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도에 대해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첫 시간에 기도가 하나님의 특권임을 나누면서, 이 기도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시작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도라는 엄청난 특권을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둘째, 정말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될까요? 셋째, 과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없다면 하나님은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실까요? 1. 하나님께서 기도란 특권을 주신 까닭이 무엇인가? 기도의 특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을
위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아름답게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기도의 특권을 계속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남용하고 오용한다면, 그는 끝내 그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신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도 응답을 받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눈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 속에는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였음에도 주시는 것들이 더 많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결론적으로 드릴 예정입니다. 그 답을 향해 나아가면서 먼저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키워드는 ‘닫힌 기도’와 ‘열린 기도’입니다.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의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될 것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내 삶의 방향이 더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떤 기도를 하게 될까요? 나의 뜻과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내 생각보다 크고 정확함을 믿기 때문이죠. 목회를 하다보면 성도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인생의 여러 실패와 아픔을 마주하였을 때, 사실 그 앞에서 목사로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당연히 기도보다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와 함께 만약 대표하여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거기서 제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기도의 태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구함과 동시에 어떠한 일이든 거기서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따르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 이 일이 우리에게 왜 일어났는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일 가운데서도 일하시며 이끌어 가시기에,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금요기도회 주제로 기도에 대해 나누는 3주간,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 질문의 내용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답이 있는지, 그리고 기도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지, 혹은 그것을 바꿀 수도 있는지 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질문들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언제든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설명해달라고 말씀하십시오. 이 시간에 아주 짧게 제 생각을 언급해본다면, 저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답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이
원래 정해놓은 것에서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주일의 본문이죠.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를 가나안에 보내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의 황금송아지 사건으로 그들은 진멸하기로 뜻을 바꾸십니다. 모세는 그 심판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다시 출애굽 1세대를 사용하기로 뜻을 바꾸십니다. 우리는 간혹 ‘예정론’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은 무조건 그대로 된다는 생각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답정너’라는 것이죠. 그것을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야. 내가 받아들여야만 해.”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우리는 오류에 빠집니다. 말씀의 내용을 보면 뜻을 바꾸시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지는 마십시오. 그런데, 황금송아지 사건과 모세의 이야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뜻을 바꾸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시기까지 모세의 간구함이 있었지요. 생명을 건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후에도 생명을 건 기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때마다 무조건 뜻을 바꾸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본문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은 램프의 지니가 되어버리고, 모세의 생명을 건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주문이 되겠죠. 자꾸 이런 것을 마치 비법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게 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면 그분은 우리의 신이 아니라, 우리의 종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할 비법은 없습니다. 그저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의 진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도 그 계획도 우리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뜻을 말씀해주시고, 또 뜻을 바꾸기도 하시고, 때로는 안 바꾸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입니다. 인간이
진실한 간구를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을 따를 수 있어야 하죠.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비법을 알았다면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때는 왜 그것을 바꾸지 않겠습니까? 평생의 소원인데.... 그런데 모세는 후에 가나안 땅에 모세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순종하며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수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 기도는 뜻을 바꾸는 것과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실 저는 기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도하는 우리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뜻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마 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9a)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유명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그 기도에서 예수님의 요청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잔’이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성경에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라는 한 문장이 나올 뿐이지만, 그 한마디의 기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처절하게 기도했던지 피 같은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깊은 고민과 슬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숭고한 사명을 앞두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자신이 피하고 싶은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될 때 처절하게 매달릴 것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 곧바로 죽음의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한다면, 아마 저도 하나님께 처절하게 부르짖을 것 같습니다. 남겨진 가족이 느낄 슬픔이 싫고, 여러분과의 시간이 없음을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에는 대반전이 있습니다. (마 26:39b)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피땀 흘리며 당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살고 싶은 것은 나의 뜻이요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이 잔을 피하는 것은 나의 영광을 위함이요 마시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함임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구하며 기도를 마치십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열린 기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결과와 그 이후의 일하심에 대해서 열어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되는 ‘닫힌 기도’는 자기 뜻만을 관철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것 아니면 안 돼요.” “하나님 이거 안 들어주면 하나님이 하나님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닫힌 기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닫힌 기도가 아니라 열린 기도여야 합니다. 내 기도를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언제든지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대로, 자신의 기도를 기꺼이 버릴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자신의 기도를 끝까지 고수하기만 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서 계셔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내어드리지 않으려 하는 상태입니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도를 배우면서 말해왔던 그것들. 하나님이 내게 주시지 않으면 그것이 내게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내 삶을 가장 잘 인도하실 수 있고, 나를
사랑하셔서 그분을 따라가면, 나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에게 그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운전대를 맡기겠어요. 여러분, 저는 운전하면 잘 피곤해해요. 그래서 장거리 운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사역을 할 때 수련회를 가면 특히 중고등부나 청년들 수련회를 가면 운전할 사람이 없는 경우에 어쨌든 제가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정말 땅끝마을이던지, 거제도를 가던지 제가 종일 운전을 하곤 했죠.
