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그분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2025-09-07 · 박예진 전도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희는 매일 성경의 흐름에 따라서 주일 설교를 나누고 있는데요. 오늘은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입니다. 어,이 두 권의 책을 하루 만에 다 어, 봐야 하기 때문에 조금 빠듯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의 내용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건의 책이지만 분량이 각각 다섯 장과 세 장으로 비교적 길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오늘이 말씀을 집중해서 잘 따라오신다면이 설교로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말씀을 충분히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그렇다면 먼저 이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소의 배경이 되는 데살로니가라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이며 어떤 배경 안에 이 서신서가 쓰여낸지를 살펴볼 텐데요. 네. 데살로니가는 오늘날의 그리스의 테로니키라고 하는 지역입니다. 어 당시 그리스 지역은 크게 위에 북부 지방 마게도냐와 아래 남부 지방 아가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데살로니가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데살로니가는 여기에 있습니다. 북부 지방 마게도냐에 있었어요. 남부 지방의 유명한 도시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린도 전후서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마게도니아의 수도였고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어 국제 도시였어요. 한마디로 완전 잘 나가는 도시였다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이렇게 주요한 도시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데살로니가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데요. 먼저 여기 보시면 데살로니가는 애계 바다와 인접해 있는 한구 도시였습니다. 한구 도시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무역과 상업에 매우 유리한

위치였죠.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한구 한구 도시라는 것 외에 한 가지 보너스가 더 있었는데요. 그것은 데살로니가를 지나가고 있는 비아 에그나티아라고 하는 도로 때문이었습니다. 어, 여러분,이 시대는 로마가 세대를 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는데 혹시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로마는 당시에 세계의 중심지로서 군대 이동과 또 무역 확장을 위해서 많은 도로망을 건설했었습니다. 어, 그때 여러 도로가 생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비아 에그나티아라고

하는 도로였죠. 로마로부터 시작해서 데살로니가를지나 어 동쪽 유럽까지 연결하는 군사용 상업용 목적의 아주 긴 도로였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기에 아주 좋은 요건들을 다 갖춘 도시였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뭘 잘 벌었을까요? 네. 돈을 아주 잘 버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에는 무역과 상업 또 군사적 이유로 늘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들기 마련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에는 여러 민족의 어 또 문화가 있었고 또 종교가 공존하는 다민족,

다문화, 다 종교의 특징을 갖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특징을 종합해 본다면 정리해 본다면 데살로니가는 한구와 육로가 잘 발달한 도시였고 이로 인해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유하며 교통이 발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민족이 모여 사는 여러 문화와 종교가 뒤섞인 국지의 도시였죠. 어 우리나라로 치면 어 똑같진 않겠지만 어 부산 정도와 비슷한 도시라고 우리가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이러한 특징을 가진 데살로니가를 어 바울이 몇

차 전도 여행 때 방문했을까요? 3차일까요? 2차 여행에 방문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 회당에서 성경에 보면 약 3주 정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라고 전해집니다. 어 3주라는 시간은 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일들이 적지 않게 계속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곳에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게 되죠.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이 소식은 너무 기쁜 소식이지만 당시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못했어요. 왜냐면 그들이 바울을 아주 시기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이 어떤 일을 꾸미냐면 바울이 이 로마 황제 명령을 감히 거스르고 황제가 아닌 또 다른 왕 예수가 있다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라고 하며 고발합니다. 그래서 그 고발 때문에 로마 어 그 바울과 그 일행들이 어 잡혀가기도 하고요. 좀 수모를 겪게 돼요. 이런 박해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베레아라 표신하게 되는데요.이 이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저기 아덴이라고 하는

곳 위쪽에 베레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에서 멀리 내려오게 된 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베레아라고 하는 곳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코난과 밖해 때문에 그곳을 떠나야만 하게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밑에는 아덴이라고 하는 것으로 또 2차 피신을 가게 되죠. 그런데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여러분 계속 원치 않게 데살로니가로부터 점점점 멀리 피신내야만 하는 이 바울의 상황 속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정말 많이 신경이 쓰였어요. 왜냐면 이제 막 회심한 아주 어린 영적 아이와 같은 그 공동체를 미쳐 다 돌보지 못한 채 미쳐 그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채 떠나와야 했기 때문이었죠. 아직도 이 어린아이들에 가르칠 것이 많고 돌봐 주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몸은 점점 더 멀어가지만 그의 마음은 계속 데살로니가에 있었습니다. 어, 실제로 이런 바울의 마음이 성경에 잘 드러나

있는데요. 내가 그대들에게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한두 번 시도했습니다. 내가 몇 번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길이 가로막혀 갈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 내가 못 가면 누구를 보낼까? 이렇게 생각을 하다가 아덴에서 만났던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낸 거예요. 나 대신 네가 한번 갔다 와. 그리고 이후에 그들은 고린도라고 하는 지역에서 만나서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을 서로 나누게 되었죠. 이때 고린도에서 디모데를 통해 들었던 교회 소식에 대해

