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러분과 <예레미야 애가>에 대해서 단 한 번의 설교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제가 던져야 할 당혹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이 책에 <예레미야 애가>라는 이름을 붙인 시기에는 이 책을 예레미야의 기록으로 이해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를 예레미야서 뒤에 배치한 것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을 따른 것입니다. 거기에는 애가를 이렇게 설명하거든요. “이스라엘이 사로잡히고
예루살렘이 황폐해진 뒤 예레미야는 앉아서 울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해 이 애가를 불렀다.” 이 설명과 함께 예레미야서 뒤에 애가를 놓은 것이기에 <예레미야 애가>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지은 것이 아니면, 그렇다면 누가 이 책의 저자일까요? 오늘날 애가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책의 저자를 특정하지 않습니다. 우선 애가는 다섯 편의 시 모음집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한 명의 저자가 다섯 편의 시를 모두 지었는지, 아니면 복수의
저자가 기록한 시가 시편처럼 모음집으로 전수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저자도 모르는 이 책에 대한 성경의 권위는 누가 부여해준 것입니까? 그리고 이런 질문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를 꼭 알아야 그 책에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애가 외에도 여러 책들이 저자를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경’이고 우리는 66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 시대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외에도 외경이라고 분류되는 책과 위경이라고 분류되는 책도 있습니다. 어떤 책이 정경이고 어떤 책이 외경과 위경인지 누가 결정했을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연구하고 당대 교회의 중요한 회의를 통해 확정되었습니다. 먼저 구약 39권은 주후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확정합니다. 그리고 신약 27권은 주후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결정됩니다. 정경이 그렇게 확정된 것입니다. 위경은 아예 교회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을 의미합니다.
외경은 참고는 가능하나 신앙의 기준이자 진리의 말씀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경의 권수가 다른데, 가톨릭은 외경 중에서 7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곱 권을 제2정경으로 권위를 가톨릭에서 후에 부여한 것입니다. 물론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이것을 개신교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구약 외경은 전체가 14권인데, 이 외경들은 구약의 다른 정경들과 달리 헬라어로 기록되었고, 기록 시기도 구약시대 이후 중간기입니다.
또한 정경의 기준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서 구약을 인용하실 때 인용되어 사용되었는가입니다. 외경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책은 하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오랜 세월 그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그것을 묵상하고 전수했던 것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아갔던 책들입니다. 그것을 우리도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은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성경을 진리이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가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사람들이 그 말씀을 따라 거듭난 새로운 생명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담은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애가의 저자 문제는 확정할 수 없지만, 애가가 어떤 시기를 반영하고,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예레미야, 열왕기서를 통해서 계속 언급한 것처럼, 분열왕국 이후 북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했고, 남유다만 남은 상황이 지속됩니다. 그 상황에서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선한 왕도 나왔지만, 끝내 유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바벨론에 의한 징계는 한순간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노하지 않는 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혹 ‘사랑’이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으로만 가득 찬 세상은 결코 온전치 않을 것입니다. 폭력과 악행과 불법에 대해서 만약 모두 사랑하자고 말한다면, 그 세상이 어떻게 좋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만이 좋은 것이고 정의로움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여,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된 인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해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특히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약자가 가장 고통받습니다. 그러므로 약자에게 있어서는 정의가 곧 사랑입니다. 가끔 군대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후임을 괴롭히는 선임이 나오죠. 그런데 그 괴롭히는 선임을 간부가 사랑해줍니다. 그 순간 괴롭힘을 당하던 후임에게는 절망입니다. 뭐가 그 후임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겠습니까? 나에게 악을 행하는 존재보다 더 큰 존재가 그 악행에 대해서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만 한 존재라면, 그리고 그것이 마치 AI가 판단하는 수준의 냉정함이어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동정하시는 인격적인 마음이 전혀 없는 공의 그 자체라면, 어쩌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살아갈 ‘기회’조차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시면서도 사랑의 마음이 함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그분의 공의는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참기도 하시고, 때로는 경고하며 기다려주시지만, 어떤 순간에 이르렀을 때는 회초리를 들고 징계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은 ‘끝’을 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다시 시작’하도록 하기 위한 징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이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건부터 이것이 드러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그렇죠.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어지게 된 인간은, 살아있으나
본질상 죽은 상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도 그에 따른 결과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영적 죽음이 질서이고 공의의 결과라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행하시는 일이 그 이후에 등장합니다. 공의의 결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내시겠다는 의지이자 사랑의 약속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인간의 범죄 이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공의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는 자까지 구원하실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올 길,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것만인가요? 범죄 한 후,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 싶어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이것 자체가 비록 죄에 대한 단호함으로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해야 하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너희를 향한 나의 마음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싸인을 주고 계시는 것이죠.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 전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바벨론에 의해 유다는 끝이 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처참한 징계를 받은 직후입니다. 애가의 시인은 이 상황에 대해서 마치 자신이 예루살렘이 된 것처럼 도시를 의인화 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다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의 마음에서 현실의 고통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우리가
