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7과 / 교회란 (1) / 강정규 목사

2021-11-0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새신자반을 나눈 지 16주가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새신자반의 6가지 주제를 다뤘고, 이제 7번째 주제를 다루게 되었는데, 신기할 만큼 이 메시지가 우리의 관심과 필요와 함께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시다시피 월요일부터 3일 동안은 세미나를 들었고, 어제는 외부에서 특강을

인도했습니다. 3일간 세미나의 주제도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 진짜 교회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에 몰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나눴던 강의도 마찬가지였어요. 진짜 교회를 고민하며 걸어왔던 시간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가 바로 ‘교회’입니다. 일반적으로 밖에서 ‘교회’하면 생각나는 모습이 뭐야? 이렇게 물으면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아마도 십자가와 더불어 잘 지어진 건물을 연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당’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이곳은 사귐의교회 예배당입니다. 제가 ‘예배당’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많이 쓰는 것 아시나요? 저는 이 공간을 주보 등에 표기할 때 항상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전은 건물에 부여하기에 너무 아까운 단어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에요. 우리가 편의상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 ‘교회’라는 단어 안에 공간적 개념을 넣습니다. “우리 교회는 5층이야.”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할 때는 우리 교회

예배당은 5층이야라는 의미이죠.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예배당을 ‘집’에 비유한다면, 교회는 ‘가정’입니다. 집과 가정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어떤 사람일가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어떤 교회 교인들보다 우리 교회는 이 말을 잘 이해할 거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건물조차 없는 교회로 지내봤으니까요. 섬유지원센터 401호를 우리가 감히 ‘교회’라고 부르며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곳에서 예배하는 그 시간 동안 그 장소는 ‘회의실’이었으나 그 안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지요. 그러나 그 성도들이 가고 나면 그곳은 ‘회의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입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많지 않아요. 2번입니다. 그중에 처음으로 그 단어를 말씀하신 것이 이 부분이죠. (마 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구약부터 기다려온 그 메시아가 당신입니다. 이런 고백을 드린 것이죠.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을

들으시고 이러한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어디에 세운다고요?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세워지는 교회는 누구의 교회입니까? ‘내 교회’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목사, 장로, 집사 혹은 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주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 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정리하면, 교회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경배하며, 그분의 사랑과 뜻을 이 땅 위에서 자신의 삶으로 심어 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것은 건물이 낡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인 우리 자신이 부패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다운 교회이기 위하여, 교회 된 우리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가꾸어 가야 할까요? 교회의 특성 381년에 교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하나여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여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교회가 믿는 주님이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죠. 그러나 이것이 ‘모임’의 수가 하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정말 교회가 모두 하나인가? 질문이 듭니다. 대표적으로 장로교, 감리고,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 개신교의 울타리 안에서도 너무나 다양하고 다른 교파들이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의 교회일까요? 이재철 목사님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피를

나눈 육신의 아빠는 이 목사님 한 분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네 자녀에게 백지를 나누어 주고 아빠에 대한 글을 써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분인 아빠’와 살고 있는 네 아들이 쓴 내용이 동일할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빠에 대한 그들의 경험과 인식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네 아이가 쓴 내용이 상이하다고 해서 그 모든 내용이 거짓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두 ‘한 분인 아빠’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 분인 아빠’에 대한 네 아이의 각기 다른 내용을 모두 읽어 봄으로써 ‘이재철 목사님’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한 아이의 글만 읽었다면 그 인식은 매우 단편적이 될 것이죠. 결과적으로 아빠에 대한 아이들의 상이한 글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아빠를 바르게 인식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복음서만 하더라도 네 권입니다. 그 내용도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운데 거짓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네 복음서의 핵심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님께서 복음서의 기자들에게 성령님의 감동으로 복음서를 쓰게 하셨지만, 그들을 비인격적인 기계로 다루신 것은 아닙니다. 인격자이신 성령님은 각 저자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라는 세관원의 인격, 마가라는 청년의 인격, 누가라는 의사의 분석적인 인격, 요한이라는 노인의 인격을 감동케 하시어, 그들이 자신들의 인격 속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된 네 편의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입체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네 권의 복음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 유한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네 편의 복음서가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이것을 교파에 적용해 봅시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의 교파가 지닌 시각만으로 온전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고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만이요 교만입니다.

