 조공을 바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사야서의 배경으로 보았던 것이 ‘웃-요-아-히’ 시절인데,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던 때가 ‘웃시야 왕’(792-740) 시절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793-753)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가장 잘나가고 있었고, 앗수르는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가 북이스라엘 출신 요나가 니느웨에 가게 되었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요나 이야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앗수르에는 큰 변화가 생깁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가 왕좌에 오르면서부터입니다. 원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일개 병사였습니다.

그는 정권을 찬탈하여 앗수르의 왕이 된 후, 앗수르를 일약 세계 최대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정복욕이 야수와 같았으며 군사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을 이루어가며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서쪽으로는 애굽까지, 북으로는 러시아까지, 남으로는 아라비아 펠릭스까지 뻗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에는 큰 위협인 것입니다. 주전 740년경,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원정길에 나서자,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의 나라들은 대부분 항복하고 조공을 바칩니다. 북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고, 이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하 15:19) 앗시리아의 불(디글랏빌레셀) 왕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왕하 15:20)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 북이스라엘 16대 왕인 므나헴 때의 일입니다. 므나헴은 자기 나라 백성 중, 큰 부자들에게 각각 은 50달란트씩 강제로 빼앗아서 앗수르 왕에게 은 1,000달란트를 조공한다. 속국 형태로 앗수르의 관리를 받게 된 것입니다. 므나헴의 아들이었던 ‘브가히야’가 17번째 왕이 되었을 때, ‘베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런 일들은 주변 강대국에게 침공의 빌미를 마련해 주는 것이죠. (왕하 15:29)

이스라엘의 베가 왕 시대에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이 쳐들어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앗시리아로 사로잡아 갔다. 이런 앗수르에 대항하려는 세력도 있었는데, 그것은 아람(시리아, 다메섹)의 왕 ‘르신’이었습니다. ‘르신’은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와 손을 잡고 앗수르에 맞서는 ‘반(反) 앗수르 동맹’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남유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합니다. 당시 남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는데, 아하스는 이들보다는 앗수르가 더 강해 보였는지 여기에 합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반앗수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유다를 먼저 정복하려고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도 국력이 약했거든요. 그러니까 다급한 마음에 급히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면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냅니다. 앗수르 왕은 이것을 기회 삼아,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침공하고, 그곳 백성을 사로잡아 기르로 옮기고, 아람 왕 르신은 죽여버립니다. 일단 앗수르는 큰놈만 패고, 북이스라엘은 속국으로 살려둡니다. 그 후, 북이스라엘에서는 다시 한번 쿠데타가 일어나서 ‘베가’ 왕이 살해되고 ‘호세아’라는 왕이 19번째 왕에 오릅니다. 이때 앗수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던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죽게 됩니다.

앗수르 제국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 여긴 북이스라엘의 왕 호세아는 앗수르 왕에 대한 조공을 끊고 대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아들인 살만에셀 5세가 혼란 없이 나라를 통치하였고, 조공을 중단한 북이스라엘을 응징하기 위해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을 3년간 에워싸서 공격하고 멸망시킵니다. (왕하 17:6) 드디어 호세아 제 구년에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

가에 있는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켰다. 그렇게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에 의해 멸망합니다. 앗수르의 제국주의 정책은 크게 3단계로 이뤄집니다. 1차. 정복한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받는 단계입니다. 이때 앗수르의 전쟁에 군사 지원을 합니다. 정치적 자율권은 인정해주었습니다. 2차. 속국이 반역할 경우, 반역한 왕가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단계입니다. 반역 국가의 땅을 몰수하여 다른 속국에게 주고,

상류층을 강제 이주시켜서 리더십을 붕괴시키는 정책을 씁니다. 3차. 속국이 다시 반역할 경우, 왕조를 폐위하고 정치적 자율권을 박탈한 후, 속국을 앗수르의 주로 편입시키고 총독과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는 단계로 이어집니다. 속국의 상류층은 다른 나라로 강제 이주시키고 다른 나라의 상류층을 속국에 데려와 혼혈 결혼을 시켜서 민족 정체성을 말살시킵니다. (왕하 17:24) 이스라엘 자손을 사마리아에서 쫓아낸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마리아를 자기들의 소유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성읍들 안에 정착하여 살았다. 사마리아 귀족 3만 명을 이웃 나라로 이주시키고, 그곳의 귀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해서 살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혈통이 섞이게 되고 그렇게 탄생한 혼혈족이 ‘사마리아인’이라 부르게 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 10지파는 모두 혼혈족이 되고,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킨

