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9과 /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3) - 봉사와 섬김 / 강정규 목사

2022-01-21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원래 새신자반의 소제목은 ‘봉사’만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읽을수록 이 내용이 ‘섬김’의 내용과 함께하고 있다고 여겨서, 봉사와 섬김으로 주제를 삼아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세상의 구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쉽게 말해서, 세상의 법칙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고 높고 강한 사람은 섬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법칙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법칙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 명령은 갑자기 어느 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것이 목표였고, 어쩌면 이제야 말할 수 있는 때가 되어 꺼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하나의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추구와도 같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요.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장 높은 존재인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그는 인간의 삶에서도 왕궁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세상의 법칙을 따라 다스리는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고, 철저하게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말구유에서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는 것.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출신이라는 점은 도시라기보다는 빈민촌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에 대해 나다나엘이 했던 말이 있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5-46) 또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조금은 이른 나이에 사별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경험한 삶은 평탄한 삶이라기보다는 세상의 기준에서도 만만하지 않은 삶을 택하여 오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래야만 기독교가 지식인의 종교, 왕궁 중심의 종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뭇사람의

섬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색으로 밤낮 사람을 섬기느라 동분서주하는 삶이었죠. 그런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감히 하나님 아들이라고 사칭하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신성모독죄로 죽이게 됩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욱 친절하며, 여러분이 섬긴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들입니까? 만약 그들이 한결같이 여러분보다 크고 높고 강한 사람들이라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강한 사람을 따르고 높이는 것은 봉사나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그를 통해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라면 내 섬김은 돌아올 대가를 기대한 투자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은, 섬김의 대상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봉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섬김을 목숨을 다해서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섬기시되 보상을 기대하시는 분이었다면, 인간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기까지 섬기는 삶을 사시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한 시대의 전설이 된 정복자요,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동상으로 남아있는 그런 대제국을 이뤘던 군주들이 있었죠. 알렉산더, 칭기즈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은 드넓은 정복지의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았습니다. 살아생전 그들만큼 많은 사람으로부터 섬김과 높임을 받은 사람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섬김을 받는다고 해서,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들을 구원자로 받들어 모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평의 땅을 정복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는커녕,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제자에게조차 배신당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희한한 것은 그토록 초라하고 무력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부터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십자가 위에서 인간을 위한 섬김을 완성하신 그분을, 하나님께서 부활의 구주로 높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분은 사람을 섬기시고, 그 대신 하나님의 섬김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는 가장 낮은 자로 섬기시다가, 이 땅을 떠나신 뒤에는 가장 높은 분으로 섬김을 받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사람, 주님을 꼭 닮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사람을 섬기고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이란 가장 낮은 자가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보다 사회적 지위와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오히려 여러분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섬기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섬김의 현장에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또 여러분을 높여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기에 그분의 높임은 우리가 받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는 낮아지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높아지는 것처럼 보일 때 실은 낮아지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진실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진리와는 완전하게 다른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향이 세상과 구별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교회는 직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직분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직분은 좋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직분이 계급이 되어버린 것이 많은 교회 안의 모습입니다. 사회생활 하는 남자들 중에는 나이 50이 넘어가고 2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는데, 장로가 아니면

그것이 부끄럽기에 힘써 어떻게든 장로의 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분이 때로는 섬김을 위한 것보다 명예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자꾸 우리는 서열화 합니다. 장로의 세계에 들어가면 또 거기서 서열화하고 순위를 매깁니다.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우리는 그렇게 좋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가장 헌신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자신을 내려놓고, 섬기고, 다른 이를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교회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오로지 자신의 신앙생활에만 집중하며, 챙김을 받고,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 이제 막 신앙이 자라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항상 그들이 교회에 오면 누구보다 챙겨주고, 환대하고, 편의를 봐주는 그런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의 도를 아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교회의 섬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봉사는 그 어떤 것도 억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섬김의 명령일지라도 기쁘게 수행하고 싶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수고스러운 봉사와 섬김을 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 더 헌신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에서 우리 전체 공동체를 위해, 우리의 공적 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속한 지체들을 위해, 아니 우리의 이 장소 구석구석을 위해 섬기고 애쓰는 일까지도, 저를 포함한

