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2주에 걸쳐 교회가 무엇인지 나눴습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해야 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우리를 통해 이뤄가심을 믿으시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교회를 부르셨을까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나누려 합니다. 교회의 사명, 즉 이 땅 위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후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이 당에 오신 목적과 일치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목적이 곧 교회의 목적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에 그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초청하기 위해서 주님은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요 사명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천국’은 죽은 뒤에 가는 곳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새신자반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고, 또 천국을 얻었다. 우리에게 이미 천국이 임하여 있는 것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미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구현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가정과 일터, 그리고 사회가 천국이 되도록 일구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새신자반에서는 ‘모형’이라고 표현했고, 저는 ‘설계도’라고 종종 표현하는 것인데, 바로 에덴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바로 그 낙원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에덴을 이 땅 위에 복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럼 성경은 에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 말씀을 한번 살펴봅시다. 첫째, 에덴은 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창 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창 2: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 2: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물은 자신을 소멸시킴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합니다. 물은 자신이 더러워짐으로 사람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줍니다. 사람이 깨끗해지는 만큼 물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은 사람의 필요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은 사랑입니다. 생명을 낳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자기희생이고, 희생은 곧 자기 낭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혹 그것을 가리켜 낭비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특성이 낭비입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보십시오.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희생과 자기낭비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건강을 쏟고, 시간을 붓고,
정성을 바칩니다. 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기희생과 자기낭비 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이 복원된다는 것은 그럼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자기희생과 자기낭비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예배당일지라도 그 속에 에덴이 일구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산에 밝아서는 안 됩니다. 계산에 밝은 곳이라면 그것은 기업입니다.
교회는 그런 욕심은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낭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인력을 낭비하고, 물질을 낭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마치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낭비한 어머니가 즐거워하듯,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낭비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듯,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낭비를 즐기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특정한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음을 기억해주십시오. 그 강은 네 근원으로 갈라져 동서남북 사방으로 흘러갔습니다. ‘비손’, ‘기혼’, ‘유브라데’ 란 강의 이름은 각각 ‘퍼진다’, ‘내어 뿜는다’, ‘열매를 거둔다’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 강들은 열매를 거두기에 충분할 만큼 물을 뿜어내는 강이었습니다. 교회는 동서남북으로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랑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어느 곳이든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며 생명을 내어 뿜을 때, 에덴은 그 속에서 복원되는
것입니다. 둘째, 에덴은 울타리가 쳐진 곳이다.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한글성경은 에덴을 ‘동산’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원어는 ‘뜰’, ‘정원’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가든’(GARDEN)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정원이 아니라, 울타리가 쳐진 정원을 뜻합니다. 에덴이 울타리가 있다는 의미는 보호와 구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속적 사고방식을
차단하는 것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설령 수도원의 깊은 울타리 속일지라도 세속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곳은 여전히 속세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의 가장 타락한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세속적 사고방식을 초월한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에덴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을 바꿔 먹는 것이고, 그것은 생각이 바뀌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세속적 생각에 그대로 젖어 있는데 어찌 그 마음이 변할 수 있으며, 그 속에 에덴이 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주님을 따라다녀도 자기부인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인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지 않는 나의 옛사람, 죄의 본성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세속적 생각을 버리는 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 사고를 그대로 지닌 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런 자의 삶 속에는 무엇이 주어지더라도 참된 평강과
행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에덴이 되기 위해서 울타리를 치십시오. 그 거룩한 구별이 있을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습니다. 셋째, 에덴은 보석이 있는 곳이다. (창 2: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에덴을 표현할 때 순금과 베델리엄(진주)과 호마노가 등장합니다. 왜 에덴에 보석이 있다는 것을 표현할까요? 하나님 나라와 보석은 어떤 관계로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보석이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계 21: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계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계시록이 보여주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보석’이 가득한 곳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것들이 보석처럼 진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안방 장롱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이나 벽돌처럼 집 짓는 재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재철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보석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보석이 보석 되지 않는 곳이 에덴이라는 것입니다. 