것은 남유다의 2지파(유다, 베냐민)와 남유다에 사는 소수의 레위인 뿐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남유다만 남은 상황에서 유다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끊임없이 앗수르와 거리를 둘 것을 왕에게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죠. 아하스 왕은 이미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이 가득한 남유다에, 앗수르의 신들까지 수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달리 앗수르를 대항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일은 고난이 있지요. 그로 인해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오게 됩니다. 마지막 항복 권고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가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이 기도에 응답하시죠. (왕하 19: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역사적 기록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요?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1]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인용하여, 이 사건을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역시 [유대고대사]에서 전염병이라고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앗수르는 더이상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이 사건은 주변으로 삽시간에 퍼집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남유다를 치러갔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 놀라운 일이죠. 하지만 앗수르가 그렇다고 쇠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아슈르바니팔 왕이 다스리던

시절까지도 그들은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뒤를 이어 ‘므낫세’가 왕이 됩니다. 이때 므낫세가 악한 길로 가자,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 그를 심판합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여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 지역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하지만 므낫세는 그곳에서 회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므낫세를 다시 돌아오도록 인도하십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정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제국을 조정하듯,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하시고, 회개의 장소로도 사용하시며, 그들을

통해 다시 되돌려 놓기도 합니다. 돌아온 므낫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고, 55년을 통치하여 유다에서 가장 오래 통치한 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아몬은 다시 악한 길로 가게 되고, 신하들의 반역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요시야가 8살의 나이에 왕이 됩니다. 남유다의 요시야 왕이 통치하던 시기. 이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 스바냐, 나훔’입니다. 예레미야와 스바냐가 유다에서 활동했다면, 나훔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앞서 비슷한 사역을 했던 요나의 예언으로부터 100년 이상 지난 시점에 다시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하나님은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훔의 메시지를 분석해 보면, 여전히 앗수르가 최강대국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슈르바니팔이 통치하던 시기에 이 예언이 선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전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죽으며 앗수르 제국은 쇠퇴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앗수르가 아직 최강자의 지위에 있던 시점에 나훔의

예언이 선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역사적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해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이 고대 신화에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역사에 새겨져 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제국의 흥망성쇠, 전쟁의 승패, 사람의 죽고 사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약 150년 전,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 경고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로 반응하면서 거두어집니다.

그러나 150년의 세월이 지나며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가 되고, 그들은 다시 죄악의 길을 가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슈르바니팔은 유다의 므낫세 왕을 사로잡아 가는 등,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또한 앗수르 제국은 고대 많은 제국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행위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앗수르는 전쟁을 치르면, 패배한 대적에 대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살아있는 포로들과 잘린 머리들을 성문 앞에 함께 쌓아 두었으며, 수백 명의 병사들을 장대에

꽂았으며, 남녀 아이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유다를 침공했던 산헤립 왕 때부터 ‘니느웨 성’이 앗수르의 수도가 되었으니, ‘니느웨’에 대한 심판 선언은 앗수르 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훔 1장은 이것이 나훔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라고 밝히며 시작합니다. (나훔 1: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나 1:3) 주님은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권능도 한없이 많으시지만,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은 당신이 다니시는 길이요, 구름은 발 밑에서 이는 먼지이다. 즉, 1장은 앗수르의 죄악 된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다룹니다. 니느웨가 어떻게 심판당할지를 경고합니다. 아주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나훔서 전반을 덮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은 정작 무엇인지 아십니까? ‘위로가 많은’이라는 의미입니다. 나훔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혹독한 심판으로 도배된 이 책은