바울이 1차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서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상황을 격려했어요. 어 나는 걱정됐는데 생각보다 교회가 잘 어 가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격려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이 겪고 있었던 여러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문제를 돕기 위해서 이 데살로니가 전서라고 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된 거죠. 어 아마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갈 수 없는 그 상황에서 그곳에 있는 그 어린 교회가 이 서신을 통해서 힘을

얻고 또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과연 그 바람대로 이루어졌을까요? 안타깝게도 데살로니가 전서를 보낸이 첫 번째 1차 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에게 교회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것은 그의 바람과 달랐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상황이 이전보다 더 악해졌고 더 악화되었고 그들을 향한 박해와 핍박이 더 심각해졌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이전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그들 안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다는 소식이었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또 급하게 2차 처방으로 데살로니가 후서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전서와 후서의이 사이가 약 1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때 그 당시 어떤 교통이나 상황들을 생각해 본다면 어 바울과이 교회가 아주 급박하게 서신서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소와 후소의 내용이 비슷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 두 건의 책을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눠 보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 주제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혹시 중마 들어 보셨나요? 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굴하지 않는 나의 마음, 나의 의지라는 거죠. 실현이 닥쳐도이 마음만 꺾이지 않는다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그 말에 담겨 있습니다. 마치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같았습니다. 어떤 고난과 박해에도 그들의 믿음이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죠. 바울은 아 나의 그 어린 교회가 넘어지면 어쩌지? 혹시 그들이 그리스도인 되고 나서

받는 어떤 박해와 핍박과 조롱 때문에 이 믿음을 버리고 다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그들 곁에 없는데 혹시 그들이 내가 없는 사이 흔들려서 다 흩어져 버리면 어떡하지?라고 하는 걱정들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 걱정들과 달리 그들은 아주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기쁘게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갔다는 거예요.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갔습니다.이 모습을 볼 때 바울이 고백해요. 아, 너희가 이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아주 기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고난 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또 말씀을 지키셨던 것처럼 그들도 이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바울이 기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바울의 기쁨이 이걸로 끝나지 않아요. 바로이어서 7절에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고 있다라고 기뻐하고 있어요. 여러분, 북한과 남만이 한반도 전체를 가르키는 말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마게도냐와 아가야라고 하는 말은 곧 그리스 전체를 가르키는 것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습이 그리스 저녁에 소문이 나서 더 나아가 그들이 믿음의 본 모범이 되고 있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비록 이 교회는 회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주 대단했어요. 신앙을 본받고

또 심지어는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엉덕게 응급했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아들 곧 장차 내릴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그들은 말합니다.이 이 말씀은 그 그리스 저녁에 소문났던

데살로니가의 교회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줘요. 그런데 그들이 했던 것, 그들이 보여줬던 모습은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신앙에서 아주 기분 중에 기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이었어요. 오늘날에 우리도 지겹도록 말하는 것이죠.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여러분, 이들이 특별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만을 열심히 사랑하고 또 따르고 기다렸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신앙의 기본을 잘 지켰더니 그것이 또 다른 누군가의 믿음을 세우는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에 우리도 이 데살로니가 교회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어 말씀드리고 싶어요. 서로의 좋은 믿음을 본받고 또 본이 되는 신앙 말이죠. 어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본이 됩시다. 본을 보입시다라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아, 나는 부족해서 본받을 건 너무 많지만 사실 본이 될 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바울이 썼던 그 수많은

서신서마다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있어요. 보는 성숙한 리더들만 보이는게 아니라는 점이죠. 신앙생활 오래하고 무언가 많이 배우고 경험이 많이 쌓인 사람들만 본을 보여야 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데살로니가 교회도 신앙이 어린 교회였어요. 그들이 영적 부모가 되어서 본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아이였지만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보일 수 있는 본을 보이고 있었어요. 여러분, 본을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또 소망하며 따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본을 보이는 것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본을 보인다는 건 나의 어떤 특별함을 보여 달라는게 아니에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늘 배우고 있는 우리가 늘 듣고 있는 그 신앙의 기본을 꿋꿋하게 나의 자리에서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비록 그 기본을 조금 지킬 수 있습니다. 그 영역이 좁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좁은

영역 안에서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고 내가 성숙한 영적 부모가 되었다면 그 기분의 영역이 넓어져서 그 넓은 영역 안에서 그만큼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사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죠. 우리도 그렇지만 이 시대에도 아주 대담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기 전에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과 모욕을 당했어요. 여러분, 사실 바울의 일생을 보면 빌립보에서만 고난을 받았나요? 사실 그는 그곳뿐만 아니라 수많은 곳,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바울은 자주 고난과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난 당해야 했던 이유는 사실 하나였어요. 하나님 때문이었죠. 복음 전하다가 그런 일들을 당해야 했습니다. 어, 여러분, 어쩌면 이 고난 또는이 박해라고 하는 것이 바울에게 상처가

되었을 수 있고요. 또는 아주 극심한 트라우마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의 고난은 자주, 정말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하는 극심한 고난이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또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내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바울이 특별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약함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자기 방어의 어 본능이 있어요. 그래서요. 내가 예전에 상처받았던 일 또는 내가 괴로웠던 어 일과 비슷한 상황이 또 일어나는 거 같으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움추어들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왜냐하면 다시 아프고 싶지 않고 괴롭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나를 보호하려는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다른 서신에서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해요.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지역과 지역을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물론 그걸