리더들이 가장 먼저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경험한 것은 보급으로 간식이 나오는데 부족하게 나오면 위에서부터 채워주다가 아래에서 끊기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기계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군대에서 처음 자대에 갔을 때는 관물대가 부족해서 관물대 없이 생활을 했습니다. 보급품이 새로 지급되면 제일 고참이 새것을 갖고, 자신이 쓰던 것을 밑으로 내려줍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처음 받은 물통은 저보다 30년이나 세상을 더

경험한 6.25 시절 물통이었습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간식이 부족하면 가장 먼저 제가 안 받고, 그다음에 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줄 것 같은 리더들을 안 줄 것입니다. 귀찮은 일을 해야 하면 가급적 저와 아내가 소화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래도 안 되면 주님의 섬김을 가장 기쁘게 따라 행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마땅히, 기꺼이 그렇게 해나갈 수 있는 교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리더가 되는 것은 귀찮음과 불편함과

희생을 주님 모습 기억하며 감내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 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물질도 시간도 공동체와 다른 이를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말이 바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특별한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기꺼이 살아가는…. 저는 사귐의교회 목사로서 정말 감사한 것은, 저희 교회 안에 정말 이런 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배우고 닮고 싶은 섬김의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저도 우리 성도님들 모습을 보면서 늘 배웁니다. 저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클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고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함께 그러한 섬김의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며 자라가면 좋겠어요. 반드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무엇입니까? 섬김과 봉사는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섬기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만약 내가 너희를 섬겨 줄 테니 주님이 있는 곳까지 올라오라고 하셨다면, 인간 중에 과연 누가 주님 계신 곳까지 올라 그 섬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관심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번외라고 하고, 자신들 안에서 누가 더 높은지를 서로 따지며 싸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그때까지 그랬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주님은 그때 답답함 가운데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더 낮추어 사랑하는 법을 보이셨습니다.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이 혹시 어떤 가르침이라면, 반드시 사랑을 먼저 보이십시오. 주님께서는 섬김의 대상에 맞추시되, 상대의 머리가 아니라 발아래까지 내려가는 섬김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서 전해보겠습니다. “그대 곁에는 상종하는 것조차 괴로운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대의 지성과 인격에 비해 그 사람이 아무리 유치하다 해도 그대는 먼저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 사람의 머리까지만 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대가 언제나 그 사람의 머리 언저리에서만 머물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 애쓰고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 그대는 이제 그의 발아래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대가 그곳까지 내려가면 그때부터 주님께서 역사하신다.

그 사람의 발아래 그곳에는, 무릎을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주님께서 그대와 그 사람을 함께 끌어올려 주신다.” 여러분.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저에게 만약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발을 씻겨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저는 여러분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허락해주십시오. 이 부분에 대한 설교문을 쓰다가, 마음을 주셔서 이렇게 한 문장을 더 적고

여러분과 나눕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마음을 진정으로 실천해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가장 잘해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입니다. 가서 배우자의 발을 서로 씻어 주고, 자녀들의 발을 닦아주십시오. 청년들은 부모와 형제에 대하여 실천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이 설교를 삶으로 가져가서 실천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 주제의 큰 제목이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을 본받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는

섬김의 삶이어야 하기에, 교회생활 가운데서도 봉사가 빠질 수 없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당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봉사라도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섬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가장 덜 이기적일 수 있는 교회에서조차 여러분이 봉사와 섬김을 스스로 훈련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의 참된 봉사와 섬김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교훈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가장 약자인데요. 사회적 지위나, 직장에서의 역할이나,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더 낮아져 섬기고자 하더라도 내 주변에 나보다 낮아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 보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항상 로마서 15장의 말씀을 전해드리곤 합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롬 15:2)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롬 15:3a)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 기득권을 갖고 있거나, 그런 지위와 힘을 갖고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내 옆에는 세상으로 볼 때는 나보다 강한 자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약함을 돌보아 주는 것이 우리의 섬김이 사용될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살피는 행동을 하면서 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것. 어쩌면 이것은 가족 안에서, 이웃 안에서, 직장 안에서... 그리고 때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서로에 대하여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낍니다. 마땅히 목사로서 제가 가장 잘 섬기고 품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저의 모습들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정죄를 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우리가 깨우치고, 이 말씀을 따라 살기를 다시 힘써보자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어떤 선한 것이 내게서 나오겠습니까? 그저 오늘도 이 말씀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때, 그리고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말씀 따라 살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으로 하나님의 힘을 구하면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