전혀 위로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다루시는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위로입니다. 피해자들에게 그런 하나님은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다스리십니다. 악을 다스리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은 악한 자들에 의해 피해를 보던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위로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고, 죄악의 세력을 끊으시고 주님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모든 악한 것을 없애시겠다는 약속이 위로인 것이 아닙니까?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나 다른 결말이 아니라면 그것이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즉,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다루며, 하나님께서 악한 것들을 영원히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 ‘참되고 바른 사랑’입니다. 모든 자녀의 마음은 부모에게 혼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잔소리 듣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자녀를 혼낼 때가 있고, 잔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목양이라고 합니다. 목양은 양을 돌보고 선한 목자는 양을 사랑합니다. 목양의 반대말은 ‘방목’입니다. 돌보지 않는 것,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무언가를 가르치실 때, 그것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관계된 삶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혹은 사람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전해질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삶에 잘못된 부분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품으시지만, 품는다는 것은 죄를 용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다뤘듯,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주님은 따스하게 대하고 기회를 주시지만,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 나라인 앗수르와 니느웨 도시 사람들에게조차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성도님들에게는 안 그럴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실까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며, 하나님을 내 뜻대로 조정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선하시기에 악을 바꾸기를 원하시고, 그분은 공의로우시기에 끝내 바꾸지 않으면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나훔서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이런 부분들입니다.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그분은 너희가 만만히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원수들에게 보복하신다. 맹렬한

노를 발하시며 적들에 맞서 일어나신다. 하나님은 버럭 화를 내시는 분은 아니시다. 강한 분이지만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누구든 그분 앞에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다. 누구든 대가를 치르고야 만다.” (나훔 1:2-3, 메시지성경)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맞습니다. 우선 거짓 없이 꾸밈없이 그분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는 누구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서 주제가 그것이었잖아요. 요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받아주시길

바랐지만, 하나님은 아니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는 자격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한 빛 가운데서 나의 실체를 보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벌거벗겨진 것 같은 나의 추함과 나의 깨어진 상처와 가시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서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들을 주님이 다뤄주시길 믿으며 내어놓는 것이 필요해요. “하나님, 내게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의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억지로 하지 않으세요. 그러나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눈에 보이는 악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드러난 죄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하게 살더라도 죄인일 수 있는 것은 내 내면에 하나님께 속하여 살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 된 삶, 즉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잘라낸 삶을 사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입니다. 자신이 가지가 아니라 나무라고 생각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평생을 걸고 씨름해야 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이라도, 이방 나라일지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중심적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 없기에,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을 깨우치십니다. 스스로 못 깨달으면 주변 사람을 통해서 보게 합니다. 그런 기회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하나님이 내 삶을 목양하시는 기회로 깨닫고

나아가면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만약 내가 규정한 하나님의 모습 속에 하나님을 가둬놓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셔야만 한다’라고 여기는 나의 기준이라면, 그것은 철저한 오산입니다. 참되고 바른 사랑은 ‘선대’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끔 이런 그림을 봅니다. (예수님이 양을 안고 계신 사진) 양을 안고 다니는 목자, 양을 안으신 예수님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왜 양을 안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양은 목자를 벗어나서 자기 멋대로 다니는 양입니다. 옆길로 가는 양을 목자는 지팡이 손잡이를 이용해 끌어당깁니다. 경고이죠. 그래도 계속 이탈하면, 목자는 양을 붙잡아 다리뼈를 꺾어 버립니다. 탈구시켜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뼈를 맞추어 판자에 대고 나을 때까지 그 양을 짊어지고 데리고 다닙니다. 이러면 보통 양들조차도 다리가 치유된 후, 절대로 목자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나훔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앗수르가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멋대로 굽니다. 150년 전, 앗수르가 쇠약했을 때는 요나의 심판 메시지에도 반응했지만, 지금은 최강대국의 지위에 있으니 하늘 아래 자기보다 높은 존재가 없는 듯 살아갑니다. 맞습니다. 앗수르는 당대 최고의 제국입니다. 하늘 아래 그들보다 강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강한

분이지만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나 끝내 돌이키지 않으시면 심판하십니다. 2장부터 이어지는 나훔의 예언은 바로 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최후의 경고입니다. (나 2:1) 침략군이 너(니느웨)를 치러 올라왔다. 성을 지켜 보려무나. 길을 지켜 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려무나. (나 2:13) "내가 너를 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네 병거를 불살라서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하겠다. 너의 새끼 사자들은 칼을 맞고 죽을 것이다. 이

세상에 네 먹이를 남겨 놓지 않겠다. 네가 보낸 전령의 전갈이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심판은 니느웨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을 다루십니다. (나 3:18) 앗시리아의 왕아, 네 목자들이 다 죽고 네 귀족들이 영영 잠들었구나. 네 백성이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졌으나, 다시 모을 사람이 없구나. (나 3:19) 네 상처는 고칠 길이 없고, 네 부상은 치명적이다. 네 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네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서 손뼉을