전하고자 하는 어떤 갈망함도 있었겠지만 바울의 고백을 보면 한편으로는 내가 그곳에 복음 전하면 이번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가 또 어떤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할까? 내가 이번에는 몇 대를 맞아야 할까? 내가 며칠을 더 굶어야 할까 하는 그런 두려움이 그에게도 트라우마처럼 작용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바울이라고 아프지 않고 무섭지 않던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용기가 필요했어요. 그 불꽃같이 살당한 사람에게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거예요. 고난과 모욕을

당할 것이 뻔하지만 복음을 전할 용기 말이죠. 여러분,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똑같았습니다. 여러분, 앞서 말했듯이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그 지배권 아래 있는 도시였고 또 여러 문화와 종교가 존재한 도시였죠.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 주님을 따른다는 것에는 아주 가혹한 대가가 따랐습니다. 여러분, 이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보다 더 어찌 보면 좀 더 어 날것에 고난을 받아야 했거든요. 나의 친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아야 했고요. 이웃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또 적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선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죠. 어쩌면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어 미움받을 용기, 고난받을 용기가 필요한 거 같아요. 여러분 우리끼리는이 믿음의 모습이 아 너무 잘하고 있어. 우리 본받고 싶은 모습이야라고 하는 어 모습이지만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왜 저렇게 사는 거야라고 하며 비아냥거리죠. 여러분 우리 중 그 누구도 미움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미움받을 용기를 왜 내야 하죠? 사랑받기에도 짧은 이 인생 말이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그럴 줄 알면서도 우리가 미움받을 용기를 내서라도 주님을 따르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왜 따르고 계십니까? 바울은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이 일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인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곧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이 땅에 이끌고 오셨던 예수님의 모습도 그분의 삶도 이랬기 때문이죠. 여러분,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미움 받으셨죠.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너희가 나를

믿으면, 너희가 나를 따르면 내가 미움받은 것처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야라고 가르치셨죠. 여러분, 예수님도 그 나라를 이끌고 오시면서이 땅에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는 십자가가 있었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두렵고 너무너무 견디기 힘든 버거운 그런 고난이었어요. 하지만 그분도 용기를 내셨죠. 그러나 여러분 복음서를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의 용기가 고난을이기는 용기였나요?

그렇지 않았어요. 예수님의 용기는 고난을이기는 용기가 아니라 고난받는 용기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실패한 것처럼 보았죠.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고난받을 용기를내어 십자가에서 침묵하며 그 십자가를 감당하셨을 때 아이러니아도 그분은 하나님 나라 왕의 보좌에 앉으셨으며 승리를 선포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고난받을 용기를내어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에요. 세상은 아니 왜 미움받을 용기까지 내야 돼?

말하지만 우리는 그런 말도 안 된 용기까지 내어서라도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폭력을 행사하죠. 폭과 폭력과 우리를 향한 조롱과 또 여러 가지 멸시를 우리에게 퍼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비폭력으로 조용히 침묵 가운데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우리가 그 고난을 대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세상은 고난으로 우리를 공격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인내로 견디며 고난의 반전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이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셨던 십자가의 반전처럼 말입니다. 우리 말씀을 한 더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은 공의를 베푸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자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아 주시고 괴로움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 주십니다.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 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에 사여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처발하실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 앞과 주님의 권능의 영광에서 떨져 나가고

영원히 멸망하는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어, 제가 성경을 보면서 어, 느낀 것은 어쩌면 주님의 날은 대반전의 날이겠다라는 거였어요. 여러분, 오늘 말씀에도 기록하고 있죠.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이들이 그날에 승리의 면류관을 씁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 같았던 이들은 오히려 그날의 공의의 심판때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괴로움을 당했던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참된 안식에 거하게 될 것이고 주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날이 바로 주님의 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복음 때문에 또 믿음 지키려 지키려다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고난이 영원하지 않고 반드시 그것이 우리에게 승리로 반전될 그 역전의 날이 오기 때문이죠. 그러 여러분 미움받을 용기, 고난받을 용기를 내셔서이 하나님 나라의 역전을 경험하십시오. 바울도 성도들을 향해서 그래서 이렇게 권면해요.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받자.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게

하자. 그래서 역전의 승리를 맛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자라고 말이죠. 어, 저도 가끔 어,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생각을 종종합니다. 어, 우리 주님이 어디만큼 오셨을까? 오고 계신다고 하시는데 어디만큼 오셨을까? 주님은 대체 언제 오시는 걸까?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저도 막 이리저리 이렇게 흔들리던 제 마음이 다시 딱 중심을 잡는 거를 여러 번 경험합니다. 그래 우리 주님이 꼭 오신다고 하셨는데 반드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지금 오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어리석게 돌아서지 말자. 여기서 흔들리지 말자라고 하며 제 마음의 중심을 잡는 거죠.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지만 우리가 죽기 전에 주님이 안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때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마지막 때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믿음을 지켰다는 거예요. 여러분,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처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부이 지키십시오. 중요한 것은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곧 오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주제를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거룩하게만 자라오. 네. 모든 믿음의 여정에서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죠. 데살로니가 교회는 특별히 영적으로 이제 막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장은 더더욱 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그 자녀와도 같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 계속 성장해야 해라고 가르치는데요. 바울이 어 서신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여러분께 부탁하며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배운 대로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어, 여러분, 부모님들이 자녀를 낳고기를 때 어떤 것을 바랄까요? 여러분 자녀에게 어떤 것을 바라십니까? 네, 지금 건강이 막 여러 번 들렸는데요. 네. 대부분 부모님들의 마음이 비슷한 거 같아요. 그냥 건강하게만 잘하으면 좋겠어요. 올바르게만 잘하으면 좋겠어요. 하는 마음이죠. 여러분, 부모님들이 그냥

