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클로버라는 식물을 좋아합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가끔 머물러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재미가 있습니다. 원래 클로버는 세잎인데, 가끔 네잎으로 이뤄진 클로버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찾습니다. 그것의 꽃말은 ‘행운’이거든요. 우리는 행운과 같은 놀라운 일이 내 삶에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네잎-클로버를 찾습니다. 그런데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면, 내가 밟고 있는 수많은 세잎-클로버의 존재와 가치를 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이 여겨지는 그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을 쫓다가 정작 내 삶의 ‘행복’들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그 뒤로 네잎-클로버보다 세잎-클로버를 더 좋아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것과 유사한 교훈이 있다면, ‘기적’과 ‘일상’의 관계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과 같은 일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고백하기 쉽습니다. 내 삶에 기적과 같은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이 거부할 수 없이 경험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기적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많아야 몇차례 일어날 뿐입니다. 그 순간들에서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느끼는 체험 위주의 신앙을 추구하게 되면, 그 시간 외의 모든 일상의 시간들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신앙의 약화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세잎-클로버와 같은 ‘일상’이라는 단어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일어나는 ‘기적’에 기대어 살아가는 신앙보다, ‘일상’의 시간 속에서 아주 평범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고백되는 신앙이 더욱 아름답고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은 일상적인 삶에도 계시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함께하고 계심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 성경 속 인물 중 우리에게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그 이야기가 너무 인상 깊어,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전혀 인상적일 것 없는 아주 평범한 우리로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저 별세계의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어느 외딴
마을에 사는 두 과부와 한 농부의 작은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실패한 인생이라고 스스로를 단죄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 한 가족에게 나타난 불행으로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여진 책은 <에스더>와 <룻기>인데, 에스더는 그래도 왕비였다면, 룻은 이방여인으로서 모태신앙도 아닙니다. 즉, 선천적으로 신앙에 끌렸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자신도 모르게 구원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요란스럽지도 않고 도드라지지도
않지만, 이야기의 완결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배역을 맡게 됩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숨어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좋습니다. 우리의 삶 대부분에서 하나님은 숨어계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도 ‘룻기’를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진지하게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수업에서 <룻기>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교수님은 ‘씨줄’과 ‘날줄’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씨줄은
가로로 그어진 선으로서 성경의 씨줄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 혹은 <하나님의 사랑, 구원, 복음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씨줄에 세로로 그어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더 작게는 하나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날줄이 닿아 있는 것이죠. 오늘 룻기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살펴보며, 그 날줄 하나하나를 꿰고 있는 하나님의 씨줄과 그 연결을 통해 이뤄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룻기 1장 (인생의 희비)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기의 배경이 언급됩니다. 사사시대이죠. 사사시대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암흑기’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영적 암흑기이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는데, 하필 이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게 됩니다.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흉년으로 인해서 고향을 떠나서 모압 땅으로 가게 됩니다. 모압은 사해를 기준으로 반대편 땅입니다. 모압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어서가 아니라 상황에 쫓겨서 잠시 가게 된 것이죠. 제가 성도님들 심방을 하게 되면, 절반 이상의 분들이 하시는 얘기가 “제가 원래 양주에 이렇게 오래 거주할 예정이 아니었는데...”라는 이야기입니다. 각각의 사정으로 이곳에 오게 되신 것이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에 ‘거류하였다’는 표현 자체가 ‘잠시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먹을 것을 해결하면 곧 고향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마음이었죠. 룻기 1장에서 나오미의 고백을
보면, 그들은 경제적으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다가 비어 돌아오게 되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오히려 이 집안이 모압으로 이주할 때 풍족했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들의 초점이 ‘먹고 사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먹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가는 것이 이들의 선택이었고, 그것이 이방 땅인 모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남편이 죽습니다. 엘리멜렉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오미를 키워야 할 두 아들이 있는 과부의 신세로 전락시킵니다.