친다. 너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3장의 맥락을 보면, 니느웨는 침공을 당하여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앗수르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가 힘으로 억눌러 왔던 모든 민족들에게 그 일은 해방과 같을 것이며, 정의로운 세상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에 따른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심판은 성경의 다른 책 안에서는 유다에 대한 경고와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유다가 강대국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나훔서에서 보듯, 앗수르의 흥망성쇠 또한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자꾸 다른 무엇을 향해 달려간다면,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사람의 위로를 구하고, 하나님의 해결책이 아니라 사람의 해결책을 구하면.... 저는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 중심된 삶을 살지 않는 일이며, ‘죄’라고 생각합니다. 나훔의 심판 예언은 주전 627년까지 통치한 아슈르바니팔 시대의 어느 시점에 주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이후, 앗수르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합니다. 앗수르 제국이 강성할 때 식민 지배를 했던 여러 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죠. 앗수르와 메디아(메대)가 동맹국이었는데, 메디아가 앗수르를 배신하고 바벨론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앗수르를 공격합니다. 결국 앗수르는 주전 612년 수도 니느웨를 바벨론-메대 연합군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앗수르는 수도를 하란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결국 하란도 빼앗기고 갈그미스로 도망하여 흩어집니다. 앗수르의 패잔병 세력은 애굽의 바로 느고와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려 군사를 일으키지만, B.C 609년 하란을 탈환하지 못하게 되며 제국의

문을 닫게 됩니다. 앗수르 왕의 마지막 모습은 왕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제국이 멸망한 것입니다. 나훔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나훔의 예언 가운데는 앗수르의 멸망 외에도 물로 인한 심판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훔 1: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은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진멸될 것이며 니느웨를 흑암으로 쫓아내어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의

유적은 오랜 세월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하여 도시 위로 6m의 토사가 쌓여 묻히게 되고, A.D 1846년 발굴될 때까지 2450년 동안 흑암 가운데 묻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레이어드의 ‘니네베(니느웨)’ 발굴은 유명합니다. 대영박물관에는 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니느웨 성은 물이 범람하며 토사가 구릉 위로 6m나 쌓이게 됩니다. 고고학자인 레이어드가 토사를 6m나 파헤치고 들어가서 발굴한 것이죠.

그 땅 밑에서 발굴된 니느웨 성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길이가 13km, 성벽의 높이는 초원에서부터 60m 이상이었으며 성벽의 두께는 마차 3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이로 5개의 성벽과 3개의 외호를 갖추고 있었으며 니느웨 변두리에는 30채도 넘는 사원들이 금과 은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단했던 제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2000년도 더 지나서 존재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또한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노트와 같으며, 그것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지혜라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도 나훔서의 메시지 성경 머리말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역사의 무대는 넓다. 때로는 이 무대에 거물들이 등장해 거들먹거리고, 무력과 재력을 휘두르며 위협과 겁박을 일삼는다. 그들은 자신이 무대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그들은 무대 중앙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들이 큰 소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사실이며, 상당한 주목과 찬탄을 얻어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질없고 실로 가련한 시도였을 뿐이다. 허장성세 부리는 자들이 일으키는 소동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면, 무대 중앙에서 지금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위세 부리는 모든 것의 귀추를 유심히 살펴보는 임무를 맡기셔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에 쏟던 관심을 끊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게 하신다. 나훔이 바로 그런

임무를 맡았다. 당시 앗수르는 실로 천하무적으로 보였다. 앗수르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훔의 임무는 하나님의 백성이 앗수르 공포증에서 벗어나,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한껏 부풀려진 앗수르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위세가 실은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는 상황의 본질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나훔의 취지는 적국에 대한 종교적 증오심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수 앗수르를 우러러보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저 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기준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니.’” 나훔서 설교를 통해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의 추구, 세상의 대세, 마치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도록 만드는 그 모든 것에 눈과 마음과 귀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잠잠히 말씀의 진리 안에서 역사의 흔적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찾으십시오. 내가 끝까지 붙들고 나의 피난처로 삼아야 할 분이 누군지를

깨달으십시오. 나보다 크신, 나보다 지혜로우신,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내가 오늘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위로’이고 ‘은혜’가 될 것입니다. (나훔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아무리 힘겨울지라도,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이 함께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그 하나님을 굳게 믿고, 그분이 여러분의 삶의 무대 중심에서 함께 하시도록 붙드신다면, 그런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 참된 평안, 참된 사랑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