우리 아이가 아, 유가 너무 힘들어요. 그냥 빨리빨리 크기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부모님들은 사실 많이 없으신 거 같아요. 물론 좀 다투면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건강하게 자으면 좋겠어 하시죠. 물론 아이가 또래보다 좀 작은 거 같고 느린 거 같으면 걱정이 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이가 조금 천천히 크더라도 때로 어떤 부분에서 좀 더디고 느리더라도 건강하고 올바른 모습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 공통된 부모님들의 마음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장이라는 것은 그저 빠르게 잘한다고 중요하지 않거든요.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자라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이 성장의 방향성을 가르쳐요. 속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어떻게 자라갈 것인가를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또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린 자녀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배웠던 그 올바른 길로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성도들에게 가르쳤던 그 방향성이 무엇이었냐면 바로 거룩함이었어요. 여러분 거룩함이 무엇이죠? 거룩하다는 건 뭘까요? 왠지 거룩하면 뭔가 이렇게 새하얗고 성스러운 뭔가 광체가 뭐 찬란한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사실 거룩을 쉽게 설명하자면 구별되는 거예요. 세상과 다르게 사는 그 구별된 모습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 성도들에게 너희가 이제 정말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함을 가져야

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곧 자녀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성장의 모습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더러움에 빠져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우리를 자녀 삼으실 때 거룩함에 이르도록 엎으셨대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자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건강하게만 자라줘라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향한 마음은 거룩하게만 자라줘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우린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도록 나아가고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역에서 구별되한 모습은 너무 많아요. 사실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다 구별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여러 영역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오늘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취약했던 것을 하나 더 가르치고 있어요. 바로 순결함이었는데요.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과 같이 세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 이런 일에 탈을 하거나 자기 교를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 순결함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성적 순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왜냐면 데살로니가라고 하는 이 지역 자체가 성적 타락에 만연하기로 유명한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 학자들은 그 도시가 그렇게 타락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 때문이었다고 출론하는데 첫 번째는 이 지역이 헬라와 로마의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헬라와 로마의 문화는 성적 쾌락을 포함한 모든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화였습니다. 물론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경향성도 덜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쾌락을 추구하는 문화였어요. 재밌게 살아야지. 우리 누리면 살아야지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였습니다. 더욱 여러분, 이때 가장 강력했던 로마의 문화는 어땠죠? 지금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참란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종교의 성적

의식이었는데요. 어 데살로니가는 다민족 도시답게 또 국제 도시답게 아주 많은 이방 종교가 들어와 있었어요, 여러분. 그런데 문제는 그냥 종교가 많은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종교들, 그 이방의 종교들 대부분은 제사의 대부분 성적 행위가 동반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어요. 어, 흔히 신전 창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이 시대 사람들은 그 신전 창기들과 내가 어떤 성행위를 할 때 내가 신과 교감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믿는 신의 신전 안에서조차

무분별한 성적 행위가 일어나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왜 이게 나쁜 거야? 난 지금 나의 신과 교감하고 있어. 내 신과 대화하고 있어라고 하며 정당성을 찾게 되었었죠. 세 번째 이유는 당시 데살로니가 어이 도시가 한구 도시였다는 거예요. 한구 도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도시 안에 흔했던 사회적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어 한구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 또 선언들 군인들이이 한구를 수없이 오았을 거예요. 근데 그런 과정에서 이들은 매춘을 즐기기도 했고 그 시대의

풍습상 그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또 이때는 지금과 같은 기술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가 빠르고 튼튼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한 번 배가 뜨면 그 배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심지어는 배가 파선되어 돌아오지 못한 일들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집안에 남편들이 바다로 나가 몇 달씩 집을 비우는 일들이 비일비지했겠죠. 그러면 그 남편이 집을 떠난 그 시간 동안 그곳에 남아 있는 남자들이 서로가 서로의 아내를