사실, 엘리멜렉이 조상들에게 받은 유업인 유대 땅을 포기하고 도피한 것 자체는 성경의 관점에서 부정적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멜렉의 죽음을 이 가족은 하나님의 형벌로 받아들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그 땅에서 아내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모압 땅이 그렇게 나쁜 기억은 아닐 수 있겠죠. 두 아들은 모압 땅에서, ‘룻’과 ‘오르바’라는 여인을 만나서 모두 결혼하게 됩니다. 룻기 4:10에 근거하여 볼 때 ‘말론-룻, 기룐-오르바’가 부부입니다. 아들들의 결혼은
나오미의 마음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남편은 떠났지만 그래도 며느리들이 생겼으니까요. 하지만 두 여인 모두 자녀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고민인데, 더 큰 아픔이 이 가정에 찾아옵니다. 바로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이주하고 10년쯤 되던 때에 모두 모압에서 죽게 됩니다. 모압 땅에서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고, 이 집에는 ‘나오미, 룻, 오르바’라는 여인 셋만 남게 됩니다. 슬픔에 잠겨 있던 나오미.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마침
들려오는 소식이 베들레헴이 이제는 양식이 더욱 풍족한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나오미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룻기에서는 매우 드물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상징하는 단어 ‘파카드’를 사용합니다. (룻 1: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돌보시다’라는 단어 ‘파카드’는 룻기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어쩌면 흉년을 피해 이방지역으로 이주하거나 그곳에서 결혼한 행위는 모두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오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룻기에서 나오미가 유대 땅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이 사실 우리의 문제의 해결책이 됩니다. 온 인류가 경험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은 항상 옳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에 고향으로 가는 여정에는 두 며느리가 함께합니다. 그러나 길을 돌아가던 나오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룻 1: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과부가 되어버린 세 여인. 나오미는 자신에게는 고향길이지만,
며느리들에게는 남편도 없는 이방 땅 유대지역으로 가게 하는 이 길이 편하지 않죠.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무엇일까요?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문맥에서 이 이야기는 다시 결혼하여 새출발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며느리들 모두 나오미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거절합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진심이 전해지자, 며느리들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부둥켜안고 놓지 않습니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붙좇았더라’라는 말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더욱 달라붙었다’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다바크’가 여기에 사용됩니다. 창세기에서 이 단어는 이때 사용되었는데요.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표현하는 단어이고, 여기서는
마치 룻이 어머니를 남편과 같이 모시겠다는 표현인 셈입니다. (룻 1: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고대사회에서는 지역마다 수호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 지역의 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죠. 룻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어머니를 따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룻이 자기 친정으로 가는 것은 모압의 신에게 속하여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몇 가지 생각이 필요합니다. 1) 룻이 나오미를 향해서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나오미가 룻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저 정도로 떠날 기회를 주었다면 마지못해 떠나면 됩니다. 오르바가 꼭 잘못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함께하는 삶을 택합니다. 이것은 나오미의 인품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에서 신앙적 목표를 물으면, ‘자신의 삶을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계신다면 ‘나오미’의 태도, 말, 삶을 연구해 보십시오. 그녀는 일단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합니다. 저는 영성은 곧 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성이 곧 영성은 아닐 수 있습니다. 본래 착한 성품의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영성이 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설령 우리가 여러 이유로 조금 모난 성품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 다듬어지기 시작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으로 온전히 전환되었다면 그 삶은
주님의 성품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너 요즘에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셔도 됩니다. 그 변화의 끝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룻의 결정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그녀 역시 상처 입은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룻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지만, 어쩌면 그녀 또한 남편을 잃어버린 자신의 삶 속에 유일한 희망이 나오미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룻의 고백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여호와’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어머니에 대한 것뿐이 아니죠. 어머니가 죽은 이후에도 베들레헴에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아직 어릴 수 있지만, 그녀는 이 결정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할 만큼, 자기 삶의 여정을 확고히 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이러한 선택을 하시는 룻에게 어떻게 행하실까?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서면 하나님이 돌보신다.” 풍삶초를 하면서 자주 하는 말입니다.