이 보석을 상징으로 보든지, 아니면 실제로 보든지 어떤 견해를 따르더라도 결국 보석에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순금, 정금, 이런 표현은 세상에서 어느 시대나 가장 가치 있고 소유할만한 것을 의미함은 다 아실 것입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의 말은 ‘초월한 사람’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세상의 그러한 가치를 초월하고 하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의 훈련은 가장 힘든 훈련이지만, 가장 중요한 훈련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말하지만, 유일하게 하나님과 동급에 놓고 설명을 하셨던 것이 재물입니다. 돈과 하나님. 무엇이 정말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인지 물으셨던 것은, 그리스도인이 재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진짜 신앙인으로 세상의 가치를 넘어선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낙타와 바늘 귀 비유를 통해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신 것은, 일반적으로 부자는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가난하면 다 되나요? 가난하더라도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있다면 그 또한 거절당할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도리어 물질을 더 숭상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그 사람이 부자 되면 달라질까요? 즉 이것은 우리의 태도와 마음,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정말 무엇이 나에게 가장 귀한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
돈인가, 예수님인가. 물론 저는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땀 흘려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목적이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주의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자에게 주어진 물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질이 주어져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는 하나님이 일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변해버릴 사람에게는 안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선생은 해변을 걷다가 다이아몬드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시키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의 보석은 보석이 아니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그의 보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 속에는 언제나 에덴이 넘쳤습니다. 넷째, 에덴은 의무를 다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천국의 모형을 동방의 ‘에덴’에 보여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넓은 세상에서 하필이면 에덴을 선택하셨을까요? ‘에덴’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이 기쁨은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다한 뒤에 맛보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는 곳에는 에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재귀동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든 동작의 결과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에덴이 재귀동사가 되면, 다시 말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형태가 되면 그 뜻은 ‘주색에 빠지다’로 돌변해 버립니다. 참된 기쁨이 아니라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기억해 봅시다.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다윗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던 순간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끝내 그 남편마저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 역시 자신만을 생각한 이후로는 처첩을 1천 명이나 거느렸고, 그것도 모자라 우상의 산당까지 세웠습니다. 영육 간에 철저하게 타락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주위 사람들마저 휩쓸려 버립니다. 교회는 그러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가정의 가족으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래야만 참다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에덴에는 선악과가 있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는 어디서나 볼 수 있게끔 에덴 중앙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에덴에 선악과를 두신 하나님을 선뜻 이해하지 못합니다. 선악과로 인해 인간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에덴에 반드시 있어야 하고, 선악과가 없는 곳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에덴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에 각종 나무를 만드신 뒤 아담에게 그 실과를 마음대로 먹게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담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실과를 먹든지 그 앞에서는 하나님과 아담의 차이가 외관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그 나무만큼은 아담이 함부로 하지 못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피조물임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드러내는 표상이었습니다. 그것이 에덴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죠. 아담은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에덴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에덴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내용은 잘 아시죠. 그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은 그 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죄였고, 그 결과는 에덴의
상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의 복원은 인간이 부정했던 선악과를 다시 바로 세우고 심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의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며,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통치자로 섬기게 되는 것. 우리가 앞서 다룬 것처럼, 자기낭비를 두려워 않는 자기희생적 사랑도, 세속적 사고방식에 울타리를 치는 것도, 진리만을 보석으로 삼는 것도,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는 곳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그곳에 살게 하실 때, 에덴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는 일부터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교회는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사회의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악과를 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집에도, 회사에도, 학교에도, 청와대에도, 국회에도, 그 어느 곳이든 선악과를 심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 마음 한가운데 우선적으로 선악과를
심어야 합니다. 교회 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야 할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일이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실 때에만,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 깊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도록 모시고 섬길 때 성도가 되는 일도, 교회가 되는 일도,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영적 식목일’로 삼아라. 오늘을 우리 마음속에 선악과를 심는 영적 식목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이 땅을 에덴으로 가꾸어 갈 ‘하나의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적인 교회’, ‘사도적인 교회’로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