탐하는 끔찍한 일들이 어 종종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여러 이유가 뒤섞여서 데살로니가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해요. 너희는 거룩함을 어 쫓으며 음행을 멀리해라. 너희의 아내를 소중히 여겨라. 이방 사람들처럼 그런 세욕에 빠지지 말라라고 말이죠. 여러분, 또 기독교는 그 당시에 있던 이방 종교와 다른 종교였습니다. 그들처럼 성적 행위를 추구하거나 그런 것에서 어떤 종교적 의미 또 정당성을 찾을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종교였어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아라고 단호이 경고하는 것이죠. 어, 여러분, 지금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야 성적으로 민감한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아니, 근데 이 정도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것도 가르쳐야 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아니, 데살로니가 교가 그렇게 믿음이 좋았다면서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시대에는 그것이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느끼는 것처럼 그 시대에는 이런 성적 타락이 타락이라고 인식되지 않았거든요. 내가 즐길 수 있는 여러 문화와 재미 요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어 그 시대를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화를 즐기고 내가 오락을 즐기고 내가 또는 어떤 음악을 즐기는 것처럼 그냥 그은 요소 중에 하나였을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이 시대에서 성적 순결을 지킨다는 건 곧 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 문화를 거스르는 일이었어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부자연스럽고 당연하지 않게 여겨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바울이 가르치는 거룩하게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죠. 여러분, 우리는 구별되고 있습니까?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단순히 성적으로 순결해라는 것을 가르치는 걸까요?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으니까 나는 순결해라고 우리가 떳떳할 수 있나요?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그것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이 시대에는 이게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였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했지만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도 우리가 세상에 흘러가고 있는 그 문화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이 시대와 이 문화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거슬러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세상이 말하는 당연함 중에 어떤 것을 당연하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이 세상의 문화에서 나는 무엇을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며 그것을 거스르는 순결함을 지키고 있지. 여러분,이 질문이 오늘이 말씀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순결함이이어서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데요. 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 또한 정말 뗄려야 뗄 수 없는 영역이죠. 교에서도 수없이 사랑을 말하고 또 노래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보면 반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은 질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 사랑인 거 같아요.이 안에서 우리는 사랑을 가르치고 막 노래해요. 사랑하자고 말해요. 그러나 정작 많은 순간에서 세상은 우리를 향해 너희 사랑 없어. 너희는 사랑 말로만 하잖아라는

질를 받기 때문이죠. 여러분,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영역에서 칭찬을들은 교회였대요. 바울이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그니까 여러분이 지금 보이고 있는 그 사랑에 대해서는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고 하시는 그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 자매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린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말합니다. 당신들이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더 이상 뭐 말할 필요가 없겠군요. 이미 너무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사랑은 말로만 한 사랑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랑입니다라고 고백하죠. 대체 우리의 사랑과 이들의 사랑이 어떤 모습이 달랐을까요?이어서 성경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잡힐 때가 없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배웠던 사랑은 서로 사랑을 나누고 또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풍성하고 넘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요? 나누고 베푸는 사랑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초대교회 모습에서 찾았는데요. 사도행전은

초대교회를 이렇게 기록해요.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냈던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이 신약 시대에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의 공동체 모두에게 계속 주어졌던 주님의 명령이었어요. 우리 신명기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내 마음을 원악하게 하지 말며 내 손을 움켜지지 말고 반드시 내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내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내 땅에 내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내 손을 펼치니라. 여러분이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의

나라다라고 말하죠. 근데 그 안에는 어 가난한 자가 없는 신비한 삶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도 우리에게 말해요. 가난한 자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을 거라고요. 지금까지도 없었고 그런 시대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너희가 너희의 손을 펴서 그들을 도와주라고 말입니다. 어, 여러분, 어쩌면 세상을 잘 살펴보면 세상은 빈부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서 애쓰는 거 같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그 조금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억울함 속에서 절규하며 살고요. 부한자들은 이미 부름배를 더 불려보겠다고 편법과 부정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너무 손쉽게 저지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속에서 구별되어 살아가는 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가진 것을내어 주고 나의 곡간을 기꺼이 열어서이 격차를 줄이는데 자발적으로 힘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이 격차가 어디 빈부 격차뿐일까요? 제가 단편적인 예로 빈부 격차를 드렸지만 세상은 이 격차를 벌리기 위해 늘 애쓰는 거 같아요. 당신과

나사의 격차를 벌리고 더 높이 올라가겠다고, 더 많이 가진 곳으로 올라가겠다고 늘 애습니다. 그리고 그 격차를 조금이라도 좁혀질까 전정 긍긍하며 유지하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살아가죠. 여러분,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모든 감각을 어 불을 축적하고 성공과 명예를 높이 쌓려는이 격차를 벌리려고만 노력하는 그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축적하고 쌓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고 나누는 기꺼이 베푸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이런

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그래서 반드시 사랑이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사랑이 없다면 절대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벌어진 격차를 좁히려면 소외되고 힘없고 가난한 병든 자들이이 격차를 좁힐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그걸 좁힐 힘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격차를 좁히려 누가 좁혀야 합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한 더 많이 가지고 더 강하고 무언가 더 많이 누리고 있는 자들이 그 자리에서 떠나서 그 가난한 자들에게로 나아갈 때 내가 내 것을 내어주고 내가 내 것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그 격차를 줄이려는 자발적 애음이 있을 때 이것이 일어난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 일에는 반드시 사랑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왜 격차를 줄여야 하죠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거든요. 사랑이 없이는 절대 내 손을 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의 방식은 사랑입니다. 저는 바울에게 너희가 더 이상 쓸 것이 없다. 너에게 쓸 것이 없어라고 극찬을 받은 이 교회라면 그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작지만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적인 문화만 거스르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이제 그동안 너무 자연스럽게 돈을 벌고 썼던 방식도 바꿔야 했습니다. 이웃을 대하는 방식도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 많은 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지 않아 이건 옳지 않아라고 말하며 역행하며 살아야 했다는 것이죠. 예전에는 돈만 된다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을 거예요. 얼마나 그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 돈된 아이템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돈이 되어도 어떤 사업에는 손을