특히 수련회 끝나고 저 빼고 다 잠들면 정말 곤욕이죠. 그런데 예전에 한번은 운전이 능숙하지 못한 사람인데 자기가 해본다는 것이에요. 그 불안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옆에서 가는데, 정신적 에너지가 더 들어요.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요. 참고로 저의 아내는 운전을 잘합니다.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 저는 가족 휴가는 아무리 멀리 가도 두렵지 않아요. 번갈아 가면서 운전을 하면 되니까요. 인생이라는 길을 운전해 갈 때, 나보다 더 내 인생을 잘 운전해나갈 하나님께
맡기는 것. 사실 그것이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큰 평안이죠. 내 운전대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특권입니다. ‘열린 기도’는 그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과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성령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한 선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고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버리기 위해 열린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러분. 만약 우리가 어떤 선교사님과 선교지를 품고 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보의 힘을 깨달은 선교사님이 오늘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 기도의 내용에 맞는 삶과 사역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그는 우리의 기도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 저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거나,
혹은 저 높은 곳의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끌어내리기 위해 기도하려 합니다. 그런 기도는 힘듭니다. 그러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을 만나면, 나는 그분의 기도에 동참하면 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관점으로 나를 살피면 나의 기도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나의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빛으로 조명하면, 내 삶의
가장 은밀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거짓마저 보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기도의 내용은 성령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향해 자발적으로 바뀌고, 그 기도가 진실하다면 우리의 삶 또한 교정되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최고 단계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 사람은 마치 셀든(C. M. Sheldon)의 소설 제목처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기도의 버전으로 바꾸어 말하면, ‘주님께서 지금 내가 어떻게 하기를 기도하실까?’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행동합니다. 그럼 그 모든 삶이 곧 기도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나를 위한 주님의 기도에, 주님의 중보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길을 걸으면서도 주님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고, 차를 운전하면서도 동참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 자체가 온통 기도일 수 있습니다. 마치 선교사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에 그 선교사님이 부합하여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의 기도에 함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성령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기도의 삶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 초반에 다시 던졌던 질문 중에 세 번째 질문. 3. 과연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만약 옷깃을 여미고 골방에서 무릎 꿇는 것만을 기도라 한다면,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삶이 주님의 기도에 동참함으로써, 나는 온종일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의지하며, 주님의 기도와 말씀 안에 거하여 살아간다면, 나의 삶 자체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1절의 말씀이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배우며 마음에 새긴 것을 요약한 구절이겠죠. 그런데 본문에서 유의해야 할 단어는 12절을 시작하는 ‘그러므로’입니다. 이 장의 결론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구하든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알았다면... 그 좋은 것 속에는 내가 구하지도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염려 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인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고, 내가 높임 받고 싶고, 내가 위함 받고 싶은 그대로 먼저 상대를 사랑하고, 높이고, 위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배우려다 보니, 역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 그분의 뜻과 영광과
나라를 먼저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살아생전 이 땅에서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제아무리 아방궁과 같은 대저택에서 산다 해도 부부 사이가 나쁘면 그들은 지옥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초가삼간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위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죠. 따라서 사람과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심화시켜 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충만하게 응답하시지 않겠는가?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그것을 사람 사랑의 도구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연장으로 쓸 테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의자에 앉아서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무릎을 꿇고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기도할 것인가, 마음속으로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형편과 상황에 따라 좋은 대로 선택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왜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하는 이유를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기도하는 시간에,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며 열린 기도를 드리며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돈을
구할 수도 있고, 더 나은 상황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궁극적 목적이 주의 나라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구하는 것, 혹은 또 구하지 않는 것까지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구하며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갈 때, 여러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에 성령이 동행하시며 인도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