열왕기서를 통해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그들의 우상숭배, 하나님을 향한 배신, 정의가 무너진 모습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셔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징계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왜냐하면 징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깨달았어요. 그런데 깨닫는 것은 깨닫는 것이고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해요.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혼내지 않아요. 잠깐 참아주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경고하죠. 그래도 무시하고 계속 잘못된 일을 되풀이하면 좀 더 강하게 혼내기도
하죠. 그런데 자기 잘못으로 인해 혼나도, 그 혼난 것에 대해 슬픈 마음도 있고, 서러운 마음도 있을 수 있어요. 정말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혼냈다면, 때로는 그 자녀의 슬픔도 받아주는 지혜가 필요하죠. 거기에는 잘못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나름의 서운함도 섞여 있고, 또한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있을 수 있어요. 여러 감정들이 머무는 때가 있죠. 그때 그것을 잘 받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잘 털어내고 실패했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레미야 애가>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관점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슬퍼해도 된다. 내 실패에 대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요청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있어서 내 잘못에 대해서 단번에 객관적으로 깨닫기 어려워요. 주관적인 마음이 먼저 있죠. 그런데 대부분은 내가 잘못하여 그로 인한 대가를 치러도 또 한켠에 억울함이 있어요.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자 솔직한 마음이죠. ‘알겠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예레미야 애가>는 바로 그러한 ‘항변’을 담아내고 있어요. (애 1:7) 예루살렘이 고통과 고난을 겪는 날에, 지난 날의 그 모든 찬란함을 생각하는구나. 백성이 대적의 손에 잡혀도 돕는 사람이 없고, 대적은 그가 망하는 것을 보며 좋아한다. (애 1:8) 예루살렘이 그렇게 죄를 짓더니, 마침내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그를 떠받들던 자가 모두 그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서 그를 업신여기니, 이제
한숨지으며 얼굴을 들지 못한다. 애가의 시인은 예루살렘의 곤경과 고통이 너무하다고 항변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책임으로 이것을 돌리지는 않아요. 이 일은 명백한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파도 너무 아프다는 것이죠. 이런 시인의 태도는 당대의 하나님을 오해하던 잘못된 관념들과는 구별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일의 책임을 여호와께 돌리기도 했습니다. 우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들의 경고를
제대로 듣지 않았어요. 아예 감이 없었어요. 자신들이 징계를 받을 만큼 잘못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맞지. 알지. 그래도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니까, 우리를 버리지는 않겠지.” 나라가 위기에 있어도 이러다 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랬다고요. 그런데 예루살렘이 진짜로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다윗 왕조가 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아마도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잘못된 판단의 기저에는 자신들의 잘못된 프레임이 있었어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이래야 하는 분이야.’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정해놨다고요. 그 틀은 깨어져야 하는 틀이었어요. 그 잘못된 틀이 박살이 나야 진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연애할 때 갑을 관계가 있잖아요. ‘쟤는 내가 뭘 해도 나 못 버려.’ 그러면서 막 소홀히 해요. 하나님이 그런 취급을 받고 계셨다고요. 예루살렘 멸망은 바로 그런 오만함과 무지를 깨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깨닫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몰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능력을 부정했어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약한 것은 아닐까?’ 원인을 자꾸 다른 것에서 찾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면 실패해도 기회를 받을 수 없어요. 이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진단입니다. 시인은 그 진단을 정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애 1:18) 주님께서 하신 일은 옳으나,
나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모든 백성아, 들어라. 이 고통을 보아라. 처녀 총각들이 사로잡혀서 끌려갔다. 멸망의 원인은 예루살렘의 불순종에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 옳으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측 못 할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자 반응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심판의 결과는 예상보다 더 비참합니다. 도시 재건을 위해 필요한 ‘처녀 총각들’이 모두 포로로 멀리 잡혀갔습니다. 절망의 현재를 극복하고
내일을 준비할 힘이 없습니다. 현재의 고난보다도 소망이 없는 미래가 더 큰 절망을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변에는 이런 예루살렘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 의지해요. (애 1:21) 사람들은 나의 신음을 듣지만,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내가 재앙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고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그 날이 이르게 해주셔서,
그들이 나와 같은 꼴이 되게 해주십시오. 시인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시길 요청합니다. 자신도 정의 때문에 심판당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정의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로 <예레미야 애가>를 읽다 보면 놀라운 짜임새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1~4장까지는 모두 ‘아크로스틱’이라는 일종의 알파벳 형태로 이뤄져 있습니다. 각 시구가 22개의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기억’으로 시작하고
다음 구는 ‘니은’으로 또 그 밑은 ‘디귿’으로 시작하는 형태입니다. 이렇게 질서정연한 <예레미야 애가>의 구조는 정작 이들이 보고 있는 고통과 무질서와 혼란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애가 2장은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3장의 내용이 매우 중요한데, 시인은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 공의의 실현으로 이해하며, 역설적으로 그러하기에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사실상 예레미야 애가 안에서 유일한 소망의 언어들이 3장에 나타납니다. (애 3: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애 3: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애 3: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애 3: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애 3: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하나님께 혼이 났지만, 그래도 또 믿고 의지할 것이 하나님입니다. 이게 참 알 수 없는 신앙의 아이러니기도 해요. 심판이 신실하게 주어졌다면, 회복도 신실하게 주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이죠. 주의 사랑과 긍휼 또한 믿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하나님께 말하거든요? ‘하나님,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어떻게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순간들을 왜 만나지 않겠어요.