떼야 하는 일들이 그들 안에 있었겠죠. 불리하지만 사회적으로도 만연해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타락했지만 타락한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부당 이익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만약 말씀이 어긋난다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직업을 바꾸기도 했겠죠. 그들의 삶의 기준이 이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말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경제적 어려움만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그저 가난만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와 다른 세상과 다른 구별된 선택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갈 때마다 점차 사회로부터 더 많은 소외와 더 많은 외로움과 더 많은 비난과 미움을 감당해야 했을 거라고 봐요. 여러분, 이런 고난이 그들에게 닥쳐올 때, 가난과 결핍과 소외가 그들의 삶에 스며들 때 그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배웠던 사랑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로부터 배웠던 그들이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배웠던 그 나라의 삶을 기억했다는 거예요. 형제의 가난을

나의 가난처럼 여기고 자신의 지갑을 열었을 것입니다. 밤의 결핍과 그 외로운 소외감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집에 대문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 초청하며 품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형제 자매 한 가족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자기 가족들을 위해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그리고 또한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손을 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감정의 사랑, 그냥 세레나를 불러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랑의 수고를 동반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그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서 자신들끼리만 그렇게 사랑하지 않고 온 마게도니아에 있는 다른 성도들, 다른 교회는 성도들까지도 돕고 품으며 사랑했을 거라고 말해요. 고난이 닥치면 가서 도와주고 어려움이 닥치면 그들을 향해 헌금을 모아서 보내 주는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죠. 함께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으니 당신의 아픔이 이제 곧 우리의 아픔입니다라는 그 믿음이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손을 펴고 우리의 곡간을 열어야 합니다. 그게 돈이든 섬김이든 중부 기도든 무엇이든지 우리의 가족이 곤란할 때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권면해요. 이만큼이면 충분해. 아, 이만하면 됐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함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에요. 부족한 것은 채우고 잘 잘하고 있는 것도 나이 정도면 괜찮잖아라며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주님 담기를 힘쓰는 그 균형이 우리 성장에 필요하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주제를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소망하는 주님의 날. 네. 예, 주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인데요. 어,이 재림이라고 하는 주제는 특별히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이 교회 안에 이 재림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어, 궁금증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는데요.

어,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죠? 때로 죽음은 삶의 단절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아마도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이런 질문이 생겼던 거 같아요. 어, 아직 주님의 재림이 오지 않았는데 어,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은 주님 못 만나는 거 아니야? 어떤 그런 궁금증이요.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래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들을

잠든 사람들이라고 표현해요. 어,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세상이 보는 것처럼 단절이 아니기 때문이죠. 여러분,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혹시나 이미 죽은 사람들이 그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를 믿었지만 이미 죽어버린 그들은 주님을 못 만나는 거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의 염려를 잠재우면서 오히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앞설 거야. 그 잠든 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짐을 볼 거야. 그럼 걱정하지 마라고 말해

줍니다. 주님의 날이 오면 그 재림의 때가 임하면 우리도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부활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 살아 있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날이 임했을 때 이미 죽은 사람들이나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죠. 여러분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들어가지 못하는가는 내가 어 실제적으로 죽었는가

살았는가이 생사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영적으로 죽어 있었는가? 내가 영적으로 살아 있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죽음 앞에서 너무 슬퍼만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것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해요.이 질문과 함께 이 성도들의 두 번째 질문이 있었는데요. 바로 그럼 재림의 날이 언제죠라는 질문이었어요. 여러분이 질문을 들었을 때 바울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네. 나도 모르지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 재림의 시기를 궁금했어요. 대체 언제 오시는 걸까? 그럼 주님은 그런데 바울은 그 질문에는 그건 나도 모르고 그 누구도 알 수 없어라고 아주 심플하게 답을 합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그들이 묻지 않았던 거는 아주 열과성을 다해 답하기 시작해요. 함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여러분, 바울이 성도들에게 더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재림의 날이 언제일까가 아니라 그 재림의 날을 어떻게 준비할까였어요. 우리가 이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어 말도 잘 본 그림이 있죠.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이 사이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 살아가야 하는가를 바울은 가르치고 싶었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말씀에서 잠잔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죽은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과 다릅니다. 여기서 이 잠잔다는 표현은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속해서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깊은 잠에든 상태를 의미하는 거죠. 바울은 그 영적 잠에서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무장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미 왔으나 아직오고 오자한이 사이의이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에겐 박해와 핍박, 수많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나는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싶은데 세상은