룻의 대답은 나오미 뿐 아니라, 하나님이 듣고 계십니다. 룻기를 가르치신 교수님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유대 땅을 떠난 것은 긍정적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곳으로 갔기에 룻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실수는 없다. 실수도 하나님의 손 위에서 실력이 된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 배운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택했고, 이것이 그녀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1장 마지막 절은 이런 여운을 남깁니다. (룻 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추수’ 때는 과부들을 위해 밭모퉁이는 추수하지 않고 남겨둡니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않습니다. 떨어진 것은 약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한 율법이 지켜지는 하나님의 품 안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되었으니, 나오미와 룻에게는 조금은 희망을 주는 말씀이죠. “우리의 순종은 누군가를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의 방편이 됩니다.” 룻기
2장 (룻의 신실함) 우리가 룻기 2장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는 2가지 제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1) 고엘 제도 (레 25: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여기서 말하는 ‘기업 무를 자’는 ‘고엘’이라고 불리는 친족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문별로 땅을 분배받았고, 부채에 대한 담보로 땅을 잃었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그것을 대신 해결해주어, 땅을 지켜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의무는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안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저당 잡힌 가문의 재산을 되찾고, 친척을 부채 노예에서 해방할 책임을 갖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무사항은 아니기에, 철저한 가족 안의 자발적 헌신을 통해 진행됩니다. 가장 가까운 친족이 고엘의 첫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수혼법(계대결혼법) (신 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신 25: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가문의 대를 잇게 해주는 제도입니다. 형이 후손이 없이 죽게 되면 그의 형제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책임지며, 그 안에서
아들을 낳으면 형의 족보로 넣어서 대를 이어가는 제도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38장에서 야곱의 아들 중 유다의 집에 이 일이 있습니다. 맏아들 에르가 죽자, 그의 동생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 다말을 책임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동생은 형수와 동침은 하되, 형의 가문에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바닥에 사정하니까, 여호와께서 그것을 악하게 여겨 죽이십니다. 나오미의 가정도 만약 형제가 비슷한 시기에 죽지 않았다면 수혼법이 적용되었을 테지만, 이제 이 집에는 아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2장은 이 두가지 법을 이해하고 읽어야 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룻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유대 땅에는 ‘보아스’라는 친척이 살고 있었죠. 모압 여인 룻은 유대 땅에 돌아와서 일을 시작합니다. 그녀가 하는 일이란, 떨어진 이삭을 주어서 생계를 이어가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녀는 추수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며 이삭을 줍는데, 마침 가게 된 곳이 보아스 소유의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며칠을 일하게 됩니다. (룻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이라고 쓰고, 하나님의 섭리라고 읽어야 할 부분입니다. 어느 날 베들레헴 성읍에 살던 보아스가 자기 농장에 방문하게 됩니다. 거기서 보아스는 젊은 이방여인 룻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감독관을 통해 그녀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으로부터 온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곳에 와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선한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런 룻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룻 2:11) 보아스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남편을 잃은 뒤에 댁이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자세히 들어서 다 알고 있소.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룻 2:12)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보아스는 룻의 선한 마음에 대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한 것으로 응대해줍니다. 사람들을 시켜서 룻이 계속 이삭을 줍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단에서 조금씩 이삭을 뽑아 흘려서 룻이 주어갈 수 있도록 해주라고까지 말합니다. 2장을 읽어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보아스 또한 너무나도 인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룻의 입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선대를 그녀 또한 받게 된 것은 사실이었고, 보아스도 의무 이상의 선대를 보여주었습니다. 룻은 집에 돌아와서 나오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보아스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을 듣자, 안심하며 말합니다. (룻 2:20)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께 복받을 사람이다. 그 사람은, 먼저 세상을 뜬 우리 식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더니,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한결같이 자비를 베푸는구나." 나오미가 그에게 말을 계속하였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운 사이다. 그는 집안간으로서 우리를 맡아야 할 사람이다.” 나오미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줍니다.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집안의 사람이므로, 룻이 그곳에서 이삭을 줍게 된 것에 대해서 안도하게 됩니다. 룻은 그렇게 유대 땅에 적응하여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가게 됩니다. 룻기 3장 (나오미의 작전) 룻기를