주님의 말씀이 너무 무겁고 버겁고 따라가기 힘겹고.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위로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시기에, 우리의 최선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긍휼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너 왜 쟤만큼 못 해.’ 이러신 분이 아닙니다. 제가 소위 빠른 연생이라서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당연히 한글은 학교 가서 배우는 거로 생각하셔서, 저는 한글을 알지 못한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한글은 그냥 그림이죠. 그거를
하나씩 배워가는데 친구들은 이미 다 배우고 온 것이니 저는 못 따라갔죠. 제가 학교 다닐 때, 한 학년이 28반까지 있었어요. 그래서 14개 교실은 오전 오후반이 나눠서 썼어요. 제가 오전 반이었는데, 그날따라 선생님이 숙제를 칠판에 한가득 적어주고 간 것입니다. 애들은 그것을 술술 받아적고 집에 갔는데, 보고 그리는 수준의 저는 혼자 남아서 힘겹게 그것을 옮겨 적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후반 애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제가 너무 당황해서 막 울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오셔서 대신 그것을 적어주셨어요. 당연히 받아쓰기 시험도 저에게는 고난 중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래도 저의 마지막 자존심은 0점은 안 맞는 것이었는데, 정말 가까스로 10점, 20점 이렇게 맞는 것입니다. 당시에 받아쓰기 100점을 맞으면 책받침을 상품으로 줬어요. 저는 어림도 없죠.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드디어 신기록을 세웁니다. 무려 50점을 맞은 것입니다. 다른 애들한테는 그것도 못 한 거고 부끄러운 것이죠. 그런데 저에게는 처음으로 절반을 맞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이 저에게 책받침을 주셨어요. 선생님이 제 상황과 수준을 알고 계시니까요. 제가 그것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렇게 힘겹게 1학년 1학기를 보내고, 저는 1학년 2학기가 됐을 때는 받아쓰기를 항상 100점 맞게 되었죠. 저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상대평가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의 애씀과 진보를 격려하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시는 것이 많아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 요구가 무겁고 버겁고 싫을 수도 있죠.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주고 싶은 어떤 부분을 위한 것입니다. 종과 주인이라는 성경적 표현으로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종으로 우리를 부려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더 악한 것의 종이 되어 더 힘겹게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곁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그 삶을 깨닫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현재를 너무나 잘 아세요. 우리가 다 시작점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성향이 달라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어떤 많은 헌금보다 귀하게 여기셨어요. 우리의 최선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아시나요? 우리의 연약함도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도 아세요.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실패할 수 있음을
아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내셨던 것은 그들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마음이시죠. 그러나 그들이 실패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전히 갖고 계신 마음은 이스라엘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패와 좌절과 절망 속에서 그들이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참 좋아해요. 바울은 닮고 싶지만 참 저를 힘들게 하는 모델이고, 베드로는 저를 위로해주는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유다처럼 실패로 끝이 나면 안 됩니다. 같은 실패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실패를 딛고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해요. 저는 <예레미야 애가>의 신학이 바로 그 실패의 비통함, 실패의 눈물, 좌절과 절망과 참혹함 속에 내뱉는 탄식. 그것이 하나님께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하나님은 <예레미야 애가>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으로, 정경으로 주셔서 읽게 하세요.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 하세요.