자꾸 그 기다리는 것을 방해하죠. 기다리지 마"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회유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것에지지 않기 위해서 너희는 깨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으로 무장하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무장이 필요하죠. 왜냐면 아직 우리도 이 사이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주님의 진리를 굳게 믿고 사랑함으로 주님의 제자임을이 땅에 드러내 살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사는 것. 이것이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무장하는 삶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로 우리 옆 사람에 함께 말해 볼까요? 정신 차립시다. 정신 차립시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네. 여러분, 잠에서 깨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십시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네. 지금 잡는 상태로 들어갈 분이 몇 분 보였어요. 네. 바울은 이처럼 재림에 대해 너무너무 잘 설명해 줬지만 오히려 데살로니가 후서를 보면 성도들은 재림에 대해 혼란이 더 심각해졌어요. 왜냐하면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야, 내가 바울 사도한테들은 이야긴데 야, 주님 재림하셨대. 내가 바울 사도 편지를 받았는데 아, 그 재림 그거 다 뻥이래. 마치 바울이 보냈다고 하는 것처럼 4층에서 거짓된 메시지를 퍼뜨리는 세력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자 급하게 2차 데살 후서에 재림에 대한 예를 써서 보내게 된 거죠. 바울이 고백합니다.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내가 말했다고 하는 거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 바울은 주님의 날에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다시 강조해요. 두려워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어. 뭐냐? 그 데살로니의 성도들은 아니 바울이 분명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랬는데이 옆 사람은 바울이 왔다고 말했대요. 그러니까 이 혼란 속에서 그럼 대체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거지? 나 어떤 신앙 지켜야 되는 거지? 혼란스러웠겠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거죠. 속지 마. 아직 오지 않았어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면서 그날이 오기 전에는 먼저 사람들이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불법자가 나타나야 된다라고 말해요.이 불법자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적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이것을 새한글 성경에서는 사탄의 개라고 표현하는데요. 사탄의 하수인 또 종노릇한 어떤 세력을 의미하는 거죠. 그렇다면 그 불법자는이 마지막 때에 주님 오시기 전에 이 땅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먼저 이 불법자는 신이라고 불리거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에 대항하고 자신을 가장 높이 올립니다. 그리고 성전에 앉아서는 어 내가 하나님이야라고 주장한대요. 여러분,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편에서는이 존재가 당시의 자신을 나 제스의 아들의 아들이야라고 말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던 안티오쿠스 사세 에피파네스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바울이 이야기한 어떤 사건이나 사람보다 마지막 때에 자신을 신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어 여러분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초림 이후부터는 우리는 계속 이미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간 동안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했던 반역자이 불법자들은 끊임없이 출연하고 사라졌습니다. 그게 어떤 통치자였을 수 있고요. 또는 어떤 무리이거나 어떤 세대이거나 국가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를 살아갔던 그리고 지금도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이 불법자의 어 고난이 불가피하죠.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바벨론이 그랬고 로마가 그랬고 또 지금은 만문 숭배와 성공주의와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 불법자들이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온갖 거짓과 속임수로 사람들을 속인다고 말해요. 마치 그들이 영원할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영원했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거대한 성 바벨론도 천하를 숨죽이게 만들었던 그 무적의 로마도 역사 속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죠.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그 불법자들은 절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반드시 그 모든 것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죠.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때 불법자가 나타날 더인데 주 예수께서 그 입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체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땅의 불법자들은 성도인 우리를 너무

괴롭게 해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불법자들은 자신들이 신이라고 말하며 자신의이 시대가 영원할 거라고 속이고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쓰죠. 그런데 여러분, 그런 강력한 것처럼 보였던 그 존재들을 주님은 단지 있김만으로 그분이이 땅에 오시는 그 광체만으로도 심판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게 무엇이었을까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강력해 보인다고 겁먹지 마십시오.이

이 시대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끝이 옵니다. 우리 주님이 있김만으로도 그분의 그 빛만으로도 그 모든 불법자들을 심판하실 날이 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재림은 어 심판의 날이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따랐던 우리의 통치자가 오셔서 진짜 왕이 오셔서 그 모든 불법자들을 물리치실 소망의 날이에요. 바울은 이걸 말해 주는 거예요. 너희 교회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이어서 한

가지를 더 덧붙이는데요. 바로 게으른 자들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어, 여기서 게으르다는 것은 어, 정상적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당시 재림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혼란 일부 사람들은 어, 주님 곧 오실 건데 왜 일을 해야 되지? 왜이 땅에서 이렇게 막 고생하며 열심히 살아야 돼? 라는 생각을 하긴 했들을 하곤 했었거든요. 사실이 문제는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기록되어 있어요. 그 잠깐 언급되지만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바울이 다시 한번 후설을 통해

권면하는 거죠. 바울이 자신의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알려 주는데요. 어, 성도들아, 나도 양식을 거저 얻어 먹지 않았어. 나도 그 누구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한 밤낮으로 일하는 본을 직접 보였어라고 말하죠. 바울은 그 힘든 선교 여행을 수없이 다니면서도 어 텐트를 만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자비량으로 선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 정도면 그가 그렇게 사역할 정도면 교회들로부터 후원받아서 그냥 사역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그럴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라고 말하죠. 자신이 땀을려 본 돈으로 생활하고 또 복음을 전하고 예수을 섬겼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 지금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런 사람들이 덜어 있었던 거 같아요. 막 오직 신앙, 오직 기도 막 이런 거 외치면서 본인의 삶은 정작 방치하는 사람들이에요. 실제로 주님을 기다린 다음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저는 어릴 때