여러분, 어디 가서 내가 성결교회에 다니니까 ‘성결교가 최고다’, 혹은 ‘다른 교파가 최고다’ 말하지 마십시오. 2대째 성결교 목사인 저도 그렇게 말 안 합니다. 제가 성결교가 아니라 다른 어떤 교파에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동일한 그리스도인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교회의 예배 시간에 체험하는 은혜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한 교파의 설명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결교회에서 자라서 성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군대에 갔습니다. 그곳 교회에서 다양한 교파의 사람, 다양한 교파의 신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DTS를 갔습니다. 거기서 정말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과 만나 6개월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의 석사 과정에 가서 정말 다양한 목사님들과 함께 1년을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시간은 저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성결교회에서 2번, 감리교회에서 1번,

장로교회에서 1번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침례교회나 순복음 교회에 이력서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디가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파들을 대할 때의 원칙이 있습니다. 다른 교파에 대해 철저하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신앙적 신학적 색깔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하고 배우며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교파도

한 교파의 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교회 안에서 어떤 이들은 교파 사이의 벽을 높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맞다고 날을 세웁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옳고 다른 것은 마치 폐기되어야 할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자녀 둘이 같나요? 다르다고 하나 버리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세워진 교회는 다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기억하십시오. 2)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현재 직분을 공식적으로 임명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물론 이 또한 교회의 선택입니다. 직분제가 맞는 교회도 있고, 최근에는 직분제를 없애는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공동체에게 몇 년 전 직분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던졌고, 이제 어느 정도는 합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 우리는 기존의 받은 직분을 호칭으로 불러드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서

유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협의 내용입니다. 지금은 가급적 40세 이상의 분들은 직분을, 그 아래는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거의 제 나이가 기준입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 호칭이 있다면 ‘형제’, ‘자매’일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인의 정서상 연장자에게 부르기에 우리가 상당히 어색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모두를 지칭하기에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 있다면 ‘성도’입니다. 사실 성도는 정말 좋은 단어인데, 직분제로 가게 되면 성도가 가장 초보적

신앙을 가진 자의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성도 뜻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장로나 권사보다도 더 좋은 단어입니다. 성도. 그런데 이 단어에서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것은 정말 우리가 이 단어처럼 거룩한가? 이것이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를 거룩하다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롬 1: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말합니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향하여 거룩하다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거룩할 수 있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머리입니다. 제가 자주 보여드리는 도표가 있죠.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만약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그저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속됨이 그분으로 인해 변화되기보다 다수 안에 먹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일 때, 우리는 그분의 영향력을 받습니다. 세상 어떤 권세보다 크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손과 발은 머리의 영향을 받습니다. 힘은 손이 더 셀지 모르지만,

결국 머리가 모든 것을 통제합니다. 머리에 의해 우리는 움직이게 됩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본래 거룩하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무지할지도 몰라요. 제멋대로이고 엉망입니다. 머리에 의해 통제받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손발이 따로 놀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거룩하신 주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셨어요. 그 안에서 우리는 머리의 영향을 받으며 함께 그분의 거룩함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우리를 몸의 일부로 불러주셨으므로, 예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언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바로 교회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말씀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모든 일을 담당하고 계신 분, 모든 일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는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분은 교회 안에서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며, 교회를 통해 만물을 자신의 임재로 가득 채우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자신의 임재로 가득 채우십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몸이고, 우리 안에서 그분은 말씀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분을 잘 붙들고 살면 됩니다. 그분으로부터 오는 충만하고 놀라운 사랑을 힘입어 누리면 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의 예배를 통해, 여러분이 충만한 그분의 사랑으로 옷 입혀지고 채워지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 그분을 구하며, 그분으로 충만해지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결국 우리의 모든 시작은 주님과의 충만한 사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함께 그것부터 구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