우리에게는 세상에 없는 권리가 있어요. 아빠 앞에서 투정할 권리. 아빠 앞에서 울 권리. 죄송하고, 내가 망쳤고, 더 잘해야 하는 것 아는데, 아직은 나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 실패한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어주시며, 그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것이 제가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서 발견하는 하나님입니다. 시인은 이 비참한 상황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분, 또 우리를 도와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쉽게 말해서 벌주시는
분이 회복도 주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애 3:38) 궂은 일도 좋은 일도, 가장 높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셔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 (애 3:39) 어찌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죄값으로 치르는 벌을 불평하느냐? (애 3:40)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 시인의 결론은 ‘주님께 돌아가자’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만나죠. 그 상황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돌아가야 할 초점, 목표, 길을 찾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다른 분주함 속에서 문제의 초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망각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요. 그래서 설교는 신앙인들에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방향과 목표, 초점을 상기시키는 일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예배로 나아가고, 말씀을 찾아 읽으면서, 다시금 떠올리는 것이죠. 우리의 초점이 흔들릴 때, 그것을 예배와 말씀 안에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답’을 몰라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뻔히 답을 알고 돌아가야
함을 알아도 그것을 수행할 힘과 용기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금 내 안에 상처가 너무 많고, 억울함이 너무 많아서 답을 붙잡고 싶지도 않은 때도 있죠. 내 안에 나쁜 감정들로 가득 차 있어서 무언가를 담아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마음에도 함께 하세요. 말씀을 보시죠. (애 3:56)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애 3:57)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울부짖고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내십시오. 주님 앞에서 울어도 괜찮습니다. 제가 오늘, 이 설교와 함께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는 다릅니다. 누구는 성장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또 누구는 회복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누구는 런닝을 하는 것처럼 뛰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 필요해요.
하지만 누구는 잠시 앉아서 쉬는 것이 필요해요. 여러분 가운데 설교를 잘 새겨듣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쓸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담아낼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말씀이 지금 나를 성장하게 하고 있다면 내가 그것을 담아내며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소중하고 귀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내 삶에서 적용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잘 안될 수도 있어요. 만약 그런 상황에 있다면,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마세요. 가야 할 길을 알아도 아무것도 못하겠다면 잠시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세요. 다만 부탁드리는 것은 그럴지라도 주님 앞에서 그저 머물러 계십시오. 하나님도 그런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셔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우리의 치유이고 회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힘들 때면 나를 아껴주는 사람 앞에 앉아만 있어도 위로가 되잖아요. 하나님은 오죽하시겠어요. 우리교회는 여러 사역이 많고, 너도나도 이것저것
하느라 분주해 보이기도 하죠. 이 가운데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나 고민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역을 하는 것이 영적 성장과 공동체를 누리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교회의 여러 훈련, 사역들은 언젠가 여러분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임상도 하며, 누구나 잘 누릴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만들어두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길을 앞서서 가고 있다고 해서, 나를 돌보지 않고 조급하게 뭔가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주님 앞에 있는 것, 즉 예배부터 잘 세워가야 합니다. 예배는 호흡이고 생명입니다. 그것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있을 때라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을 놓지 않고 가능하면 그분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가 의지하고 내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면... 내 안의 억울함, 미움, 원망 이런 감정들 털어내고 나면... 주님께서는 그래도 곁에 계시며 위로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저는 넘어져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다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구나 회복되고 채워지면 멋지게 하나님을 향해 헌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애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 5: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사실 22절의 번역은 개역개정에서는 절망적 탄식이지만, 원어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당신이 저희를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면, 저희에게 참으로 화가 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것은 절망의 표출보다는 소망의 확신 속에 주님께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우리는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 출발을 허락해주십시오.’ 우리의 실패가 다시 일어나 걸어가는 새로운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주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고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그런 주님의 일하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하시는 분 가운데, 나는 지금 완전히 망한 예루살렘의 폐허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 있습니까?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때로는 그 고통의 목소리를 들어주시는 한 분으로 말입니다. 누군가는 바벨론 포로기에 끌려간 것 같은 세상의 거대한 힘 앞에 짓눌려 고민하며 괴로워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여기에도 하나님은 계시는가? 네. 하나님은 그곳에도 예언자를 두셔서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우치시고 돌이키시고 훈련하셔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눈빛과 손은 단 한 번도 거두신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실패와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내게는 돌아갈 기회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나도 받아주실까? 네.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는 자격이 없습니다. “다시 해보자. 괜찮아. 난 너를 믿는다. 함께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