보면, 나오미는 항상 오랜 시간 기도하며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면 매우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타입입니다. 그녀는 유대에서 모압으로, 모압에서 유대로 돌아오기를 결단합니다. 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용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또 룻의 뜻을 받아들여 함께 합니다. 이제 나오미가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계획을 결단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룻에 대한 자신의 선대입니다. (룻 3:1)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였다. “얘야, 네가
행복하게 살 만한 안락한 가정을, 내가 찾아보아야 하겠다.” 저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나오미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녀는 고엘 제도를 근거로 룻을 보아스와 이어주려고 합니다. 알고 봤더니 나오미는 룻에게 적극적인 대쉬를 하도록 지시합니다. 알고 보니 나오미가 이 분야에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룻 3:2) 생각하여 보렴. 우리의 친족 가운데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요즈음 그 집 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잘
들어 보아라. 오늘 밤에 그가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 (룻 3:3)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서,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룻 3:4) 그가 잠자리에 들 때에, 너는 그가 눕는 자리를 잘 보아 두었다가, 다가가서 그의 발치를 들치고 누워라. 그러면 그가 너의 할 일을 일러줄 것이다.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밤이므로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있을 것입니다. 룻이 고운 옷으로 갈아입도록 하는 것은 ‘남편의 죽음을 애곡하는 기간이 끝났다’라는 것을 보아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상 애곡하는 기간 동안은 재혼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는 프로포즈의 타이밍까지 정확하게 알려주죠. 먹고 마시기까지는 나타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가 잠자리에 들 때 그의 곁으로 가서 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굉장히 모험적인 행동입니다. 창녀들이 때때로 타작마당에서 영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보아스가 이런 행동을 하는 룻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개적인 수치와 손상된 명예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4절 마지막 부분에 나온 것처럼,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기에, 다소 도발적인 이런 행동을 계획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연출하고 룻이 행한 이 프로포즈 작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자다가 웬 여인이 자기 발치께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누구요?” 룻이 자신의 이름을 밝힙니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 보아스는 룻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아직 절차와 순서가 있음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감정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룻 3:11)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 (룻 3:12) 내가 집안간으로서 그대를 맡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소. 하지만 그대를 맡아야 할 사람으로,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있소. (룻 3:13)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 날이 밝거든 봅시다. 그가 집안간으로서 그대를 맡겠다면,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그 때에는 내가 그대를 맡겠소. 이것은 내가,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오. 아침까지 여기 누워 있으시오. 사려 깊은 보아스는 우선 룻이 걱정하고 있을 부분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룻의 행동을 오해하지 않고 ‘정숙한’ 여인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보아스에게도 룻을 향한 마음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룻을 책임질 차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공정한 절차를 따라 룻을 순리대로 맞이하려 합니다. 보아스보다 앞서 룻에 대한 책임의 의무를 행할 가까운 친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 포기해야 보아스에게 그 책임을 다하여 룻을 아내로 맞이할 차례가 오기 때문입니다. 즉, 룻은 보아스를 향한 마음을 표시한
것이고, 보아스는 그 마음에 화답하여 방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친족이 룻을 책임질 권리를 갖겠다고 하면, 보아스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룻이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이스라엘 사회에서 살아가게 하는 방법이며, 하나님 앞에 옳은 일임을 보아스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과정을 중요시 여깁니다. 어쩌면 결과는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해나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받고 계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룻기 4장 (보아스의 어진 사랑) 보아스는 바로 그날 성문으로 갑니다. 성문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상거래와 민사 소송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룻 4: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마침(4:1) 고엘 제도의 우선권자가 그곳을 지나갑니다. 2장에서 우연히(2:3)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간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놀라운 일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룻 4: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10명의 배심원을 모신 것으로, 이들이 베들레헴 의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일을 매우 적법하고 투명하게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 가족이 필요로 하는 고엘의 의무에 관해서 설명합니다. ① 첫 번째 절차(4:3-4) - 법적인 절차 엘리멜렉의
밭을 무를 수 있는 권리가 그 사람에게 있음을 알림. ② 두 번째 절차(4:5) - 도덕적인 의무 룻과 결혼해서 책임지는 것. 고엘의 우선권자인 가까운 친족은 ‘밭을 사는 것’은 감당하려고 하지만, 모압 여인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는 부담을 갖습니다. 또한 이 사람의 판단 기준은 재산이었습니다. (룻 4:6) 그러자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나는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없소. 잘못하다가는 내 재산만 축나겠소.