종종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옳지 않다고 바울이 가르쳐요.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 전해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신앙이 좋다는 것, 주님의 나를 소망한다는 건 오늘 나의 삶을 열심히 사는 거라고 알려 주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고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일상이 떨어질 수 없습니다. 정말 좋은 신앙인이 되고 싶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 먼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요.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요.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가정 주부라면 열심히 요리하고 집안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거예요. 그저 예배만 잘 드린다고,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나 매일 묵상한다고 그것만으로 좋은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바울의 삶을 통해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그 안에 산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일한 것을 통해서 이웃을 섬기는 일에 힘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이 전해진 일에 힘쓴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십시오라고 하는 건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거예요. 누구나 시키지 않아도이 세상 살려면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울을 통해서 그 삶을 통해 본받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피만 채우기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어 본받을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 여러분 우리는 오늘 크게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어, 첫 번째 주제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믿음이었죠.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담대한 용기를 냈었어요.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고난받을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렵고 힘들더라도 함께 용기내어 깊힐코 그들의 믿음을 사수해 내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여러분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저 나를 지키는게 아니거든요.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때로 눈물나고 지치더라도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목숨 잃을지라도 그럼에도 주님과는 떨어질 수 없었던 주님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신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겐이 꺾이지 않는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겐이 꺾이지 않는 신실함이 있으십니까? 우리를 회유하려는 달콤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 때문에 겪는 고난 속에서도이 길을 끝까지 가고야만 하는

이 단단한 믿음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는 있나요?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신 그날까지 신실하게이 믿음을 가지고 버티고 견디는 것인 줄 어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반드시 역전의 승리를 들고 오신다는 지금 오고 계신다는 우리의 눈물을 다끌어 오신다는 그 소망으로 버티며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거룩하게만 자라다오였는데요. 데살로니가는 그들의 어 문화를 역행하며 순결함을 배워야 했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의 삶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이 세상의 문화를 역행하며 주님께 배워야 할 순결함은 과연 무엇인가? 단순히 난 성적으로 자유해. 여러분,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나의 재정의 영역에서, 관계의 영역에서 나의 노동의 영역에서 나의 가정에서 나는 과연 어떤 순결함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결단하고 바꿔야 할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 고민하십시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속에서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 바로 이러한 구별됨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또한 자신들의 손을 기꺼이 펴는 사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제의 어려움을 자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나의 손을 펴서 나누는 사람들이었어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무조건 돈을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공동체 안에는 누군가에겐 위로의 말이 필요한 상황일 수 있고요. 누군가에게

함께하는 그 교재가 간절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겐 그를 위해 함께 울며 기도해 줄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상대의 필요를 기꺼이 나로 채우는 것, 자발적으로 내가 그의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손을 펴는 것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이런 걸 필요해라고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필요를 내가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손을 펴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너희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피한 방을 안 섞인 남이잖아. 라고 말할지 모르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말합니다. 아니 우리는 서로 주님의 피를 나눈 한 가족이야라고 말이죠. 오늘 여러분은 누구에게 어떤 손을 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자발적으로 우리의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에 감히 흉내 흉례조차 낼 수 없는 세상에선 찾을 수 없는 그런 구별된 사랑을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사명 선언문마다 고백하는 것처럼 세상에는

없는 그런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그 스타일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따라 거르시고 거룩함으로 성장하십시오. 아직 오지 않은 그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는 그날 우리도 거룩하신 아버지를 닮아 온전히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주제는 소망하는 주님의 날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주님을 대적하는 불법자의 세력들이 있었죠. 통치자, 가치관, 사회체제, 문화, 교육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인 것만냥

주인 노릇을하였지만 그 누구도 영원하지 못했어요. 불이 마르고 꽃이 시들듯이 그들도 역사 속에서 시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 삶에 존재하는 불법자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도 머지하나 쓰러지고 말 테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 삶이 혹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온 세상의 창조주의자 진정한 왕이신 주님께서 그들을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날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인 답답게 끝까지 끝까지 살아가십시오.

어 여러분 바울이 성도들에게이 두 편지를 쓸 때요. 그들의 어려운 그 박해당하는 상황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미숙함 연약함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그가 아주 당당하게 요구해요.지지 마. 끝까지 견뎌. 버텨야 돼. 너희는 할 수 있어. 그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사실 딱 하나였어요. 주님께서 그들과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이 잘해서 그들이 무언가 더 노력해서 그들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죠.

우리도 날마다 부단이 있으면 살아야 하죠. 그러나 바울이 그것보다 더 의지했던 것은 이 땅에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고 마침내 그날에 우리를 온전케 세우실 그 주님을 의지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에 이렇게 적어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거룩하고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전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영과을 전하게 하게 하셔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한 자주 주시기 바랍니다. 온전하게 살고 싶고 거룩하게 살고 싶은 우리지만 연약하고 지쳐서

못할 때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지해할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세워가고 계시고 마침내 세우실 거라는 것을 우리는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귐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은 완전히 의지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믿고 끝까지 함께 가는 거예요. 중간에 폭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