나는 그 책임을 질 수 없으니, 당신이 내가 져야 할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지시오.” 그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그 책임을 넘깁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신을 벗는 것이 ‘권리 포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넘깁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곳에 모인 배심원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선언합니다. (룻 4:9) 그러자 보아스가 원로들과 온 마을 사람들에게 선언하였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나는 엘리멜렉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과, 기룐과 말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겠습니다. (룻 4:10) 나는 말론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서,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아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인의 이름이 그의 고향 마을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친족들 사이에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일의 증인입니다.” 결국 보아스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룻을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나오미와
룻의 용기, 보아스의 인내가 열매를 맺는 순간입니다. 룻기에서 강조되는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성경에서는 ‘인애’라고 자주 번역합니다. ‘어진 사랑’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불같은 사랑’도 있고 ‘끝없는 사랑’도 있지요. 그중에서 ‘헤세드’는 ‘배려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사랑을 받게 되는 상대방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행하는 것이 ‘어진 사랑’이 아닐까요? 나오미가 룻을
향해 헤세드를 행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향해 헤세드로 화답합니다. 그리고 유대 땅에서는 그런 룻을 보며 보아스가 룻을 향해 헤세드를 행합니다. 다시 나오미가 룻의 결혼을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룻을 통해 마음을 확인한 보아스는 다시 룻과 나오미를 위한 최선의 모습을 보입니다. 룻기는 그런 의미에서 ‘선한 사람들의 승리’와도 같습니다. 수많은 불행과 좌절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자 했던 그런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신실하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결국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의 결론 (하나님의 파카드) 룻기는 사시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사사기 뒤에 위치하고 있는 책입니다. 사사기의 끝은 폭력과 타락으로 얼룩진 암흑기였습니다.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 암흑과 같은 시대에 빛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은 아주 소소한 일상, 그것도 불행했던 한 가정에서 아름답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 가정의
이야기가 사사시대의 어둠 전체를 희망으로 붙잡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 한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죠. 그것이 룻기의 결론입니다. (룻 4:13)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룻 4:17)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룻 4:21)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룻 4: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13절 말씀,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셨다’. 하나님의 파카드. 양식의 공급에서 나왔던 이 단어가, 임신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한 번 더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다윗. 그의 할아버지가 오벳이죠. 즉,
이방여인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혈통을 통해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니, 룻의 이름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그마한 사건을 통하여서 역사를 빚고 계십니다. 그분의 역사를 이뤄나가는 씨줄에 연결되는 날줄로 룻과 나오미의 삶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때로는 내 기대와 엇나간 일들, 우리의 삶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있겠지만... 끝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슬픔에서도,
룻의 아픔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시선에서는 ‘우연’으로 보이겠죠.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가고, 보아스는 우연히 룻을 만나게 되며, 그 보아스가 마침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인애)이고 하나님의 파카드(돌보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와 파카드는 오늘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여러분의 삶에도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에게 끝까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숨어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삶을 그가 돌보실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